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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8

       “……그러니까.”

        

       그 이후로 이어진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앨리스는 손가락으로 자기 미간을 꾹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황가의 피를 여기저기에 퍼뜨리고 다니고 있었고, 그중에서 싹이 보이는 존재를 데려다가 다시 자기 아들 딸 삼아서 길렀다는 소리잖아?”

        

       “황제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와 클레어를 착각해서 사실 클레어를 데려와야 할 상황에서 너를 데려다 놓았다는 소리고.”

        

       “그렇습니다.”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앨리스는 눈을 꾹 감은 채 말했다.

        

       “만약 그렇게 열심히 관리하는 ‘핏줄’들이었다면, 적어도 상대 외모 정도는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까놓고 말해서, 너는 머리카락 색이 검은색이고—”

        

       앨리스는 미간을 꾹꾹 누르던 손가락을 그대로 들어서 클레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쟤는 푸른색이라고. 그리고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황금빛이란 말이야. 상대방 머리카락 색을 알고 있으면 당연히 자기 자식이 검은 머리일지, 푸른 머리일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참고로 앨리스한테 다짜고짜 삿대질을 당한 클레어는 멍한 표정으로 뭐라고 반응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가,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가,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한 채 다시 다물기를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원작을 알고 있던 나도 당황했었으니, 지금까지 그런 의심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을 클레어는 얼마나 충격이 크겠는가.

        

       “어쩌면 격세유전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나름대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머리카락 색이 형형색색으로 다른 이 세계관에서 ‘유전’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도 조금 우스운 이야기다. 내가 살던 현실에서 염색 없이 나올 수 있는 머리카락 색깔 중 독특한 것을 뽑아봐야 은발에 가까운 백발이나 붉은 머리카락 정도였으니까. ‘파란색’이니 ‘보라색’이니 하는 머리카락 색이 대체 어떻게 유전되는지 알 리가 없다.

        

       “아니면 상대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저 모체가 될만한 존재를 데려다가 씨앗을 뿌리는 데에만 집중했을지 모를 일이죠.”

        

       그리고 난 이쪽에 더 정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식을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하긴 하지만, 그 사랑과는 별개로 자식을 도구처럼 생각하기도 하는 인간이다. 사랑 없이 기계적으로 씨를 뿌리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황제의 사생아가 ‘아주 많고’, 황제의 아이가 될 수 있었던 존재는 ‘극히 일부’라면.

        

       그리고 황제가 ‘능력 있는 아이’를 보고 자기가 낳은 아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자신감 넘치는 이라면.

        

       “…….”

        

       앨리스는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앨리스가 생각하기에도, ‘왠지 황제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를 황실까지 데리고 온 자는 루카스입니다. 다른 자식들은 몰라도, 적어도 저와 클레어 중 제가 황제의 아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황제 자신의 판단보다는 루카스의 판단이 더 많이 들어갔다고 할 수 있겠죠.”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황제는 루카스를 믿었을 것이다.

        

       믿은 만큼 다 알려주지는 않았을 테지만. 황제의 아이들에게 진짜로 황제의 피가 섞여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해줬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눈덩이가 되어 굴러가, 지금 여기까지 커지고 커진 것이다.

        

       “모체를 어떤 식으로 선정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황실의 역사를 쭉 따라 올라가면 상상하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권력 투쟁에서 져서 하급 귀족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 이들은 수도 없이 있으니까요.”

        

       클레어의 어머니가 어떤 존재인지 알 방법을 내가 태워버리긴 했지만, 그 정도 상상은 해볼 수 있다.

        

       황실의 피가 흐른다고 모든 이가 황실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귀족 중에서 영지와 작위가 없는, 그냥 이름뿐인 귀족이 있듯이 황실에도 그런 인간은 있다. 더 나아가서 ‘팬그리폰’이라는 이름조차 닿지 않을 만큼 몰락한 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이들의 피가 진짜 황실의 피만큼 진한가 묻는다면 아니겠지만.

        

       “……어머니는 정적에게 암살당하셨지.”

        

       내 이야기를 듣던 앨리스가 문득 중얼거렸다.

        

       “내가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 시절의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사실은 어머니가 아니라 나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나왔었다고 해. 팬그리폰의 이름은 지금 역사상 가장 높은 곳에 있지만, 당시에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건했던 것도 아니야. 절대 권력이니 절대황정이니 하는 말이 나돌아도, 결국 제국의 대부분은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으니까.”

        

       턱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고민하던 앨리스가 시선을 들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때 가장 먼저 쓸려나갔던 존재들이 ‘다른 황족’이었어. 특히 나 이외에 계승권을 가졌던 황족 중 많은 이들이 처형당하고, 몰락했지.”

        

       그리고 황제의 권력 또한 그만큼 공고해졌다.

        

       “처음에는 그게…… 아버지가 어머니를 암살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 그렇게 구실을 만들고, 엮인 모든 권력자를 쳐내서 황실의 권력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했는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황제가 황후를 죽일 생각은 없었고, 실제로는 그저 평범한 부부였다고 한다면.

        

       그러다가 권력 투쟁 와중에 아내를 잃고— 자기 후사가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면.

        

       후사가 딸 하나라면 불안하다. 어린아이가 죽는 이유는 다양하니까. 굳이 총이나 칼에 맞거나 독을 마시지 않아도, 이 시기의 의료기술로 고치지 못할 병은 많다. 마법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고.

        

       그렇다면 황제에게 후사를 이을 측실을 붙여주려는 이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게 황실의 피가 옅게 흐르는 귀족 가문이건, 아니면 머나먼 방계혈족이건.

        

       그 후사가 ‘아들’이라면 이 나라를 물려받을 정통성이 생길 테니까.

        

       그런 이유로 황후가 사망한 것이었다면.

        

       ‘명분’으로 제일 먼저 쓸려나간 것은 방계 황족.

        

       그리고 유력한 귀족가 중 ‘귀족파’.

        

       심지어 그 권력 투쟁은 내가 어렸던 시절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황제에게 백작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행했었다. 그게 크로우필드 백작이었지.

        

       “……다른 누구도 믿지 않았던 아버지가, 오로지 자신만이 믿는, 그리고 자신만을 믿는 ‘팬그리폰’을 만들어내고자 했다면.”

        

       “…….”

        

       전부 가정일 뿐이다.

        

       실제로는 그냥 여자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는 난봉꾼이고, 마음껏 즐긴 후에 내팽개쳤다가 후에 아이만 골라다 데리고 오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역작일 수도 있다.

        

       아니면 실제로 황후를 암살한 게 황제의 계획이고, 그 계획을 바탕으로 ‘솎아내기’를 할 명분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매우 황제다웠다.

        

       진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서는 황제와 직접 마주할 필요가 있겠지.

        

       “그래서, 이건…….”

        

       앨리스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추측을 멈추고 다시 지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렇습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 지보는 분명하게 ‘팬그리폰’에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니라 클레어에게 반응하고 있으니 틀림없습니다.”

        

       ‘지보’라는 이름치고는 참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 여신의 지보라고 하면 법국의 인간에게 더 제대로 반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실 이 지보의 반응 말고도 원작의 설정과 이야기도 내 판단 근거였지만, 시간을 돌리는 능력만으로도 이야기는 충분히 복잡했다. 여기서 이 세상이 사실은 픽션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 비디오 게임부터 설명해야 할 테니까.

        

       “그럼,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

        

       나는 그런 클레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클레어.”

        

       “어, 어어?”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습니까?”

        

       “어떤 존재라니……?”

        

       “황제의 피가 흐르는 팬그리폰일지, 아니면 어린 시절부터 당신이 몸을 의탁한 그레이스일지. 선택권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원작의 클레어에게는 그런 선택권 따위 없었다.

        

       그저 휩쓸리는 대로 팔려 가서 끔찍한 과거를 겪고, 다시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인이 바뀌고—

        

       그녀가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선택은, 그저 자신이 자매라고 생각한 이를 위해 마지막 순간에 목숨을 바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클레어는 다르다.

        

       클레어 팬그리폰인가.

        

       클레어 그레이스인가.

        

       그녀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지금 클레어에게는 주인이라는 존재가 없었으니까.

        

       “나는…….”

        

       클레어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에 힘이 꽉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대로 나이고 싶어.”

        

       그렇다면 그걸로 된 거다.

        

       어차피 여기서 클레어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걸 막으려고 내가 여기 있는 거고.

        

       “잘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지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에어프라이 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주일 전에 그 일로 많은 분들께서 제 건강에 대해 염려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때 그 상황도 목숨에 지장이 갈 수준은 아니었고, 며칠 입원하는 것으로 깨끗이 나았으니까요. 난치병이라고는 하지만 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 꾸준히 약을 먹는 것으로 어느정도 제어가 가능합니다. 제가 하루에 두 편씩 써서 올린다면 그 날은 그렇게 올려도 별 문제가 없을만큼 컨디션이 괜찮다는 의미이니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건강관리는 해야겠죠. 아주 가끔이라고는 하지만 또 이런 식으로 휴재를 하게 되는 일은 저도 원하지 않으니까요. 사실 여러분께서 읽어주시는 것 만으로도 굉장히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기분 좋게 읽어주시는 분들께 돈이 어떻냐느니 말씀을 드리는 것은 조금 실례인 이야기지만… 노벨피아에서 정산하는 정산금만으로도 병원비나 약값은 충분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읽으실만한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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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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