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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

       ……왜 이렇게까지 싸우게 됐더라?

         

       뜬금 만나자마자 그냥 이유 없이 그냥 죽자고 싸우게 된 느낌이다.

       단순히 기세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다가 벌어진 사태였고, 또 어찌 보면 사나이의 자존심 때문에 벌어진 사고에 가까운?

         

       그러니 결국.

         

       ‘다 저 자식 때문이야.’

         

       이한은 놈을 향해 눈을 사납게 부라렸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흑의를 벗은 놈의 얼굴은 어딘지 귀공자가 떠오르는 외모였다.

       뺨 한쪽에 새겨진 흉터가 거친 인생을 살았단 걸 알려주며 어딘지 여성들이 여러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그러며 여성 쪽에서 먼저 다가갈 것 같은 얼굴.

         

       …저러니 더 마음에 안 든다.

         

       이한은 으르렁거렸고, 상대는 더 으르렁거렸다.

       개도 아니고 왜 이러나 싶지만, 이미 서로를 싫어하게 됐기에 지지 않으려 눈을 부라리는 건 당연한 원리인 거다.

         

       이한과 라크는 다시금 서로를 노려보며 투지를 높였고, 언제라도 손을 뻗을 자세를 취했다.

       이번에는 주먹다짐 정도가 아니라 날붙이를 들고 본격적으로 갈 다짐을 다질 때….

         

       [그만, 대체 얼마나 말해야 하는 거지.]

         

       “…….”

       “…죄송합니다.”

         

       [후우, 이래서 기사들이란.]

         

       압도적인 권력자의 일갈은 그들의 투지를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블레이크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이제야 인사를 받아보는군. 백은사자의 고개가 이토록 뻣뻣해졌을 줄 몰랐다.]

         

       “칭찬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정하지, 네놈만 뻣뻣한 것 같군.]

         

       “저요? 고개 유연한데….”

         

       […….]

         

       “이 천민 놈! 감히, 전하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착하게 말했구먼, 뭘.”

       “이노오오옴!”

         

       다시금 싸움이 벌어질 분위기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흑의인들이 먼저 라크를 붙잡으며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옴쌀달작 못 하는 라크를 향해 이한은 피식 비웃었고, 라크는 이를 갈았다.

         

       […머리가 아프군.]

         

       공작은 미간을 짚었다.

         

       * * *

         

       어느 사내가 거울 속에 있었다.

       누군가를 비추는 용도가 아닌, 멀리 떨어진 타인의 얼굴을 비춰주는 신비의 거울.

       마법사들 중 극히 소수만이 만들 수 있다는, 기적적인 확률로 탄생하다는 신비의 보물.

         

       아티팩트.

         

       아마 저것은 아티팩트이리라.

       가격만 따지면 성 하나와 맞먹는다는.

         

       저러한 아티팩트를 소유 가능한 재력과 권력이 있는 자는 왕국에서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이한은 그 얼마 되지 않는 극소수의 재력가이자 권력자를 눈앞에서 마주하는 중이었다.

         

       …근데 분명 60대라고 하지 않았던가?

       뭔데 저거?

         

       ‘나보다 어리다고 해도 믿겠는데?’

         

       이한은 다른 의미로 공포를 느끼며 상대를 보았고, 이러한 공포심을 모르며 상대가 서서히 입을 떼었다.

         

       [일단, 대화에 앞서 사죄하지. 그대의 평온함을 방해한 것은 우리가 먼저였으니.]

         

       “저, 전하…! 어찌 그런 황송한 말씀을 천민에게 하십니까!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해야겠지.]

         

       팬드래건 왕국 권력의 정점 중 하나.

       이름뿐인 공작 작위를 가진 게 아닌, 공왕의 칭호를 당당히 선언해도 부족하지 않을 위세를 가진 당대 갈라하드의 주인.

       그런 이가 기꺼이 천민 출신 기사에게 ‘미안함’을 보이는 건 안 될 말이었다.

         

       상식 이전에, 권위와 신분의 문제.

       왕족의 고귀함은 언제나 고고하고도 절대적이어야 하는 법이었음이다.

         

       그러나

         

       [됐다. 미안함을 표현하는 것이 어찌 흠이라 할 수 있을까.]

         

       블레이크 공작은 이 정도 발언은 별것도 아니란 듯 손을 내저었고, 오히려 그들을 나무랐다.

       창피한 짓 좀 그만하라고.

       허나 이를 보며.

         

       “전하, 어찌 이리도 관대하신지…!”

       “크흐으윽! 역시 전하십니다.”

       “그렇지요, 권위란 것은 전하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워지는 것이지요, 위대하신 분…!”

         

       […하아.]

         

       과도하게, 아니 무슨 신흥종교를 숭배하는 집단 같은 그들이었고. 공작의 한숨이 길어졌다.

       충성심이 과한 것도 그다지 좋을 일은 아니란 것처럼.

         

       …이를 보며 이한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그 살인귀 정신병자]라고? …아닌데, 되게 정상적인데?’

         

       뭐, 말투에서 대놓고 사람을 깔보는 어투가 묻어나긴 하지만. 그건 명문 귀족들의 패시브 같은 거다.

       그러니 거슬려 할 건 없다.

       허나 저토록 ‘상식적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딘지 위화감이 든다.

       저건 뭐 광증 도진 환자가 아니라, 그냥 무난한 귀족 정도가 아닌가?

         

       이한의 감각에는 저자가 정녕 그 블레이크 공작이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의심할 거 없다. 본인은 그대가 아는 ‘그’ 블레이크 공작이 맞으니.]

         

       “저, 저는 아무런 발언도 안 했습니다만.”

         

       찔끔하고 변명 아닌 변명을 내뱉었지만, 평생 정치만 한 인간의 눈을 어찌 피할까.

       그가 비웃었다.

         

       [불경한 눈빛을 숨길 수는 없는 법.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터이니, 아마 알 테지. 내가 광증을 앓는 정신-병자(病者)란 것을.]

         

       “으음….”

         

       이걸 대놓고 말한다고?

         

       이한은 지금에서 완전히 확신했다.

       블레이크 공작은 정신병자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도리어 저자는 생각보다 상식적인 [공작 전하]에 불과했고, 어딘지 대인배의 면모도 드러난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진 만남만 아니었다면 이한은 보다 상대를 존중했으리라.

       그 정도로 제법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아, 이게 그건가?’

         

       로판에서 전형적으로 나오는 클리셰.

       괴물 소리 듣던 공작 or 대공과 황제 등은 여주만 찾았다 하면 급 정상인이 된다, -는.

         

       ‘뭐, 그런 건가?’

         

       이한은 일순 그런 생각을 할 때.

         

       [또 다시 불경한 생각을 하는가?]

         

       “…아닙니다. 그냥 역시 소문을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대놓고 말하는 그대를 보자니 공작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는 생각이 드는군.]

         

       “관대하게 봐주십시오. 전하.”

         

       […이렇게 보면 또 간신배 같은지고.]

         

       허리를 푹 숙이는 이한이었고, 블레이크 공작 또한 더는 화내지 않았다.

       아니, 화낼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하긴, 저 양반 입장에서 자신의 목숨 따위 초개와 같을 터이니.

         

       ‘오히려 좋지.’

         

       위에서 내려만 보는 인간을 상대하는 건 의외로 쉽다.

       제 손은 더럽히지 않으려는 자이니까.

       즉, 관심만 줄어들면 얼마든지 시야에서 벗어나는 건 어렵지 않-.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난 그대를 만만하게 보지 않는다, 백은사자의 잠룡이여.]

         

       “…….”

         

       [내 소중한 수양녀를 가르치는 이들 중 좌천된 기사가 있다기에 조사해보았지. 처음엔 그대에 관한 정보가 너무 적었으나, 왕실에 심어놓은 이들을 통해 대충 알게 되었지. 그대가 어떤 자인지.]

         

       “그런 걸 대놓고 말해도 됩니까?”

         

       왕실의 간자(間者)를 심어놨다는 걸 이토록 쉽게 밝혀도 되는 사안일까?

       그가 어처구니없어 하건 말건 블레이크 공작은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말할 사안이 심어놓은 간자보다 더욱 중하다는 듯이.

         

       아니나 다를까.

         

       [브리튼과의 전쟁 중 유난히 험악했고, 팬드래건이 결정적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백일(百日) 공방전’에서 병사들 전원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상황이 있었다지? 한데 그러한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무려 1,257명이 넘는 병사를 살린 이름 없는 병사가 있었다더군.]

         

       “…….”

         

       [또한 아이시스 그 아이를 죽이기 위해 브리튼의 암살부대가 움직였을 때 그 아이를 지켜준 병사가 있었다고 하던데, 무수한 병사들을 살린 영웅과 그 아이를 구해준 은인이 동일인물이란 얘기를 들었다.]

         

       “…….”

         

       [거기가 그 병사는 ‘그’ 발타르 경의 눈에 들어 수련기사도 거치지 않고 바로 정식기사가 되었다더군. 게다가 제자가 없기로 유명한 발타르 경에게 유일하게 지도를 받는다는 얘기도 있었지.]

         

       “누가 그 양반한테 지도를 받았습니까! 맨날 두들겨 맞기 바쁜데!”

         

       이 부분에선 도저히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도(指導)?!

       웃기지 마라.

       그 양반한테 배운 거라곤 더 아프게 맞는 법이라든지, 맷집을 어떻게 늘리는지 밖에 없다.

         

       이한은 자기를 억지로 기사단에 박아놓은 원한을 잊지 않고 이를 갈았으나, 공작의 반응은 여상했다.

         

       [흠, 왜 그리 과민반응 하지? 난 ‘어느 이름 모를 병사’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인데.]

         

       “…장난은 그만치시죠.”

         

       [아니, 아직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남았다. 거기다 이름 모를 병사는 기사가 된 이후 ‘거물급 노예상단’ 15개와 악명 높은 ‘위법(違法) 마법사’ 29명을 없애버렸다고 하지. 왕실의 병력이 움직여도 가능할지 모를 일들을 홀로 해내다니, 참으로 대단한 자가 아닐 수 없지.]

         

       “…그걸 그 이름 모를 병사가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헛소문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은데.”

         

       [헛소문이 아니다. 노예상단에 구원 받은 이들을 찾아내고, 위법 마법사에게 실험체로 고문 받던 이들을 통해 알아낸 정보이니.]

         

       “…….”

         

       [권력과 돈, 그리고 유능한 인재들이 있다면 정보의 사실여부 정도는 얼마든지 확인 가능한 것이지, 기억해라, ─저가 영웅임을 숨기고 사는 기사여.]

         

       “…우라질.”

         

       부처님 손바닥 위 원숭이.

         

       뇌리에서 문득 떠오르는 자신의 처지였고, 이한은 기어이 고개를 숙였다.

         

       …역시, 권력자는 싫다.

         

       * * *

         

       공작은, 갈라하드의 병력 전원은 물러갔다.

         

       이유는 모른다.

       분명 더 대화할 거리가 있었음이 분명했지만, 블레이크 공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곤 그대로 유유히 병력을 물렸다.

       마치 그와 대화한 것만으로도 대충 가늠이 끝났다는 것처럼.

       본인이 궁금한 건 다 풀렸다는 듯.

         

       ……그는 아직도 궁금한 것이 넘치는데.

         

       뭐, 그 양반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란 의미겠지.

         

       ‘참.’

         

       ─기분 더럽다.

         

       분명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압도적인 강자가 돌아간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할 상황이 분명한데 전혀 기쁘지가 않다.

       도리어 누군가의 손에 생명줄이 왔다 갔다 했다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불쾌하면 불쾌했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자신은 아직도.

         

       “약하네, 더럽게 약해.”

         

       전생보다 나아졌다 여겼거늘.

       여전히 휘둘리는 삶일 뿐이다.

         

       휘청.

         

       이한은 몸을 휘청거렸다.

       애써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의 몸도 정상이 아닌 것이다.

       더럽게 아프고, 추잡하도록 낫지 않는 부상이었다.

         

       그 새끼 주먹 한 번 더럽다.

         

       상대방에겐 최고의 찬사요, 당한 이로선 최악이다.

       그러나 아픈 것보다 더욱 그를 아릿하게 만드는 건.

         

       “…병 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이한은 제 손에 쥐어진 약병을 봤다.

         

       포션이다.

       그것도 연금술사들이 흔히 만드는 저급 포션이 아니라 트롤의 생혈로 만들어진 최상위 포션.

       무려 순도 50%짜리라고 했었나.

         

       “…….”

         

       평소였다면 기분 좋게 받았을 테지만. 이한은 도저히 미간이 풀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농락당하는 기분.

       자신을 낱낱이 파악한 이가 있다는 사실이 불쾌할 따름이니까.

         

       ……그래도.

         

       꿀꺽꿀꺽!

         

       이한은 불쾌감을 언제까지고 안고 갈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포션을 들이켰다.

       그러며 다짐했다.

         

       ‘난 아직 지지 않았다.’

         

       강한 놈이 이기는 게 아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놈이, ‘행복’한 놈이 이기는 거다.

         

       이한은 다시금 다짐했다.

         

       행복해지리라고.

         

       

       ……반드시.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환생 30년, 알고 보니 장르가 로판이었다?
Status: Ongoing Author: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the genre was romance fantasy? ...Really, how? I lived as a magician's slave, experimented on, then as an assassin, mercenary, soldier, and even a knight. This is a story where I'm in a genre all by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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