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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

       멍하니 눈앞의 인물을 살펴보았다.

       

       길게 늘어진 연녹색 머리카락은 하프업 스타일로 곱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그 매듭은 벼 머리로 이루어져 있다.

       

       어쩐지 티아라를 쓰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머리 스타일이다.

       

       거기에 외모는 또 어떤가. 청순하면서도 가련한, 그러나 굳은 심지가 엿보여 유약해 보이지는 않는 얼굴.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엘프스러운 아름다움이지만, 그 수준이 미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의 평균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다만, 턱 밑으로 이어지는 몸뚱이는 썩 엘프답지 않았다.

       

       군데군데 활동하기 편하도록 개량하긴 했지만, 여전히 과하게 하늘하늘한 것이 드레스에 가까운 엘프 전통복.

       

       그런데 펑퍼짐했어야 할 옷의 허리 부분에 코르셋을 감았다. 덕분에 강조된 몸매가 여실히 드러났는데, 이게 또 장난 아니다.

       

       노출에 개방적이고, 몸매를 자부심으로 여기는 판 대륙의 여자 기준으로도 어디 가서 절대 꿀리지 않을 정도.

       

       단아한 얼굴에 비하면 실로 단정치 못한 몸이다.

       

       물론, 일전에 슬쩍 보았던 리디아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슬렌더 체형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엘프치고는 꽤나 이례적인 사이즈.

       

       아무리 성욕이 적고, 연애에 소극적인 이 세계의 남자들이라도 저 정도면 먼저 말 걸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겠지.

       

       문제는 단 하나의 요소가 저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반전시킨다는 점이지만.

       

       “후후후. 이브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해야 하려나요?”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 항상 웃는 상인 실눈, 그리고 단순히 인사하는 것뿐인데 바짝 긴장하게 되는 의뭉스러운 말투.

       

       전신에 두른 수상할 정도로 수상한 분위기가 이브의 아름다움을 위압감으로 변질시킨다.

       

       실제로 방금까지 들떠있던 리디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바짝 긴장했을 정도.

       

       …하지만 나는 안다. 저거 그냥 순수하게 인사만 한 거라는 걸.

       

       주도권을 잡겠다거나, 너희는 나를 처음 보겠지만 나는 너희를 안다거나. 그런 의미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이를 확신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브 또한 엘리처럼 내가 설정한 캐릭터기 때문이다.

       

       아마 저 의문문으로 끝나는 인사 또한 너무 오래 산 탓에, 타인의 얼굴을 자주 헷갈려서 그런 것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이브는 현존하는 필멸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존재일 테니까.

       

       환대에 감사하는 의미로 이쪽 또한 방긋 웃어주었다.

       

       “그러네요!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요나라고 불러주세요! 안 좋은 일로 만났지만, 가능하면 이브 씨와는 친구가 됐으면 좋겠네요!”

       

       “어머? 요나처럼 어린 친구라면 언제든 환영이죠.”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키득이는 이브.

       

       네가? 나랑? 진심이야? 같은 뉘앙스를 풍기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거 맞다.

       

       지금은 조용히 살아가고 있지만, 이브는 알 사람은 아는 전설적…아니. 좀 더 정확히는 역사적 존재라고 해야 하나.

       

       무려 세계수가 미궁의 일부가 되어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꽃에서 태어난 하이엘프니까.

       

       어림잡아도 1,000살에 육박하는 존재. 그리고 앞으로도 1,000년은 더 살아갈 신화의 유산.

       

       그게 바로 이브 니르바나 이그드라실이다. …마지막 이그드라실이라는 성은 숨기고 사는 것 같지만.

       

       생각해 보라. 현재의 판 대륙은 한번 멸망했다가 재건한 문명. 그런데 이를 초창기부터 쭉 지켜봐 온 존재가 있다? 심지어 저런 수상쩍은 외모로?

       

       같은 엘프들이야 역시 세계수의 적장녀! 엘프가 위대하던 시절의 증거! 라며 열광하겠지만….

       

       그 외의 종족 입장에선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미친 흑막 노괴로 오해받기 십상 아닌가.

       

       절망하던 엘프가 자본주의를 떠받들며 대륙의 금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터라 부정하기도 힘들어졌고.

       

       심지어 이브에겐 세계수가 남긴 권능이 남아있다.

       

       하이엘프가 세계수와 엘프 사이의 소통자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체인 만큼, 무력이 아닌 통치를 위한 권능. 그렇다 하여 별거 아닌 권능이란 뜻은 아니다.

       

       이브에게 주어진 권능은 둘.

       

       정해진 수명이 다하기 전까지 절대 쇠락하지 않는 몸, 그리고 진위를 꿰뚫어 보는 진실의 눈이다.

       

       그래. 무엇을 숨기랴. 옛날 판타지 소설의 엘프가 가진 특성을 살짝 가져다 썼다….

       

       지금이야 양판소라며 이래저래 까이긴 하지만, 솔직히 나는 당시의 세계관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만큼 흥했던 거겠지. …너무 많이 봐서 피곤해졌다는 감상은 지울 수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러한 권능을 타고난 이브이기에 더더욱 주변에서는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수를 잃은 엘프들이 한창 절망하던 시기에는 여왕으로서 어찌어찌 동족을 이끌기도 했고.

       

       만약 이브가 없었다면 엘프는 자본주의에 눈을 뜰 때까지 버티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멸종까지는 안 갔겠지만…종족의 쇠퇴는 어쩔 수 없었겠지.

       

       그런 혈통과 업적을 지닌 만큼 원한다면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으나.

       

       이브는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을 엘프들이 세계수가 없는 세상에 적응할 때까지 도와주는 존재라고만 여겼기 때문이다.

       

       세계수가 그런 목적으로 이브를 남긴 것이기도 하고, 이브 본인도 그러길 원했다.

       

       통치를 위한 능력을 타고났다 하여 성격까지 타고난 것은 아니니까. 이브의 속내는 목가적이고 소시민적인 구시대 엘프의 그것이거든.

       

       툭 까놓고 말해, 겉으로는 흑막처럼 굴면서 사실은 집에서 혼자 다육식물이랑 대화하는 게 취미인 찐따라고 보면 된다.

       

       하여, 엘프들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서자마자 바로 은퇴해 버렸다.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이 식물이나 키우고, 소일거리 좀 하면서 세상이 점점 발전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인생의 낙인 무해함 그 자체고.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에 진심으로 기뻐한 이유도 간단하다.

       

       이브를 모르는 이는 그 수상한 분위기를 경계하고, 이브를 아는 이는 더더욱 경계하는 것이 그녀의 삶.

       

       천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친구도 연인도 없이 외롭게 살아온 인생이다. 누가 진심으로 만난 걸 기뻐하며 친근하게 대해주면 반가워할 수밖에.

       

       대충 외로운 어르신이 자기랑 잘 놀아주는 젊은이를 좋아하는 거랑 비슷하다.

       

       다만, 똑같이 내가 설정한 캐릭터라 하여 엘리처럼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상대냐고 묻는다면…그건 또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 배신하지 않는 조력자 포지션인 엘리와 달리 이브가 맡은 역할은 중간보스.

       

       그것도 초반에는 가까운 사이가 되어 감정적 교류를 쌓지만, 모종의 이유로 흑화한 끝에 결국 주인공 손에 죽는 비참한 보스다.

       

       피투성이가 된 채, 주인공의 품에 안긴 실눈 캐릭. 언제나 웃는 상이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지며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런 장면이 쓰고 싶어서 만든 캐릭터였거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주인공의 정신적 성장이고 나발이고 그냥 해피엔딩이나 구상할 걸 그랬다.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흑화하기 전인 지금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소리다. 아예 흑화를 막는다면 앞으로도 쭉 그러하겠고.

       

       대략적인 설정만 구상한 탓에 어떤 이유로 흑화하고 어떻게 세상을 불태우려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다.

       

       이는 현실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 대한 작가로서의 최소한의 책임임과 동시에,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세상에 떨어진 빙의자로서의 숨김없는 진심.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브와 친해져야 한다. 그리고 가까이서 무슨 문제가 생기는지 유심히 살피다, 위험할 것 같으면 즉시 해결해 줄 생각이다.

       

       각오를 다지며 이브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옆자리를 두드렸다.

       

       팡팡!

       

       “리디아 님도 어서 오세요.”

       

       “…됐어. 나는 그냥 서 있을게. 이번 일은 요나의 일이니까 내가 끼어들지 않는 게 맞아.”

       

       여전한 무표정. 하지만 평소보다 약간 경직된 입꼬리를 보아, 아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거겠지.

       

       리디아가 실력 좋은 모험가긴 해도 고위층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니 이브의 정체를 알아챈 건 아니겠지만….

       

       그런 거 몰라도 수상한 사람이라는 건 눈으로 보인다.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리라.

       

       리디아의 속내가 전해진 것은 아니겠으나, 저 말이 그냥 둘러댄 거짓이라는 걸 느낀 이브가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리디아라면 그 고결한 리디아 맞죠? 얼마나 고결하신 분인지 궁금했는데 아쉽게 됐네요.”

       

       언제까지 고결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X)

       대화를 나누지 못해 정말로 아쉽다(O)

       

       “아하하! 리디아 님은 부끄럼쟁이거든요. 나중에 손님으로 다시 올 테니, 그땐 좀 더 편한 분위기에서 이야기해 봐요!”

       

       “좋네요. 다음을 기대할 수 있는 삶이란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네 인생에 다음이 있을 것 같냐(X)

       정말 다시 와 주는 거지?(O)

       

       속으로 이브의 말을 번역해 가며 듣고 있는데,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심각해지는 리디아의 표정.

       

       반면 이브는 내가 한 번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 기쁜지 살짝 들뜬 기색이다.

       

       실눈이 한층 더 깊게 휘어지며, 빼꼼 내민 혀로 입술을 할짝이는 걸 보아 분명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리디아의 오해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깊어질 것 같네. 빠르게 넘어가야겠다.

       

       “마음 같아서는 이브 씨와 좀 더 느긋하게 떠들고 싶지만…오늘은 시간이 늦었잖아요? 저를 밤새 붙잡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슬슬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애플과 레몬에게 사정은 들으신 거죠?”

       

       “물론이랍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정말 유감이에요.”

       

       널 죽이겠다(X)

       미안하다(O)

       

       “미안해할 사람은 이브 씨가 아니죠. 그리고 사죄나 듣자고 여기에 앉아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것도 그렇군요. 지금 당장 드릴 수 있는 금액은 이 정도가 최선인데…만족하셨으면 좋겠네요.”

       

       이거 먹고 떨어져라(X)

       진짜 이거밖에 없다(O)

       

       생글생글 웃으며 작은 주머니를 건네는 이브. 입구를 열어보자, 안쪽에는 반짝이는 동전이 잔뜩 뒤섞여 있었다.

       

       골드, 실버, 쿠퍼가 전부 섞여 있어서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기 어렵네….

       

       엿 먹으라고 다 섞어서 가져온 게 아니라, 가게에 있는 현금을 급하게 긁어와서 이렇게 됐으리라.

       

       그래도 전부 세보면 이제껏 만져본 적 없는 거금일 거다. …그래봐야 46골드에는 한참 못 미치겠지만.

       

       사실 46골드가 큰돈이긴 하지만, 가장 오래 산 엘프이자 세계수의 적장녀로서 동족들에게 존경받는 이가 빌빌댈 정도는 아니다.

       

       당장 옆에 있는 크레이들 상회에 들러서 나 전직 여왕인데 46골드만 줘봐.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어줄 테니까.

       

       다만 이브는 그러지 않는다. 돈을 신봉하는 요즘 엘프들과 달리, 식물 키우는 게 더 중요한 구시대 엘프니까.

       

       오래 살았지만 그간 모은 돈은 대부분 동족을 위해 썼고, 약간 남은 재산으로 장사를 시작했지만 수완이 부족해 몇백 년째 말아먹고 있다…라는 설정이다.

       

       정말 급한 게 아니라면 주겠다는 돈도 거절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허름한 가게에서 나한테 사과하고 있을 리 없잖은가.

       

       잠시 고민하다 금화 2개만 따로 챙기고는 돈주머니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현금으로 받는 건 이걸로 충분해요. 대신 나머지는 다른 물건으로 받을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래 주시면 저야 좋습니다만…제 가게의 물건은 꽤나 흉흉하답니다?”

       

       너 따위가 감당할 수 있겠어?(X)

       위험한 것도 있으니 걱정된다(O)

       

       한쪽 손으로 볼을 감싸고 갸웃거리는 이브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이래 보여도 제가 보는 눈이 좀 있거든요. 얻는 게 더 크다면 사소한 문제는 감수할 생각이에요.”

       

       이브가 파는 물건은 다양하다. 영약, 장비, 마도구, 정령석, 하청 인력, 평범한 다육식물 등등.

       

       만물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것저것 다루고 있지만…대부분은 본인이 취미로 만든 걸 올려뒀을 뿐이다.

       

       그렇다 보니 제작 의도가 핀트에서 벗어났다거나,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있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 장사가 안되는 것도 그래서겠지.

       

       하지만 조금 전에 쌍둥이 엘프에게 들은 것처럼 성능 하나는 끝내준다. 달리 말해 쓰기 나름이라는 뜻.

       

       예를 들자면…이브의 큼직한 가슴 속에 숨어있는 저 목걸이처럼.

       

       이브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얼마나 해요?”

       

       “…어머?”

       

       이브가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천년간 친구도 연인도 없었다는 뜻은 천년간 쌓여있다는 뜻…

    히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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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

EP.23





       멍하니 눈앞의 인물을 살펴보았다.


       


       길게 늘어진 연녹색 머리카락은 하프업 스타일로 곱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그 매듭은 벼 머리로 이루어져 있다.


       


       어쩐지 티아라를 쓰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머리 스타일이다.


       


       거기에 외모는 또 어떤가. 청순하면서도 가련한, 그러나 굳은 심지가 엿보여 유약해 보이지는 않는 얼굴.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엘프스러운 아름다움이지만, 그 수준이 미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의 평균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다만, 턱 밑으로 이어지는 몸뚱이는 썩 엘프답지 않았다.


       


       군데군데 활동하기 편하도록 개량하긴 했지만, 여전히 과하게 하늘하늘한 것이 드레스에 가까운 엘프 전통복.


       


       그런데 펑퍼짐했어야 할 옷의 허리 부분에 코르셋을 감았다. 덕분에 강조된 몸매가 여실히 드러났는데, 이게 또 장난 아니다.


       


       노출에 개방적이고, 몸매를 자부심으로 여기는 판 대륙의 여자 기준으로도 어디 가서 절대 꿀리지 않을 정도.


       


       단아한 얼굴에 비하면 실로 단정치 못한 몸이다.


       


       물론, 일전에 슬쩍 보았던 리디아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슬렌더 체형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엘프치고는 꽤나 이례적인 사이즈.


       


       아무리 성욕이 적고, 연애에 소극적인 이 세계의 남자들이라도 저 정도면 먼저 말 걸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겠지.


       


       문제는 단 하나의 요소가 저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반전시킨다는 점이지만.


       


       “후후후. 이브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해야 하려나요?”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 항상 웃는 상인 실눈, 그리고 단순히 인사하는 것뿐인데 바짝 긴장하게 되는 의뭉스러운 말투.


       


       전신에 두른 수상할 정도로 수상한 분위기가 이브의 아름다움을 위압감으로 변질시킨다.


       


       실제로 방금까지 들떠있던 리디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바짝 긴장했을 정도.


       


       …하지만 나는 안다. 저거 그냥 순수하게 인사만 한 거라는 걸.


       


       주도권을 잡겠다거나, 너희는 나를 처음 보겠지만 나는 너희를 안다거나. 그런 의미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이를 확신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브 또한 엘리처럼 내가 설정한 캐릭터기 때문이다.


       


       아마 저 의문문으로 끝나는 인사 또한 너무 오래 산 탓에, 타인의 얼굴을 자주 헷갈려서 그런 것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이브는 현존하는 필멸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존재일 테니까.


       


       환대에 감사하는 의미로 이쪽 또한 방긋 웃어주었다.


       


       “그러네요!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요나라고 불러주세요! 안 좋은 일로 만났지만, 가능하면 이브 씨와는 친구가 됐으면 좋겠네요!”


       


       “어머? 요나처럼 어린 친구라면 언제든 환영이죠.”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키득이는 이브.


       


       네가? 나랑? 진심이야? 같은 뉘앙스를 풍기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거 맞다.


       


       지금은 조용히 살아가고 있지만, 이브는 알 사람은 아는 전설적…아니. 좀 더 정확히는 역사적 존재라고 해야 하나.


       


       무려 세계수가 미궁의 일부가 되어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꽃에서 태어난 하이엘프니까.


       


       어림잡아도 1,000살에 육박하는 존재. 그리고 앞으로도 1,000년은 더 살아갈 신화의 유산.


       


       그게 바로 이브 니르바나 이그드라실이다. …마지막 이그드라실이라는 성은 숨기고 사는 것 같지만.


       


       생각해 보라. 현재의 판 대륙은 한번 멸망했다가 재건한 문명. 그런데 이를 초창기부터 쭉 지켜봐 온 존재가 있다? 심지어 저런 수상쩍은 외모로?


       


       같은 엘프들이야 역시 세계수의 적장녀! 엘프가 위대하던 시절의 증거! 라며 열광하겠지만….


       


       그 외의 종족 입장에선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미친 흑막 노괴로 오해받기 십상 아닌가.


       


       절망하던 엘프가 자본주의를 떠받들며 대륙의 금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터라 부정하기도 힘들어졌고.


       


       심지어 이브에겐 세계수가 남긴 권능이 남아있다.


       


       하이엘프가 세계수와 엘프 사이의 소통자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체인 만큼, 무력이 아닌 통치를 위한 권능. 그렇다 하여 별거 아닌 권능이란 뜻은 아니다.


       


       이브에게 주어진 권능은 둘.


       


       정해진 수명이 다하기 전까지 절대 쇠락하지 않는 몸, 그리고 진위를 꿰뚫어 보는 진실의 눈이다.


       


       그래. 무엇을 숨기랴. 옛날 판타지 소설의 엘프가 가진 특성을 살짝 가져다 썼다….


       


       지금이야 양판소라며 이래저래 까이긴 하지만, 솔직히 나는 당시의 세계관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만큼 흥했던 거겠지. …너무 많이 봐서 피곤해졌다는 감상은 지울 수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러한 권능을 타고난 이브이기에 더더욱 주변에서는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수를 잃은 엘프들이 한창 절망하던 시기에는 여왕으로서 어찌어찌 동족을 이끌기도 했고.


       


       만약 이브가 없었다면 엘프는 자본주의에 눈을 뜰 때까지 버티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멸종까지는 안 갔겠지만…종족의 쇠퇴는 어쩔 수 없었겠지.


       


       그런 혈통과 업적을 지닌 만큼 원한다면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으나.


       


       이브는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을 엘프들이 세계수가 없는 세상에 적응할 때까지 도와주는 존재라고만 여겼기 때문이다.


       


       세계수가 그런 목적으로 이브를 남긴 것이기도 하고, 이브 본인도 그러길 원했다.


       


       통치를 위한 능력을 타고났다 하여 성격까지 타고난 것은 아니니까. 이브의 속내는 목가적이고 소시민적인 구시대 엘프의 그것이거든.


       


       툭 까놓고 말해, 겉으로는 흑막처럼 굴면서 사실은 집에서 혼자 다육식물이랑 대화하는 게 취미인 찐따라고 보면 된다.


       


       하여, 엘프들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서자마자 바로 은퇴해 버렸다.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이 식물이나 키우고, 소일거리 좀 하면서 세상이 점점 발전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인생의 낙인 무해함 그 자체고.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에 진심으로 기뻐한 이유도 간단하다.


       


       이브를 모르는 이는 그 수상한 분위기를 경계하고, 이브를 아는 이는 더더욱 경계하는 것이 그녀의 삶.


       


       천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친구도 연인도 없이 외롭게 살아온 인생이다. 누가 진심으로 만난 걸 기뻐하며 친근하게 대해주면 반가워할 수밖에.


       


       대충 외로운 어르신이 자기랑 잘 놀아주는 젊은이를 좋아하는 거랑 비슷하다.


       


       다만, 똑같이 내가 설정한 캐릭터라 하여 엘리처럼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상대냐고 묻는다면…그건 또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 배신하지 않는 조력자 포지션인 엘리와 달리 이브가 맡은 역할은 중간보스.


       


       그것도 초반에는 가까운 사이가 되어 감정적 교류를 쌓지만, 모종의 이유로 흑화한 끝에 결국 주인공 손에 죽는 비참한 보스다.


       


       피투성이가 된 채, 주인공의 품에 안긴 실눈 캐릭. 언제나 웃는 상이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지며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런 장면이 쓰고 싶어서 만든 캐릭터였거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주인공의 정신적 성장이고 나발이고 그냥 해피엔딩이나 구상할 걸 그랬다.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흑화하기 전인 지금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소리다. 아예 흑화를 막는다면 앞으로도 쭉 그러하겠고.


       


       대략적인 설정만 구상한 탓에 어떤 이유로 흑화하고 어떻게 세상을 불태우려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다.


       


       이는 현실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 대한 작가로서의 최소한의 책임임과 동시에,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세상에 떨어진 빙의자로서의 숨김없는 진심.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브와 친해져야 한다. 그리고 가까이서 무슨 문제가 생기는지 유심히 살피다, 위험할 것 같으면 즉시 해결해 줄 생각이다.


       


       각오를 다지며 이브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옆자리를 두드렸다.


       


       팡팡!


       


       “리디아 님도 어서 오세요.”


       


       “…됐어. 나는 그냥 서 있을게. 이번 일은 요나의 일이니까 내가 끼어들지 않는 게 맞아.”


       


       여전한 무표정. 하지만 평소보다 약간 경직된 입꼬리를 보아, 아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거겠지.


       


       리디아가 실력 좋은 모험가긴 해도 고위층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니 이브의 정체를 알아챈 건 아니겠지만….


       


       그런 거 몰라도 수상한 사람이라는 건 눈으로 보인다.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리라.


       


       리디아의 속내가 전해진 것은 아니겠으나, 저 말이 그냥 둘러댄 거짓이라는 걸 느낀 이브가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리디아라면 그 고결한 리디아 맞죠? 얼마나 고결하신 분인지 궁금했는데 아쉽게 됐네요.”


       


       언제까지 고결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X)


       대화를 나누지 못해 정말로 아쉽다(O)


       


       “아하하! 리디아 님은 부끄럼쟁이거든요. 나중에 손님으로 다시 올 테니, 그땐 좀 더 편한 분위기에서 이야기해 봐요!”


       


       “좋네요. 다음을 기대할 수 있는 삶이란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네 인생에 다음이 있을 것 같냐(X)


       정말 다시 와 주는 거지?(O)


       


       속으로 이브의 말을 번역해 가며 듣고 있는데,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심각해지는 리디아의 표정.


       


       반면 이브는 내가 한 번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 기쁜지 살짝 들뜬 기색이다.


       


       실눈이 한층 더 깊게 휘어지며, 빼꼼 내민 혀로 입술을 할짝이는 걸 보아 분명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리디아의 오해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깊어질 것 같네. 빠르게 넘어가야겠다.


       


       “마음 같아서는 이브 씨와 좀 더 느긋하게 떠들고 싶지만…오늘은 시간이 늦었잖아요? 저를 밤새 붙잡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슬슬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애플과 레몬에게 사정은 들으신 거죠?”


       


       “물론이랍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정말 유감이에요.”


       


       널 죽이겠다(X)


       미안하다(O)


       


       “미안해할 사람은 이브 씨가 아니죠. 그리고 사죄나 듣자고 여기에 앉아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것도 그렇군요. 지금 당장 드릴 수 있는 금액은 이 정도가 최선인데…만족하셨으면 좋겠네요.”


       


       이거 먹고 떨어져라(X)


       진짜 이거밖에 없다(O)


       


       생글생글 웃으며 작은 주머니를 건네는 이브. 입구를 열어보자, 안쪽에는 반짝이는 동전이 잔뜩 뒤섞여 있었다.


       


       골드, 실버, 쿠퍼가 전부 섞여 있어서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기 어렵네….


       


       엿 먹으라고 다 섞어서 가져온 게 아니라, 가게에 있는 현금을 급하게 긁어와서 이렇게 됐으리라.


       


       그래도 전부 세보면 이제껏 만져본 적 없는 거금일 거다. …그래봐야 46골드에는 한참 못 미치겠지만.


       


       사실 46골드가 큰돈이긴 하지만, 가장 오래 산 엘프이자 세계수의 적장녀로서 동족들에게 존경받는 이가 빌빌댈 정도는 아니다.


       


       당장 옆에 있는 크레이들 상회에 들러서 나 전직 여왕인데 46골드만 줘봐.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어줄 테니까.


       


       다만 이브는 그러지 않는다. 돈을 신봉하는 요즘 엘프들과 달리, 식물 키우는 게 더 중요한 구시대 엘프니까.


       


       오래 살았지만 그간 모은 돈은 대부분 동족을 위해 썼고, 약간 남은 재산으로 장사를 시작했지만 수완이 부족해 몇백 년째 말아먹고 있다…라는 설정이다.


       


       정말 급한 게 아니라면 주겠다는 돈도 거절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허름한 가게에서 나한테 사과하고 있을 리 없잖은가.


       


       잠시 고민하다 금화 2개만 따로 챙기고는 돈주머니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현금으로 받는 건 이걸로 충분해요. 대신 나머지는 다른 물건으로 받을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래 주시면 저야 좋습니다만…제 가게의 물건은 꽤나 흉흉하답니다?”


       


       너 따위가 감당할 수 있겠어?(X)


       위험한 것도 있으니 걱정된다(O)


       


       한쪽 손으로 볼을 감싸고 갸웃거리는 이브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이래 보여도 제가 보는 눈이 좀 있거든요. 얻는 게 더 크다면 사소한 문제는 감수할 생각이에요.”


       


       이브가 파는 물건은 다양하다. 영약, 장비, 마도구, 정령석, 하청 인력, 평범한 다육식물 등등.


       


       만물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것저것 다루고 있지만…대부분은 본인이 취미로 만든 걸 올려뒀을 뿐이다.


       


       그렇다 보니 제작 의도가 핀트에서 벗어났다거나,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있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 장사가 안되는 것도 그래서겠지.


       


       하지만 조금 전에 쌍둥이 엘프에게 들은 것처럼 성능 하나는 끝내준다. 달리 말해 쓰기 나름이라는 뜻.


       


       예를 들자면…이브의 큼직한 가슴 속에 숨어있는 저 목걸이처럼.


       


       이브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얼마나 해요?”


       


       “…어머?”


       


       이브가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천년간 친구도 연인도 없었다는 뜻은 천년간 쌓여있다는 뜻...

    히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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