‘몸이 가볍군.’
마인들이 그를 경계해 뒤로 물러나건 말건, 윌리엄은 느긋하게 달라진 신체를 관조했다.
훨씬 부드러워진 오러의 순환.
가벼워진 몸.
사라진 흉터들.
조금 더 높아진 눈높이.
그리고…
“사, 사자검협?”
“하지만 분명…!”
“방해하지 마라.”
‘무슨 기세가…!’
단순히 쳐다보고 있을 뿐인데도, 심장이 죄일 정도의 압박감.
마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윌리엄을 경계했지만, 윌리엄은 그들이 그러건 말건 연인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바빴다.
“혜령아, 몸이 상했으니 쉬고 있어라. 목경이 너도.”
“은공…대공을 이루신 겁니까?”
“아마.”
애매한 대답을 남긴 그는 몸을 돌려 상당한 거리를 벌린 마인들을 쳐다보았다.
‘스물….이라.’
윌리엄의 평온한 눈길이 마인들을 훑었다. 마인들은 그의 눈빛을 보곤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다니!’
상대가 일반인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상대는 그 사자검협.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설마…
“바, 반박귀진?”
“아, 여긴 그렇게 불렀었지.”
마치 산책을 나온 것 같은 얼굴로 마인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준 윌리엄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직전의 전투로 날이 상하고 이가 나간 검.
제대로 된 검으로서 기능하기엔 상태가 처참했지만,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
“할 일이 있으니 빨리 가야겠군.”
그 말과 함께, 윌리엄의 신형이 순식간에 마인들 한 가운데에 나타났다.
그리고, 마인들이 그 사실을 인식한 것은 목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후의 일이었다.
“이게 그랜드마스터…”
격이 다른 신체 능력의 차이.
스스로의 몸을 담금질하여 만들어낸 그랜드마스터의 육체는 기존과는 비교가 안 되는 신체 능력을 자랑했다.
가벼운 뜀박질이 이형환휘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주게 될 정도로.
“아저씨! 축하드려요!”
“그래. 너도 안가 지키느라 고생 많았다.”
“대협! 대공을 이루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가가, 축하드려요.”
“회포를 풀고 싶지만…아직 할 일이 산더미로군.”
‘파르스 그 새끼를 빨리 찾아야겠지. 모든 걸 끝내려면.’
갑옷…은 입기에는 망가진 부분이 많아 애매하고, 검은 상해서 험하게 쓰면 부러져도 이상하지는 않은 상태.
하지만 윌리엄은 왠지 걷기만 해도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쉬고 있어. 할 일을 하고 올 테니.”
세 연인을 애정이 깃든 눈으로 바라본 윌리엄은 앞으로 나아갔다.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을 시간이 다가왔으므로.
————
청해성은 마인과 정파의 무인들, 그리고 병사들과 도망치는 백성들로 혼란에 가득 차 있었다.
‘…파르스는 어디에 있지?’
“괴, 괴물!”
“흠.”
윌리엄은 검을 붙잡은 채로 느긋하게 검기를 만지작거렸다.
‘맨손으로 만지는 검기는 느낌이 좀 특이한데.’
마기로 이루어진 검기인 탓일까.
윌리엄은 불에 달궈진 꼬챙이 같은 감촉에 신기함을 느끼며 손을 쥐었다.
“으, 으윽…”
부서져버린 검.
검기 째로 부서진 탓에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한 마기.
예상치 못한 마기의 역류로 칠공에서 피를 쏟아내며 쓰러진 마인.
윌리엄은 바스라져버린 칼날 조각을 털어내곤 파르스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것만으로도, 전장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죽어라!”
겁에 질린 목소리. 날아오는 벽력탄.
윌리엄은 날아오는 벽력탄을 잡아채고 양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겹쳐진 양손 사이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이건 그래도 꽤 따가운데.”
“괴…괴물…”
벽력탄의 폭발을 두손만으로 억제제한 윌리엄이 손을 털자 벽력탄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마인들이 그의 걸음에 맞춰 뒤로 물러났다.
앞길을 막는 순간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눈치챘으니.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본 윌리엄은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니들 살던 곳으로 돌아가던가, 아니면 여기서 다 죽던가. 하나만 선택해라.”
일일이 처리하기 귀찮으니 알아서 꺼져라.
그런 의미를 담은 말에 마인들은 전자를 선택했다.
아무리 마인이라도 목숨은 소중하니까.
화경의 고수가 나타난 이상 같은 화경의 고수가 아니면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임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으니.
윌리엄은 계속해서 존재감을 흩뿌리며 마인들을 밀어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죽일 수 있지만, 일부러 살길을 열어서 몰아내는 것이 이득이었으니까.
그렇다고 그에게 달려드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게 교주가 내상까지 입어가며 겨우 도달한 경지인가!”
“흠.”
‘이 녀석 맛이 갔군.’
전투에 미친 악귀 그 자체.
윌리엄은 얆은 만두피 두께의 오러로 감싼 손등으로 검강을 튕겨냈다.
마교의 집법사자를 맡고 있는 고수, 탈명귀는 자신의 검이 맥없이 튕겨 나가자 감탄하며 잠력을 폭발시켰다.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을 텐데.”
“나는! 오늘만! 산다!”
선천진기까지 모조리 끌어와 검강을 만든 탈명귀가 다시 한번 윌리엄에게 달려들었다.
필사의 검무.
하지만 윌리엄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의 검강을 손으로 쥐어 부서트릴 뿐.
얼마 되지 않아 탈명귀는 피를 뿜으며 바닥에 몸을 뉘였다.
“마인들은 자살하는 게 유행인가.”
아무리 전쟁터라도 살길이 있다면 그쪽으로 향하는 것이 인간일진대.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본 마인들의 후퇴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초절정고수가 생명까지 갈아 만들어낸 일격을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이 막아내는 모습을 보고 전의가 생길 리가 없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전선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말 즉 슨, 청해성을 지키던 사람들에게 여유가 생겼다는 말과도 같으니, 정파의 무인들과 병사들의 사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적들을 추격하라!”
“무너진 성벽에 기름을 뿌려라!”
“부상자를 후송하도록!”
한층 여유로워진 전선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빠르게 재정비하고, 누군가는 적을 추격하고, 누군가는 환자를 후송시키는 모습.
혼란이 줄어든 청해성을 둘러본 윌리엄은 익숙한 시선이 닿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네…대공을 이루었구만.”
“맹주님 덕분입니다.”
윌리엄은 지친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맹주의 상태를 살폈다.
벽력탄의 존재 때문에 약한 마인들에게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탓에 더 지친 맹주의 모습.
“맹주님은 쉬시지요. 저는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할 일이라니?”
“전부 끝내야죠.”
“가능하겠나?”
“예.”
“잘 다녀오게나.”
윌리엄은 맹주의 배웅을 받으며 부서진 성문으로 다가갔다.
마인들이 진형을 갖추고 물러나고 있는 장소로.
윌리엄이 앞으로 나서자 홍해의 기적처럼 인파가 갈라졌다.
본래라면 진형을 무너트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초절정조차 넘어선, 반박귀진의 경지.
화경의 고수가 길을 가고자 하는데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젠장…”
“빨리 후퇴해라!”
마인들의 철수가 점점 더 빨라졌다.
윌리엄이 다가오면 끝장이라는 것을 모두가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왜 이리 후퇴가 더딘겐가!”
“그놈들이 뒤를 막고 있소!”
“뭐라고? 그게 무슨…”
생각보다 지지부진한 진행 속도에 조바심을 낸 마인들이 의문을 표할 때쯤, 성벽 바깥에서 모든 것을 베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예기가 전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끝내기 싫다 이거로군?”
윌리엄은 씨익 웃으며 자신도 몸에서 기운을 뿜어냈다.
아군에게는 안심을, 적에게는 압박감을 선하는 철벽같은 기세를.
성문을 사이에 두고, 두 절대고수가 기운만으로도 기선제압을 시도하니, 중간에 낀 마인들만 고통받기 시작했다.
맘루크나 정파의 무인들이야 한쪽의 기운만 받으니 괜찮다지만, 마인은 양쪽에서 몰려오는 무시무시한 압박감에 내상을 입어 쓰러진 자가 속출하기 시작했으니까.
의도치 않게 무력화된 마인들을 슬쩍 쳐다본 윌리엄이 쓰러진 마인들을 옆으로 걷어내고 앞으로 나아갔다.
마인들은 그의 앞길을 막을 방법도, 이유도 없었기에 그저 길을 터줄 뿐.
윌리엄은 마인들로 이루어진 벽을 지나 마침내 다시 한번 숙적과 조우했다.
“이제야 눈높이가 맞겠군. 자네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가?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글쎄.”
윌리엄은 어깨를 으쓱이곤, 말에 탄 채로 그를 내려다보는 파르스와 시선을 교환했다.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다니, 안타깝군.”
“신의 목소리가 들리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모든 것은 결국 나로부터 나올진대.”
“허.”
파르스는 안장에 끼워둔 검을 검집째로 뽑아내 윌리엄에게 던졌다.
윌리엄은 검을 받아들고는, 감탄하며 말했다.
“거참 고상한 취미를 가지셨군?”
“중요한 전투에 훌륭한 무기는 빠질 수 없는 법이지 않나.”
“그건 그렇지.”
윌리엄은 자신의 검을 버리고 스승의 검을 뽑아 들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잘 관리된 롱소드.
한철도, 다마스커스강도 아니지만 잘 정련된 검은 강철 특유의 빛깔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슬슬 끝을 내자.”
“흠.”
“코인 꺼내지 말고. 네 의지로 선택해라. 우리 둘의 싸움에 신이 개입할 여지는 더 이상 없으니.”
그의 말에 파르스는 피식 웃으며 그가 애지중지하던 동전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안타깝게도 장갑은 없군.”
“굳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우리가 대면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걸세.”
“그런가.”
윌리엄은 검집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는, 익숙한 자세를 취했다.
옥스(OX).
파르스도 말에서 내려 수하들을 물리고는 검을 뽑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숨 막힐듯한 대치.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모두가 멈춰선 그 순간.
‘단장님.’
윌리엄이 소리쳤다.
“나는 사자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윌리엄 마셜! 이곳에서는 사자검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소!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하겠소!”
“나는 모든 노예병들의 군주이자 전쟁의 망령인 알-나시르 파르스 루크누딘 알-나시리! 그대의 결투신청을 받아들이겠다!”
결투에 앞서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하는 선언.
“이 결투의 끝은 오로지 죽음뿐이니!”
“모든 것을 걸고 싸우리라!”
둘의 선언과 함께, 결투가 시작되었다.
???:나밖에 없으니 내가 기사단장이고 부단장이고 참모고 보급관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