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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

   ​

    연주를 모두 끝마치고 다시금 원래 자리로 복귀했을 때.

    이전과 달리 감탄과 놀라움 가득한 시선들이 나를 맞이했다.

    ​

    “……정말 대단하시네요.”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긴요. 지금 주변 사람들 눈빛 안 보이세요? 당신, 이거 하나로 몸값 엄청 올린 거라고요.”

    ​

    가장 먼저 내게 말을 걸었던 리제는 아예 대놓고 칭송에 가까운 칭찬을 내뱉고 있었다. 퍽 멋쩍은 일이었지만 내가 누구인지 오해시키는 일에는 성공한 듯 했다.

    ​

    나를 실력있는 피아니스트쯤으로 오해한 리제는 호기심 가득 담긴 말투로 물었다.

    ​

    “그나저나 라에몬 씨. 뭐 하는 사람이신가요? 제가 예술계쪽으로 나름 발이 넓은 편인데, 라에몬 씨 같은 기재가 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도 없는…….”

    “일반인입니다. 레갈리아 회장님께 후원을 좀 받는.”

    “……일반인이라고요?”

    “예.”

    ​

    그리 말하자 리제는 그게 말이나 되느냐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나는 당당했다. 그녀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일반인이라면 일반인이지.

    ​

    ​

    * * *

    ​

    ​

    “─그럼 다음 번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

    기업 회장들과의 담화를 끝낸 레갈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곧장 몸을 돌렸다. 사고를 치고서 태연하게 이야기나 나누고 있는 과학자에게 다가간 것이다.

    ​

    마음 같아서는 그가 피아노 연주를 끝낸 즉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엄연히 이블스 기업의 회장이요 회장으로서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여럿 있었으니까. 이 파티도 업무의 연장이었다.

    ​

    후계자들이 잔뜩 모여 있는 장소로 다가가자, 그녀를 본 이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스리슬쩍 물러섰다. 그들에게 있어 레갈리아는 가까우면서도 머나먼 존재다. 동년배인 그들은 아직 알이었지만 이쪽은 스스로 움직이는 거인이라는 점에서.

    ​

    “그 반도체는 10년 이내로 완성하는 게 불가능할 거 같은데요?”

    “흠- 그럼 어디에 투자하는 게 좋을 거 같은가?”

    “글쎄요. 저라면 대충─.”

    ​

    과학자는 태평하게 후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사실이 레갈리아의 심기를 거슬렀다. 자신은 본인 때문에 다른 기업가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데, 본인은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고 있단 말인가?

    ​

    레갈리아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과학자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접근을 깨달은 과학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자네.”

    “아, 제 후원자님께서 오셨군요. 회장님. 오늘의 공연은 어떠셨습니까?”

    ​

    태연하게 연기를 시작한 과학자를 보며 레갈리아는 눈빛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

    ─언제부터 그런 재주가 있었나?

    ─왜 말도 안 하고 멋대로 나댄 건가?

    ─사고 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

    그러나 과학자는 그 속마음을 이해하지 못 한 건지 엉뚱한 답변을 내놓았다.

    ​

    “회장님께서도 오늘 공연이 만족스러우셨나보군요? 하기야- 오늘 연주한 게 지금껏 들려드리지 않은 신곡이긴 했습니다.”

    “……그래. 놀라긴 했네.”

    ​

    정말이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대뜸 그런 자리에는 왜 나선단 말인가?

    실수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실력이 별로라서 혹평을 받았더라면 어떻게 할 셈이었지? 무어라 변명하려고?

    ​

    과학자는 그런 일은 전혀 생각하지 못 했는지, 아니면 그런 걸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자신이 넘쳤는지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본인의 실력을 증명했다. 

    ​

    덕택에 그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 그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을 뿐. 레갈리아에게는 그게 더 골치아팠다.

    ​

    “돌아가면 다시 한 번 그 연주를 듣고 싶을 정도로.”

    ​

    속뜻도 알아듣지 못 하는 과학자에게 굳이 이 말을 번역해주자면.

    돌아가서 두고 보자는 말이었다.

    ​

    ​

    ​

    파티가 끝났다.

    모두가 각자의 도시로 돌아가는 가운데, 리제는 차량 안에서 눈을 감고 오늘 밤 들었던 소나타에 대해 떠올렸다.

    ​

    마치 밤하늘 보름달이 떠오르는 감미로운 음율이 그녀의 귓가에 일렁거린다. 한 번 들었던 연주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

    기억에 의지하여 콧노래를 불러보지만 어딘가 어설프다. 앨범이 있다면 구해서 듣고 싶거늘 자작곡이라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

    그러니까 그녀가 오늘 밤 들은 곡은 이제 어디 가서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곡이라는 뜻이었다. 그 연주가를 데려와 연주시키는 게 아니라면야.

    ​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지.’

    ​

    리제는 오늘 만났던 연주가. 그러니까 레갈리아 회장이 데려온 파트너를 떠올렸다. 그는 그녀의 유혹에도 쉬이 넘어오질 않았다. 그녀의 살결만 보고서 그녀에게 모든 걸 바치는 남자가 줄 서 있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놀라운 일이요.

    ​

    하물며 그녀의 유혹이 단순히 그녀가 가진 매력이 아니라 능력에서 나온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

    ‘어떻게 내 능력을 회피한 거지?’

    ​

    지금껏 그녀의 능력을 회피한 경우는 다음과 같은 경우밖에 없었다.

    그녀의 초능력을 무시할 정도로 강대한 초능력을 지녔거나.

    아니면 물건이 서지 않을 정도로 늙은, 성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은 노인이거나.

    혹은 남자를 좋아하는 동성애자이거나.

    ​

    그 경우를 제외하면 그녀의 매혹에서 벗어난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는 같은 여자를 상대로도 통할 정도였으니─ 성인 남성이 그녀의 능력을 피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

    동성애자도 아닌 것 같은 게, 가까이 달라붙었을 때 그가 가슴골로 보냈던 뜨거운 시선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곧바로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그건 수컷 특유의 본능 섞인 눈빛이었다.

    ​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도 않던데…….’

    ​

    단 한 번도 없었던 예외적인 상황.

    그녀는 의외의 상황에 호기심을 느꼈다.

    ​

    ‘갖고 싶다.’

    ​

    도시 하나를 대표하는 대기업의 후계자로서, 지금껏 원하는 모든 걸 손에 넣어온 그녀로서는 드물게도 갖고 싶은 데 손에 들어오지 않는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

    짝사랑이라는 게, 안달남이라는 게 이런 걸까.

    리제는 오늘 들었던 연주곡을 되새김질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리 되새김질할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

    ​

    * * *

    ​

    성명 : 리제Rize

    초능력 : 매혹

    설명 : 뱀처럼 상대방을 옭아맨다. 한 번 물리면 벗어날 수 없다.

    ​

    * * *

    ​

    ​

    “─과학자여. 혹시 자네는 목숨이 두 개인가?”

    “네?”

    “왜 그렇게 나대는 건가 정말-!”

    ​

    본부로 돌아온 나는 레갈리아에게 잔소리를 들어야만했다. 솔직히 말해서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녀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었다.

    ​

    “그냥 얌전히 여의 곁에 서 있기만 하면 되는데! 거기서 연주는 왜 하는가 대체!”

    “아니 그야 거기 있는 사람들이 제 정체를 궁금해하면 안 되니까…….”

    “그럼 대충 적당히 유명한 곡이나 칠 것이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연주를 해서는-!”

    “유명한 곡인데요…….”

    ​

    지구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곡인데- 그 말을 들은 레갈리아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

    살기 가득 어린 시선을 느낀 나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했다. 그래, 이 정도도 하면 안 된다 이거지…….

    ​

    정말이지 이 세계로 와서 가장 골머리 앓은 것이 바로 이런 점이었다. 지구와 이 세계의 간격. 과학도 예술도 아무거나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게 골치가 아프다.

    ​

    “아무튼 자네. 여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지는 않겠지?”

    “글쎄요…… 뭘 모르시는지를 모르니.”

    “모두 다 말하게!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운동을 잘 한다거나! 아무튼 남들보다 잘하는 건 모두!”

    “그림도 못 그리고 운동도 못 합니다. 맨몸으로 자동차보다 빨리 달리는 녀석들을 어떻게 이깁니까?”

    “다른 건? 부디 나중에 사고치지 말고 미리 얘기 좀 해달란 말일세!”

    ​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치는 레갈리아.

    혼나는 와중에 할 말은 아니지만 아이가 투정 부리는 거 같아서 귀여웠다.

    그러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라도 한 듯, 보스는 순간 위압감을 내뿜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

    “─집중하게나. 한 눈 팔 정도로 여유로운가 보지?”

    “……넵. 잘못했습니다.”

    “하아- 정말이지. 재밌어보인다고 줍는 게 아니었는데…….”

    ​

    머리를 벅벅 긁어대던 레갈리아는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시계는 어느덧 새나라 어린이가 꿈나라로 돌아갈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마 그녀는 전신을 짓누르는 피로감을 억지로 이겨내고 제게 한소리 했던 것이리라.

    ​

    눈꺼풀을 이겨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그걸 어린아이가 해낸다는 게 어찌나 힘든 일인지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

    다음부턴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

    ​

    ​

    다음 날.

    비가 미친듯이 쏟아지는 날.

    푹 젖은 아일레가 징징거리며 연구실로 찾아왔다.

    ​

    “진짜아아…! 과학자 씨…! 무기, 무기 좀 만들어주세요!”

    “……대뜸 와서는 그게 무슨 소리야? 왜 푹 젖은 생쥐꼴이고?”

    “그게에…!”

    ​

    아일레가 말하길.

    미친듯이 달리는 폭주차 하나가 그녀 근처를 스쳐 지나가며 물웅덩이를 흩뿌렸다고 한다. 물에 젖은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고 마법소녀로 변신해서 복수하려고 했을 땐 이미 시야에서 멀리 사라져버린 뒤였다고.

    ​

    그 말을 들은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

    “무슨 물 좀 맞았다고 복수를 하려고 하니…….”

    “그치마안…! 화 안 나세요…!? 같은 동료가 물에 맞았는데에…!”

    “화가 안 나는 건 아니지만, 무기를 만들어서 복수할 정도는 아니지.”

    ​

    그러나 아일레는 제 손으로 복수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부들거렸다. 그녀가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떨때마다 그녀가 입은 치마요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방울져 떨어졌다.

    ​

    이대로 있다간 감기에 걸릴까- 한시빨리 샤워실로 보내 젖은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시켰다. 그러나 돌아온 아일레는 여전히 분노에 절여져 있었다.

    ​

    옆에서 얌전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비라는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

    “그거 빌런 같은데?”

    “빌런? 이 도시는 빌런이 없지 않나요?”

    “다른 도시에서 활동하는 놈이거든.”

    ​

    모스피드Mospped.

    슈퍼카를 타고 미친듯이 내달리는 빌런이라고 한다.

    신호요 중앙선 같은 교통 법규를 지키지 않고 그저 달리기만 하는 미친놈이라고.

    ​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되물었다. 

    ​

    “아니, 무슨 슈퍼카 타고 돌아다니는게 빌런이에요?”

    “뒤지게 빨라서 못 잡거든. 걔 초능력이 운전이라는 소리도 있어.”

    “어떻게 초능력이 운전…….”

    ​

    빌런이 된 이유요 지금껏 잡히지 않은 이유까지 황당하지 않은 게 하나 없었지만, 아일레에게는 다른 듯 했다. 자신이 빌런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들은 아일레는 내게 열렬하게 주장했다.

    ​

    “과, 과학자 씨…! 빌런, 빌런이래요!”

    “응. 나도 들었어.”

    “일개 빌런한테 능욕…! 이건 악의 조직으로서의 치욕…! 부, 분명 프라이드를 지키라고 하셨잖아요…!”

    ​

    얼마 전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들고 와서 반격하는 아일레를 보며, 나는 애들 앞에서 입조심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돌아온다. 괜히 옛날 사람들이 입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한 게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일레를 바라보았다. 

    ​

    만일 내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앞으로 내 말을 전부 무시하고 다닐 가능성이 컸다. 아이들은 원래 작고 사소한 거 하나로 크게 삐지는 법이었으니까.

    ​

    “복수하고 싶다 이거지?”

    “네, 네에-!”

    “꼭 무기가 아니여도 괜찮지?”

    “네, 에?”

    “그런 애들을 폭력으로 때려잡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

    들은 바로는 그 빌런은 미치광이 속도광.

    그런 종류의 놈들은 단순히 폭력으로 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

    “걔네들 영역에서 짓밟아 줘야지.”

    ​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면.

    ​

    ‘보스가 사고치지 말라고 한 지 반나절도 안 됐는데…….’

    ​

    뭐, 이 정도는 사고 측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사고는 내가 아니라 아일레가 칠 예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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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vil Scientist is Too Competent

The Evil Scientist is Too Competent

Status: Ongoing
I became a scientist for an evil organization. …But I’m too compe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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