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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

청성 길드의 본사를 비롯한 삼대 길드 빌딩은 작금의 한국에 있어 랜드마크나 다름없었다.
     
   뾰족하게 솟아 올라가며 태양 빛을 반사하는 독특한 구조에 소녀가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경복궁? 소녀의 마음속에선 이미 잊힌 채였다.
     
   600년 전의 역사적인 건물? 범부일 뿐이다.
     
     
   “이, 이게 다 길드장님 거예요…?”
     
   빌딩 바로 옆에 펼쳐진 분수를 비롯한 간이 풀장과 정원.
     
   각 잡혀 줄지어 서 있는 수많은 종류의 상가들.
     
   그 모습이 마치 본사를 향해 절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오죽하면 악마에만 신경 쓰던 소녀가 퍼뜩 정신 차리고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뺀 채 열심히도 주변을 둘러본다.
     
   “그래. 참고로 저 상가 역시 내 명의다.”
     
   딱히 자랑하는 건 아니었다.
     
   길드장은 그저 사실에 입각한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평소 다른 이들에게도 이와 같은 대답을 했는데….
     
   “와! 역시 신님께 선택받으실 만하네요!”
     
   그런 소녀의 외침에 어깨가 으쓱하는 건 왜일까.
     
     
   길드장은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소녀를 업은 채 길드 투어라도 시켜주고 싶었지만.
     
   “기, 길드장님?!”
     
   당장은 소녀의 상태도 상태거니와 그와 마주친 길드원들이 죄다 기절할 것만 같은 반응을 보여서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왜 이 귀여운 아이를 보고 그렇게 놀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연락도 없는 갑작스러운 방문 때문일 테니.
     
   아쉬워할 소녀에게는 미안하지만, 곧바로 본사에 마련된 가상현실 방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공용 가상현실 방은 사람이 많을 테니 위층을 쓰면 되겠지.
     
   금세 광활한 풍경이 사라지고 빌딩 특유의 냄새와 우윳빛 바닥,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삑- 사원증을 대고 들어가며 길드장은 실망했을 소녀를 위로하고자 어색하게 위로했다.
     
   “나중에 또 놀러 오면 안내해 주마.“
     
   여름에 쓰고자 만들어둔 풀장을 열심히도 바라보던데.
     
   역시 풀장까지만 보여주고 올 걸 그랬나.
     
   “헤헤… 또 놀러 와도 되나요…?”
     
     
   그런 길드장의 각오가 무색하게도 소녀는 행복했다.
     
   소녀의 기억 속에서 이렇게 외출한 적은 처음이었고.
     
   심지어 맛있는 음식에 선물까지 받지 않았던가.
     
   오늘 한 번으로 끝났어도 평생을 기억할 일이건만, 또 놀러 오면 오늘처럼 안내해 준다고 한다.
     
   그저 기뻤다.
     
   오늘 같은 행복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다는 것이기에.
     
   제가 이런 행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현실의 악마를 보여주겠다던, 인터넷과 악마는 별개의 존재라던 이야기가 더욱 궁금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악마가 아니라니.
     
   이번만큼은 아무리 천사 같은 길드장님이라고 해도 그러려니 믿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과연 뭘 보여주시려는 걸까?
     
     
   그렇게 막 길드장과 소녀가 한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팀장급 인원들을 위해 만들어 둔 곳이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어…? 길드장님이 여긴 무슨 일이세요?”
   “하? 언니, 또 질 것 같다고 딴청 부리면서 도망치려고?”
     
   왠지 익숙한 두 여인이 거대한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탄탄한 몸매의 붉은 단발머리의 여성.
     
   거대한 가슴이 눈에 띄는 분홍색 장발의 여성.
     
   “아앗!”
     
   소녀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며 두 여인을 삿대질했다.
     
   “그때 그 변태들!!”
     
   두 달 전 막 새 몸에 적응하며 노숙하던 때, 보란 듯 소녀의 앞에서 텐트를 펴고 자던 수상쩍기 그지없던 자매임이 틀림없었다!
     
   응! 먹을 거로 꼬시려 하고, 나중에는 무력까지 쓰려고 했었지!
     
   미아의 말에 따르면 저런 인간들을 상종 못 할 변태, 그리고….
     
   “크싸레 맞죠!!”
     
   크레이지 싸이코 레즈비언이라고 했다.
     
   그렇게 외친 소녀가 발발 떨며 길드장의 듬직한 등 뒤로 몸을 숨겼다.
     
   “…….”
   “……….”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외부인을 감지했다는 알림에 가상현실 기기에서 빠져나오던 자매가 다급히 시선을 돌려 소녀를 바라본다.
     
   저 파란 머리!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외모에 금세 북한산에서 만나고 놓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물론 아이가 너무 귀엽고 예뻐서 볼이라도 한번 만져보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크싸레라니?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워 온 거지?
     
   이대로 가다간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당할지도 몰라!
     
   자매는 길드장의 싸늘한 시선이 돌아오기 무섭게 변명했다.
     
   “그런 적 없어요!!”
   “애, 애당초 우린 자매라고!!”
     
     
   다행히 길드장은 자매를 크게 의심하진 않았다.
     
   워낙 상식이 부족한 소녀다 보니 뭔가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컸으니 일단 얘기부터 들어볼 생각이었다.
     
   어쨌든 만난 적은 있다는 건가.
     
   그래서 대체 언제 어떤 상황에 만났기에 이러는 거지?
     
   길드장이 막 되물어 보려던 도중이었다.
     
   “그 자매 덮밥? 근친 순애라는 게 있다고 했어요….”
     
   빼꼼- 길드장의 허리 너머로 고개를 내민 소녀가 말했다.
     
   이게 과연 저 조그마한 아이의 입에서 나온 얘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이야기.
     
   “…따라 나와. 잠깐 얘기 좀 하지.”
     
   결국 자매는 길드장과의 면담을 피할 수 없었다.
     
     
     
   *
     
     
     
   자매는 청성 길드의 팀장급 실력자들이었다.
     
   동생 한유연.
     
   길드장과 같은 몇 안 되는 S급 각성자이자 타격팀의 부팀장이다.
     
   언니 한다연.
     
   A급 각성자로 동생과 한 팀을 이룬 타격팀의 팀장이다.
     
   저 둘이 아무리 막 나가는 성격이라 해도 레즈니 싸이코니 하는 건 좀… 자비로운 길드장이 생각하기에도 선이 넘은 일이었다.
     
   “지, 진짜 아니에요. 저 꼬마를 전에 만나긴 했는데 상황이 되게 이상했거든요. 애 혼자서 산속에서 이불을 펴고 자고 있어서 미아인 줄 알고 도와주려 했던 거예요.”
     
   왠지 모르게 ‘이런 귀여운 아이라면 레즈도 괜찮을지도…’라고 중얼거리는 한다연 대신, 한유연이 다급히 변명했다.
     
     
   그렇다는 건 소녀가 자명 스님께 주워지기 전에 만났다는 거겠지.
     
   어쩌다 크싸레니 뭐니 하는 오해를 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면이 있다는 건 오히려 긍정적인 일이었다.
     
   “정말 손을 댄 적은 없겠지?”
     
   길드장의 확인에 자매가 미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요! 달리는 속도가 저보다 빨랐어요. 애당초 저 아이도 각성자라서 저희 때처럼 스카우트하려고 데려오신 거 아니에요?”
     
   S급 신체 강화 능력자인 그녀보다 빨랐다고?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이미 한 번 소녀의 저력을 본 적 있던 길드장은 그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역시 소녀는 두 개 이상의 능력을 가진 이레귤러였나.
     
   교단 놈들에게 세뇌당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만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최연소 S급 각성자로 인정받았을 터였다.
     
   소녀를 향한 측은함이 한층 강해졌다.
     
   어떻게든 돕고 싶지만, 이 문제를 도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 건지.
     
   길드장이 고민에 빠지자 조급해지는 건 자매였다.
     
     
   어어 우리 설마 진짜 쫓겨나는 건 아니겠지?
     
   쫓겨나는 거에 더해 아청법 이런 거로 빌런으로 지정되진 않겠지??
     
   침묵이 길어지자, 한유연은 더 참지 못하고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여, 역시 어디 재벌 아이라도 되는 거죠? 어쩐지 곱고 예쁜데 능력도 좋다 했어요! 청성 길드의 유망주!”
     
   소녀와 나름 친근해 보이던 길드장의 모습에 나름대로 아부를 시도한 것이었다.
     
   정작 소녀의 과거를 들어 알고 있던 길드장에겐 그리 좋지 않게 들려왔으니.
     
   ‘이 작은 애를 산속에 놔두고 왔으면서 잘도 해맑군.’
     
   자매가 소녀와 마주쳤다는 건, 소녀가 보다 일찍이 구축될 기회가 있었단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 스님과 함께 살 게 아니라 길드에서 살 수 있단 뜻.
     
   물론 그때는 그 역시도 소녀의 존재를 몰랐고, 이런 가정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굳이 쓴소리하진 않았다.
     
   대신 괘씸한 자매는 앞으로 소녀를 도우며 속죄하게 할 생각이었다.
     
     
   “뭐라 할 생각은 없으니 됐다.”
   “휴우….”
     
   그제야 자매가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아는 법.
     
   “다만 저 어린아이가 의심할 정도로 오해할 행동을 했다는 건 그냥 넘길 수 없겠군.”
   “헉!”
     
   슬금슬금 눈치 살피며 뒷걸음치던 자매가 염동력에 발목을 붙잡혔다.
     
   가히 사기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염동력에는 A급, S급 헌터인 자매조차 시무룩하니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푸욱 땅을 향해 굽혀진 두 개의 자그마한 머리통.
     
   길드장은 그런 두 사람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판결 내렸다.
     
   “그러니 저 아이가 길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도록 해라. 그게 이번 일의 벌이다.”
     
   그러나 그런 길드장조차 눈치채지 못한 게 있다면….
     
     
   “저, 정말이세요?!”
   “그래. 예외는 없다.”
     
   “아싸!!”
   “……?”
     
   자매가 생각 이상으로 귀엽고 예쁜 것에 약하다는 점이었다.
     
   이런 귀여운 아이랑 같이 있을 수 있다니!
     
   시커먼 인간들이랑 게이트나 들락날락하며 피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즐거운 일이 아닌가!
     
   여태 눈치 보건 게 무색하게도 싱글벙글 웃는 얼굴에 길드장은 나지막이 한숨을 삼켰다.
     
   이런 정신 나간 녀석들이 차기 청성을 이끌어 갈 영웅이라니.
     
   아무래도 속이 깊고 똑똑하고 착한 소녀를 빨리 가르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더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길드장은 앞으로 소녀의 교육을 도와줄 자매는 물론, 비번이었던 양조야 강사까지 불러 함께 가상현실 방으로 되돌아갔고.
     
   “이익! 기, 길드장님이 싸가지 없다니! 사탄 들린 쓰레기 주제에!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불타 죽을 주제에!!”
     
   왠지 모르게 스마트폰을 붙잡고 씩씩대는 소녀를 발견했다.
     
   조그마한 두 발을 동동 구르며 손가락이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와… 이게 요즘 MZ구나…. 타자 치는 데 능력을 쓰는구나?”
     
   한다연의 이야기대로 능력을 쓰고 있는 모습.
     
   얼마나 집중 중인지 그들이 들어왔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처음 볼 때는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양조야 강사는 매번 김성영 학생을 일방적으로 발라먹던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귀엽고 착하고, 강하고, 어, 단호하고? 그런 아이였는데?
     
   “기, 길드장님. 역시 인터넷을 제한하는 게 좋겠어요.”
     
   말 한마디 못 하고 수줍어하던 소녀가 금쪽이로 진화한 꼴이 아닌가!
     
   육성 게임으로 따지면 공주가 되어야 할 아이가 ‘현질 하게 5천 원 달라고!’ 외치는 등골브레이커로 자라는 엔딩 꼴이다.
     
   그러나 그런 강사의 조언에도 길드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보다 소녀를 자세히 지켜봐 왔던 만큼 지금 소녀는 본래의 자아와 세뇌당한 자아가 부딪히고 있음을 알고 있고 있었다.
     
   …아니더라도 저 모습은 세뇌당한 탓이어야만 한다.
     
   스마트폰을 부수고, 글쓴이를 잡아 죽이겠다고 날뛰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아직 치료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니.
     
   “어… 길드장님 인터넷에서 욕먹고 계시는 건 신경 안 쓰시는 건가…?”
     
   한유연의 중얼거림을 뒤로한 채, 길드장은 소녀를 이끌고 가상현실 접속 장치로 향했다.
     
   “이걸로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는 악마를 만날 수 있다. 실제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구현해 낸 거지.”
     
   굳이 긴 설명은 하지 않았다.
     
   소녀의 직접적인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소녀의 두 자아.
     
   언제까지 길드장이나 자명 스님처럼 소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함께 있어 줄 수는 없으니.
     
   그 모호한 경계선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언제고 문제가 일어날 터였다.
     
   빌런으로 몰려 죽든, 빌런들의 목표가 되어 죽든.
     
   교단 놈들에게 들키든 말이다.
     
   어느 쪽이건 좋지 않은 결말뿐.
     
   “…제 맘대로 해도 되는 건가요?”
     
   소녀의 물음에 길드장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지켜보고 있겠지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이 모든 과정은 그걸 확인하기 위한 일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엥다음화 보기

청성 길드의 본사를 비롯한 삼대 길드 빌딩은 작금의 한국에 있어 랜드마크나 다름없었다.

뾰족하게 솟아 올라가며 태양 빛을 반사하는 독특한 구조에 소녀가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경복궁? 소녀의 마음속에선 이미 잊힌 채였다.

600년 전의 역사적인 건물? 범부일 뿐이다.

“이, 이게 다 길드장님 거예요…?”

빌딩 바로 옆에 펼쳐진 분수를 비롯한 간이 풀장과 정원.

각 잡혀 줄지어 서 있는 수많은 종류의 상가들.

그 모습이 마치 본사를 향해 절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오죽하면 악마에만 신경 쓰던 소녀가 퍼뜩 정신 차리고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뺀 채 열심히도 주변을 둘러본다.

“그래. 참고로 저 상가 역시 내 명의다.”

딱히 자랑하는 건 아니었다.

길드장은 그저 사실에 입각한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평소 다른 이들에게도 이와 같은 대답을 했는데….

“와! 역시 신님께 선택받으실 만하네요!”

그런 소녀의 외침에 어깨가 으쓱하는 건 왜일까.

길드장은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소녀를 업은 채 길드 투어라도 시켜주고 싶었지만.

“기, 길드장님?!”

당장은 소녀의 상태도 상태거니와 그와 마주친 길드원들이 죄다 기절할 것만 같은 반응을 보여서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왜 이 귀여운 아이를 보고 그렇게 놀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연락도 없는 갑작스러운 방문 때문일 테니.

아쉬워할 소녀에게는 미안하지만, 곧바로 본사에 마련된 가상현실 방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공용 가상현실 방은 사람이 많을 테니 위층을 쓰면 되겠지.

금세 광활한 풍경이 사라지고 빌딩 특유의 냄새와 우윳빛 바닥,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삑- 사원증을 대고 들어가며 길드장은 실망했을 소녀를 위로하고자 어색하게 위로했다.

“나중에 또 놀러 오면 안내해 주마.“

여름에 쓰고자 만들어둔 풀장을 열심히도 바라보던데.

역시 풀장까지만 보여주고 올 걸 그랬나.

“헤헤… 또 놀러 와도 되나요…?”

그런 길드장의 각오가 무색하게도 소녀는 행복했다.

소녀의 기억 속에서 이렇게 외출한 적은 처음이었고.

심지어 맛있는 음식에 선물까지 받지 않았던가.

오늘 한 번으로 끝났어도 평생을 기억할 일이건만, 또 놀러 오면 오늘처럼 안내해 준다고 한다.

그저 기뻤다.

오늘 같은 행복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다는 것이기에.

제가 이런 행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현실의 악마를 보여주겠다던, 인터넷과 악마는 별개의 존재라던 이야기가 더욱 궁금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악마가 아니라니.

이번만큼은 아무리 천사 같은 길드장님이라고 해도 그러려니 믿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과연 뭘 보여주시려는 걸까?

그렇게 막 길드장과 소녀가 한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팀장급 인원들을 위해 만들어 둔 곳이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어…? 길드장님이 여긴 무슨 일이세요?”

“하? 언니, 또 질 것 같다고 딴청 부리면서 도망치려고?”

왠지 익숙한 두 여인이 거대한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탄탄한 몸매의 붉은 단발머리의 여성.

거대한 가슴이 눈에 띄는 분홍색 장발의 여성.

“아앗!”

소녀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며 두 여인을 삿대질했다.

“그때 그 변태들!!”

두 달 전 막 새 몸에 적응하며 노숙하던 때, 보란 듯 소녀의 앞에서 텐트를 펴고 자던 수상쩍기 그지없던 자매임이 틀림없었다!

응! 먹을 거로 꼬시려 하고, 나중에는 무력까지 쓰려고 했었지!

미아의 말에 따르면 저런 인간들을 상종 못 할 변태, 그리고….

“크싸레 맞죠!!”

크레이지 싸이코 레즈비언이라고 했다.

그렇게 외친 소녀가 발발 떨며 길드장의 듬직한 등 뒤로 몸을 숨겼다.

“…….”

“……….”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외부인을 감지했다는 알림에 가상현실 기기에서 빠져나오던 자매가 다급히 시선을 돌려 소녀를 바라본다.

저 파란 머리!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외모에 금세 북한산에서 만나고 놓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물론 아이가 너무 귀엽고 예뻐서 볼이라도 한번 만져보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크싸레라니?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워 온 거지?

이대로 가다간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당할지도 몰라!

자매는 길드장의 싸늘한 시선이 돌아오기 무섭게 변명했다.

“그런 적 없어요!!”

“애, 애당초 우린 자매라고!!”

다행히 길드장은 자매를 크게 의심하진 않았다.

워낙 상식이 부족한 소녀다 보니 뭔가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컸으니 일단 얘기부터 들어볼 생각이었다.

어쨌든 만난 적은 있다는 건가.

그래서 대체 언제 어떤 상황에 만났기에 이러는 거지?

길드장이 막 되물어 보려던 도중이었다.

“그 자매 덮밥? 근친 순애라는 게 있다고 했어요….”

빼꼼- 길드장의 허리 너머로 고개를 내민 소녀가 말했다.

이게 과연 저 조그마한 아이의 입에서 나온 얘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이야기.

“…따라 나와. 잠깐 얘기 좀 하지.”

결국 자매는 길드장과의 면담을 피할 수 없었다.

*

자매는 청성 길드의 팀장급 실력자들이었다.

동생 한유연.

길드장과 같은 몇 안 되는 S급 각성자이자 타격팀의 부팀장이다.

언니 한다연.

A급 각성자로 동생과 한 팀을 이룬 타격팀의 팀장이다.

저 둘이 아무리 막 나가는 성격이라 해도 레즈니 싸이코니 하는 건 좀… 자비로운 길드장이 생각하기에도 선이 넘은 일이었다.

“지, 진짜 아니에요. 저 꼬마를 전에 만나긴 했는데 상황이 되게 이상했거든요. 애 혼자서 산속에서 이불을 펴고 자고 있어서 미아인 줄 알고 도와주려 했던 거예요.”

왠지 모르게 ‘이런 귀여운 아이라면 레즈도 괜찮을지도…’라고 중얼거리는 한다연 대신, 한유연이 다급히 변명했다.

그렇다는 건 소녀가 자명 스님께 주워지기 전에 만났다는 거겠지.

어쩌다 크싸레니 뭐니 하는 오해를 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면이 있다는 건 오히려 긍정적인 일이었다.

“정말 손을 댄 적은 없겠지?”

길드장의 확인에 자매가 미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요! 달리는 속도가 저보다 빨랐어요. 애당초 저 아이도 각성자라서 저희 때처럼 스카우트하려고 데려오신 거 아니에요?”

S급 신체 강화 능력자인 그녀보다 빨랐다고?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이미 한 번 소녀의 저력을 본 적 있던 길드장은 그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역시 소녀는 두 개 이상의 능력을 가진 이레귤러였나.

교단 놈들에게 세뇌당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만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최연소 S급 각성자로 인정받았을 터였다.

소녀를 향한 측은함이 한층 강해졌다.

어떻게든 돕고 싶지만, 이 문제를 도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 건지.

길드장이 고민에 빠지자 조급해지는 건 자매였다.

어어 우리 설마 진짜 쫓겨나는 건 아니겠지?

쫓겨나는 거에 더해 아청법 이런 거로 빌런으로 지정되진 않겠지??

침묵이 길어지자, 한유연은 더 참지 못하고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여, 역시 어디 재벌 아이라도 되는 거죠? 어쩐지 곱고 예쁜데 능력도 좋다 했어요! 청성 길드의 유망주!”

소녀와 나름 친근해 보이던 길드장의 모습에 나름대로 아부를 시도한 것이었다.

정작 소녀의 과거를 들어 알고 있던 길드장에겐 그리 좋지 않게 들려왔으니.

‘이 작은 애를 산속에 놔두고 왔으면서 잘도 해맑군.’

자매가 소녀와 마주쳤다는 건, 소녀가 보다 일찍이 구축될 기회가 있었단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 스님과 함께 살 게 아니라 길드에서 살 수 있단 뜻.

물론 그때는 그 역시도 소녀의 존재를 몰랐고, 이런 가정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굳이 쓴소리하진 않았다.

대신 괘씸한 자매는 앞으로 소녀를 도우며 속죄하게 할 생각이었다.

“뭐라 할 생각은 없으니 됐다.”

“휴우….”

그제야 자매가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아는 법.

“다만 저 어린아이가 의심할 정도로 오해할 행동을 했다는 건 그냥 넘길 수 없겠군.”

“헉!”

슬금슬금 눈치 살피며 뒷걸음치던 자매가 염동력에 발목을 붙잡혔다.

가히 사기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염동력에는 A급, S급 헌터인 자매조차 시무룩하니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푸욱 땅을 향해 굽혀진 두 개의 자그마한 머리통.

길드장은 그런 두 사람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판결 내렸다.

“그러니 저 아이가 길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도록 해라. 그게 이번 일의 벌이다.”

그러나 그런 길드장조차 눈치채지 못한 게 있다면….

“저, 정말이세요?!”

“그래. 예외는 없다.”

“아싸!!”

“……?”

자매가 생각 이상으로 귀엽고 예쁜 것에 약하다는 점이었다.

이런 귀여운 아이랑 같이 있을 수 있다니!

시커먼 인간들이랑 게이트나 들락날락하며 피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즐거운 일이 아닌가!

여태 눈치 보건 게 무색하게도 싱글벙글 웃는 얼굴에 길드장은 나지막이 한숨을 삼켰다.

이런 정신 나간 녀석들이 차기 청성을 이끌어 갈 영웅이라니.

아무래도 속이 깊고 똑똑하고 착한 소녀를 빨리 가르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더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길드장은 앞으로 소녀의 교육을 도와줄 자매는 물론, 비번이었던 양조야 강사까지 불러 함께 가상현실 방으로 되돌아갔고.

“이익! 기, 길드장님이 싸가지 없다니! 사탄 들린 쓰레기 주제에!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불타 죽을 주제에!!”

왠지 모르게 스마트폰을 붙잡고 씩씩대는 소녀를 발견했다.

조그마한 두 발을 동동 구르며 손가락이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와… 이게 요즘 MZ구나…. 타자 치는 데 능력을 쓰는구나?”

한다연의 이야기대로 능력을 쓰고 있는 모습.

얼마나 집중 중인지 그들이 들어왔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처음 볼 때는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양조야 강사는 매번 김성영 학생을 일방적으로 발라먹던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귀엽고 착하고, 강하고, 어, 단호하고? 그런 아이였는데?

“기, 길드장님. 역시 인터넷을 제한하는 게 좋겠어요.”

말 한마디 못 하고 수줍어하던 소녀가 금쪽이로 진화한 꼴이 아닌가!

육성 게임으로 따지면 공주가 되어야 할 아이가 ‘현질 하게 5천 원 달라고!’ 외치는 등골브레이커로 자라는 엔딩 꼴이다.

그러나 그런 강사의 조언에도 길드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보다 소녀를 자세히 지켜봐 왔던 만큼 지금 소녀는 본래의 자아와 세뇌당한 자아가 부딪히고 있음을 알고 있고 있었다.

…아니더라도 저 모습은 세뇌당한 탓이어야만 한다.

스마트폰을 부수고, 글쓴이를 잡아 죽이겠다고 날뛰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아직 치료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니.

“어… 길드장님 인터넷에서 욕먹고 계시는 건 신경 안 쓰시는 건가…?”

한유연의 중얼거림을 뒤로한 채, 길드장은 소녀를 이끌고 가상현실 접속 장치로 향했다.

“이걸로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는 악마를 만날 수 있다. 실제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구현해 낸 거지.”

굳이 긴 설명은 하지 않았다.

소녀의 직접적인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소녀의 두 자아.

언제까지 길드장이나 자명 스님처럼 소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함께 있어 줄 수는 없으니.

그 모호한 경계선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언제고 문제가 일어날 터였다.

빌런으로 몰려 죽든, 빌런들의 목표가 되어 죽든.

교단 놈들에게 들키든 말이다.

어느 쪽이건 좋지 않은 결말뿐.

“…제 맘대로 해도 되는 건가요?”

소녀의 물음에 길드장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지켜보고 있겠지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이 모든 과정은 그걸 확인하기 위한 일이었다.


           


Don’t Die, It’s Not Your Body

Don’t Die, It’s Not Your Body

죽지 마, 네 몸이 아니야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you deserve to b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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