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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

     

    “주치의로 뽑힌 걸 축하한다, 아들아.”

     

    최종 선발이 끝나고 아버지와 본관에서 담화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내가 주치의로 선발된 것에 상당히 들떴는지, 가주로서 체면도 잊고 함박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 청출어람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던 덕분입니다.”

     

    “아니, 나는 치유술에 대한 지식도 삶에 대한 지혜도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다. 진작 너를 신경쓰지 못한 불찰이 크구나. 이 성공은 네가 온전히 이뤄낸 것이야, 라스.”

     

    아버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합격 축하드려요.”

     

    “아, 네리아. 축하 고마워.”

     

    네리아는 어쩐지 조금 기운이 빠져있었다.

     

    “네리아, 무슨 일 있느냐? 라스에게 경사가 생겼는데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아닌데….”

     

    네리아가 목을 움츠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라버니, 이제 황궁으로 가시는 거죠…? 모처럼 오라버니랑 얘기하게 됐는데 이제 못 뵙게 되니까….”

     

    “하하.”

     

    어떻게 네리아는 말 한마디를 이렇게 착하게 하는지.

     

    네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

     

    “휴가는 자주 나올 거라 금방 볼 수 있을 거야. 미리 언질을 받아놨거든.”

     

    “정말요?”

     

    그제야 네리아의 얼굴에 환한 빛이 들었다.

     

    “그래. 내가 황실에 가 있는 동안 네리아가 해줄 일이 있어.”

     

    “제가요?”

     

    “응. 별관 앞에 있는 장미 화단 알지?”

     

    “아, 잘 알아요. 저택 밖으로 나가려면 늘 그 앞을 지나쳐야 했….”

     

    네리아가 말실수를 한 듯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그 개구멍은 네리아가 몰래 놀러 나갈 때 쓰던 용도였구나.

     

    “그 화단을 키워서 장미를 많이 재배해 줘. 꽃잎을 벌꿀 사탕이랑 같이 내게 주기적으로 보내줘야 해.”

     

    “벌꿀사탕이랑 장미잎….”

     

    “중요한 일이야. 할 수 있지?”

     

    “그럼요! 오라버니의 화단은 맡겨주세요!”

     

    네리아가 주먹을 꽉 쥐어보이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네리아면 든든히 믿고 맡길 수 있지.

     

     

    나는 다음으로 병영을 찾았다.

     

    타냐 단장은 어제 그만한 대규모 작전이 있었음에도 몸을 쉬이지 않았다.

     

    연병장에서 돌덩이를 나르며 체력훈련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내가 방해인 눈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타냐가 나를 발견하고는 즉시 뛰어왔다.

     

    “여, 단장.”

     

    “도련님, 소식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고생길 시작이지.”

     

    사탕을 깨물며 설렁설렁 대답하니 타냐가 피식 웃고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슥 쓸어넘겼다.

     

    “일과 보내는데 내가 방해했나?”

     

    “그럴 리가요. 고트베르크 가는 도련님의 저택이니 언제 어디든 다녀가실 수 있습니다. 준비해야 하는 건 제 쪽입니다.”

     

    “음, 좋아, 이 분위기 유지해.”

     

    “도련님도 지금처럼 계속 성실하시다면야.”

     

    한 마디를 이길 수가 없구만.

    크게 되실 분은 달라도 뭐가 다르다.

     

    “단장, 나는 내일부터 바로 황실에서 주치의 업무를 시작하게 돼.”

     

    “그러시군요.”

     

    “이야기했던 대로 단장이 내 호위기사로 동행했으면 하는데, 어때?”

     

    동네 산책이나 나가자는 투로 가볍게 제안했다.

     

    내 말에 타냐가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악수? 무릎 꿇고 충을 맹세해야 할 때 아니냐?”

     

    “북부 기사들 스타일 아시잖습니까.”

     

    “황실에서도 그래 봐 아주.”

     

    타냐가 가볍게 미소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평범한 악수는 재미없으니 엄지만 맞잡고 어깨를 부딪쳤다.

     

    타냐도 그 인사를 더 마음에 들어했다.

     

    “호위는 두 명까지야. 다른 한 명, 추천할 만한 기사 있어?”

     

    “보리스에게 권유하는 건 어떠신지요. 친하지 않으십니까.”

     

    “친하기는 뭘. 부상 때문에 당장 못 가기도 하고, 곧 신혼인 애를 데려가서 어쩌게.”

     

    “음… 그도 그렇군요. 그래도 한 번 이야기는 나눠보지요.”

     

    병상에 누워있는 보리스를 찾아가니 바로 기사 한 명을 추천해주었다.

     

    “이런, 저도 도련님을 따라가면 재밌을 텐데 아쉽군요. 하지만 저는 후작령이 제 자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요. 뭐니뭐니해도 고향 땅 아니겠습니까? 대신 브루노를 추천드리죠.”

     

    보리스가 부르자 브루노가 즉시 준비를 마쳤다.

     

    마물 토벌 때 같은 조는 아니었지만 꽤 활약했던 기사였다.

    덩치가 커서 꼭 회색곰을 연상케 했다.

     

    “브루노, 도련님께서 황실 주치의로 계시는 동안 호위가 필요하시다. 자네도 나와 함께 같이 가겠나?”

     

    “영광입니다.”

     

    브루노는 깔끔하게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원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단장님에 브루노까지 빠지면 저희 기사단 전력이 당분간 약해지겠는데요.”

     

    “네가 잘 관리하고 있어, 보리스.”

     

    “어이쿠, 부단장이라도 시켜주십니까? 보수도 더 나오죠?”

     

    “추가 보수는 없지만 휴가는 늘어난다.”

     

    “흠, 그 정도면 뭐.”

     

    그렇게 황실로 동행할 멤버도 깔끔하게 정해졌다.

     

     

     

    다음날, 나는 시종들과 시버스가 챙겨주는 옷을 입고 별관을 나섰다.

     

    “도련님이 결국 주치의로 황실 내의원에 입성하실 줄이야, 감동입니다요.”

     

    시버스는 항상 과하게 반응한다. 얼마 보진 않았지만 나중엔 그리워지려나?

     

    “도련님께서 주문하신 옷이 맞춰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나는 치유사들이 주로 입는 성의를 입지는 않았다.

    평소 입는 정장에 특별히 주문한 옷 한 벌을 걸쳤다.

     

    의사의 상징, 흰 가운이다.

     

    “여분은 완성되는 대로 추가로 보내줘.”

     

    “물론입니다. 맡겨주시죠.”

     

    정원을 넘어 후작가 정문을 나선다.

     

    아버지, 네리아, 시종들, 기사들.

    나를 마중하는 많은 이들이 손을 흔들어 왔다. 적당히 답해줬다.

     

    저택을 나서서 텔레포트 게이트로 향한다.

    곁에는 두 호위기사가 함께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작은 군대와도 같은 기사와 시종의 무리.

     

    중앙에는 턱을 치켜들고 나를 당당하게 내려다보는 아셀라가 있다.

     

    “늦었잖아.”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하니 아직 출발할 시간보다 한참 전이었다.

     

    “안 늦었는데요.”

     

    “나를 기다리게 했으면 늦은 거지.”

     

    물론 그러시겠죠.

    황녀님이 세상의 기준이시니까요.

     

    잠시 후에 카밀라 황비도 저택가에서 나와 합류했다.

     

    미리 준비를 마친 궁정 마법사가 마나를 흘려보내니 황궁 쪽에서 신호를 받고 게이트를 통해 포털이 열린다.

     

    쏟아지는 푸른 빛.

     

    그 안으로 걸어가기 직전, 아셀라가 내게 물었다.

     

    “공자, 게이트는 써본 적 있어?”

     

    “아뇨.”

     

    회귀하고는 경험한 적 없으니 그렇게 대답했다.

     

    아셀라는 내 대답에 즐거워하며 악마같이 웃었다.

     

    “그래. 신선한 경험이 될 거야.”

     

    그리 말하고는 기품 있는 걸음과 함께 선행하는 아셀라.

     

    “가실까요, 도련님.”

     

    “가지, 타냐 단장. 그리고 한 가지, 앞으로는 선생님이라고 불러.”

     

    “알겠습니다, 선생님.”

     

    돌팔이지만 이제 나름 주치의라는 직함도 있으니까, 이 정도 대우는 괜찮겠지.

     

    나는 벌꿀사탕을 입에 물고 푸른 빛 안으로 몸을 던졌다.

     

     

     

    ***

     

     

     

    회귀한 후 처음 경험한 텔레포트는 최악이었다.

     

    머리가 핑 돌아버려서 꼴사납게 그 자리에 즉시 쓰러졌다.

    아셀라는 내 모습을 비웃었고, 나는 타냐 단장에게 업혀 황궁에 입궁해야만 했다.

     

    “여기가 황궁이군요.”

     

    타냐는 휘황찬란한 적색으로 웅장하게 지어진 황궁 건물들이 퍽 신기했는지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황궁 부지는 제도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

     

    황궁답게 스케일은 고트베르크 후작가 저택이 비빌 수준조차 아니었다.

     

    황제가 머무는 본궁은 요새나 다름없고, 황실 구성원들을 위한 궁이 따로 몇 채씩이나 있는 구조다.

     

    아셀라와 카밀라 황비가 지내는 곳은 ‘월광궁’이라고 하는, 황궁 부지 북서쪽에 위치한 장소였다.

     

    “그리고 여기가 내가 지내게 될 방이란 말이지.”

     

    진짜 아셀라의 방 바로 옆 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줄 알았는데, 떡하니 2층에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꽤 괜찮아졌어.”

     

    “오후에 임명식이 있다고 합니다. 우선 짐부터 풀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업무 일정은?”

     

    “내일부터 즉시 시작합니다.”

     

    타냐가 내게 일정표를 가져다주었다.

     

    주치의는 기본적으로 담당 환자, 즉 황가 구성원의 건강상태를 매일같이 체크한다.

     

    아무리 사소한 상태 이상이라도 즉시 발견해서 치유하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마력계 체크라. 전용 아티팩트도 준비되어 있네.”

     

    내 방에는 주치의를 위한 온갖 도구와 고급 아티팩트가 잔뜩 준비되어 있었다.

     

    “치유술이 안 통하는 아셀라에게는 전부 쓰레기지.”

     

    나는 마력측정기를 서랍에 넣고 닫았다.

     

    “아셀라가 환경을 준비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필요한 재료는 얼마든지 요구해도 되겠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타냐와 브루노가 내게 궁금한 눈치를 보냈다.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당한 게 있어서 돌려주려는 생각까진 아니지만 뭐, 이 정도는 괜찮겠지.”

     

    “황녀님… 말씀이시죠?”

     

    “그래. 설마 황녀님이 바늘을 무서워하시진 않겠지? 어떻게 생각해?”

     

    [혈액검사] 스킬 설명을 확인하며 한 내 질문에, 타냐가 눈동자를 멀뚱멀뚱 굴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데찌님 후원 감사합니다! 기대해주셔서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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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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