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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

       야간침투수업 이후는 의외로 조용했다.

       

       아카데미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기절해 의무소에 실려갔다고 쑥덕댈 줄 알았는데, 학생들은 평소처럼 나이틀리를 동경하거나 두려워 하거나 뒤에서 경멸할뿐이었다.

       

       이것은 모두 마야 사제와 디안 교수 덕분.

       

       입이 무거운 마야 사제는 의무소에서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디안 교수는 ‘나이틀리는 수준이 높아 별도의 심화과정을 진행했다’라는 누구나 납득 가능한 소문을 퍼뜨렸다.

       

       때문에 나이틀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카데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게 다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

       

       “교수님. 일부러 저를 골탕먹이신 거죠.”

       

       그날 밤 의무소에서, 신성사제의 치료로 정신을 차린 나이틀리는 디안 교수에게 물었다.

       

       “콧대를 꺾어 놓으려고 말도 안 되는 곳으로 가게끔 하신 거잖아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 만약 그런 의도였으면 더 쉬운 방법도 많이 있는데.”

       “그럼 도대체 왜 이러신 건가요.”

       “그야 네가 그토록 되기를 원하는 요원들에게는 이게 일상이니까.”

       

       디안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나이틀리에게 현장에서 뛰는 요원들이 어떤 일들을 하는지 알려 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이틀리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흥미와 관심에서 경악과 공포로.

       

       “정말로… 그런 일들을 한다는 건가요…?”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 그리고 이건 통상적인 임무고 네가 말하는 ‘특임’요원은 좀 더 빡세지.”

       “어떻게 그런…. 아무리 특임대원이라도…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아니잖아요….”

       “하하!”

       

       디안 교수가 크게 웃자 환자일지를 쓰던 마야 사제가 머리를 들었다.

       

       “의무소에서 정숙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사제님”

       

       마야 사제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디안 교수는 숨죽여 낮게 웃으며 나이틀리를 돌아봤다.

       

       “네 말대로 같은 사람이지. 내게 가르침을 받는다면 너도 할 수 있다. 물론 네가 그럴 마음이 있어야겠지만. 그리고 오늘은 정말로 네가 결심이 서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었고.”

       

       나이틀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달빛에 의존해 기어 오르고 떨어지던 가파른 지형. 나뭇가지가 얼굴을 때리고 숯으로 칠한 안면위장은 쏟아지는 땀으로 이미 지워진 지 오래. 

       

       허벅지 근육은 터질 것만 같고 차오르는 숨에 입에서는 쇠맛이 느껴졌다. 

       

       그것은 지금껏 살면서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극한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피로였다.

       

       이런 것들을 매주 한번씩 해야만 한다고? 이걸 내가… 할 수 있을까…?

       

       사각사각, 마야 사제의 환자일지 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질 무렵, 나이틀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와서 물러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어.

       

       나는 무조건 현장의 요원으로 가야만 해. 그러지 않으면 아버지는 자기 권력을 이용해 어떻게든 나를 가문으로 빼낼 것이다.

       

       한번 도망쳤으니 두번 도망치는 건 불가능할 것이고 결국은 마음에도 없는 정략혼을 해야만 하겠지. 그것만은 안 돼.

       

       그리고 무엇보다도 디안 교수의 웃음을 보자 묘한 승부욕이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이틀리는 단 한번도 다른 이들 아래에 있어본 적이 없다.

       

       모두가 나이틀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굽실거렸고 나이틀리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디안 교수도 그럴 줄 알았다.

       

       희멀건한 외양에 매사에 웃음을 헤프게 흘리고 다니는 남자.

       

       나이틀리는 교수를 지금껏 타인에게 그래왔던 것처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분명 디안 교수를 휘어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당한 것은 나이틀리였다.

       

       디안 교수에게는 보이지 않는 단단한 벽이 있어서 도저히 그것을 뛰어 넘을 수가 없는 막막한 기분.

       

       단 한번도 느껴보지 않았던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감정이었고 그래서 나이틀리는 분노했다.

       

       저 잘생긴 교수의 얼굴에서 웃음을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다.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게 쩔쩔매게 만들고 싶었다.

       

       저 인간을 뛰어넘어 짓밟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개인교습을 받아야 하는데 정작 저 인간은 학생들 사이에서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다니. 한심하긴!

       

       이건 계약이행 불성실이야. 정식으로 항의를 해야겠어.

       

       “으윽…!”

       

       디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던 나이틀리는 어디선가 합류한 한 무리의 학생들에 밀려나 하마터면 넘어질뻔했다.

       

       “뭐야! 똑바로 안 보고 다녀?!”

       

       그러나 학생들은 디안을 보느라 나이틀리가 거기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듯하다.

       

       “비켜! 지나가게!”

       

       그 틈바구니를 파고 들려 했으나 나이틀리 혼자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

       

       오히려 누군가의 팔꿈치에 치여 휘청이며 밖으로 튕겨져 나가고야 말았다.

       

       어이가 없어 눈을 치켜뜨던 나이틀리는 곧 몸을 홱 돌렸다.

       

       지금 당장 디안에게 접근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나중에 직접 교수실로 찾아가야겠어.

       

       

       # # # # #

       

       

       드워프인 전투장비교수 카자다르가 간섭 아닌 간섭을 하면서 상점가 내부공사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

       

       결국 일주일도 되지 않아 공사가 마무리되고 상점들이 줄지어 입점했다.

       

       미용실, 빵집, 목욕탕, 잡화상, 여러 식당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디저트 카페까지.

       

       아직 상점가로 지정한 건물 두 채를 전부 채우지는 못했지만 그거야 차차 채우면 되니까.

       

       일부 층은 이론학과의 실습장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실습장은 주로 학용품과 실습에 필요한 물건들을 파는 상점으로 만들었고 그 관리는 이론학과의 교수 중 한 명이 전담한다.

       

       그리고 학생들을 조별로 나눠 돌아가면서 일과 후 상점 운영을 도맡게 하는 것이다.

       

       여튼, 이렇게 해서 1차로 상점가 조성이 완료되었고 나름대로 행사도 거행했다.

       

       두 상점가 건물이 마주보고 있는 가운데 도로에 차려진 단상.

       

       전 교직원과 학생들, 그리고 입주한 상점의 주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키르린 교장이 단상에 올라 헛기침을 했다.

       

       “에, 그… 안녕하십니까, 교장 키르린 네메라입니다.”

       

       마법대응교수 오렌디가 마법으로 키운 키르린의 목소리가 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울려 퍼졌다.

       

       “오늘은 우리 특수임무 아카데미에 처음으로 상점가가 들어온 날입니다. 어, 이러한 변화가 여러분의 학교생활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

       

       키르린 교장이 주저하다가 단상 바로 앞에 서있는 나를 가리켰다.

       

       아이고, 교장님. 그러지 마세요.

       

       “여기 전투수석 디안 교수님께서 특히 크게 기여를 해주셨습니다. 디안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와아아아아아!!”

       

       키르린의 교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학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키르린 교장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단상에서 내려왔고 마법대응교수 오렌디는 손을 현란하게 휘저어 인파의 머리 위에 폭죽마법을 터뜨렸다.

       

       “디안! 디안! 디안!”

       

       파방- 파방- 형형색색의 마법불꽃이 쏟아지는 가운데 학생들이 내 이름을 연호하자 나는 어쩔 수 없이 학생들에게 손을 흔들어 줘야만 했다.

       

       “누가 보면 수석교수님이 교장인 줄 알겠어요. 어머, 말실수.”

       

       침투교수 리나가 저만치에 있는 키르린을 힐끔 보며 입을 막았다.

       

       “좋아. 이렇게 된 거 오늘 기념으로 내가 쏜다. 전투학과 전원 디저트 카페로 집합!”

       “야호, 신난다!”

       

       내 선언에 전투학과 교수를 비롯한 말단조교들까지 잔뜩 들떠서 디저트 카페로 돌격 아닌 돌격을 했다.

       

       “교수님! 디안 교수님! 잠깐만요!”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다급하게 부르기에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빨리 가자! 브로그는 망고 케이크가 먹고 싶다!”

       

       비무장전투교수인 오크 브로그가 나를 마구 앞으로 밀었기 때문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급한 일이면 나중에라도 찾아오겠지, 뭐.

       

       “저희도 카페 어떻습니까, 수석교수님?”

       “그거 좋네요.”

       

       이론학과 교수 중 한 명이 묻자 이스메라 교수가 눈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아까 잠깐 보고 왔는데 진열대의 디저트들의 어찌나 예쁘고 먹음직스럽던지 채식주의자인 저까지도 군침이 돌 지경이더군요.”

       “아, 하하….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 # # #

       

       

       “교수님! 디안 교수님! 잠깐만요!”

       

       행사가 끝나자마자 나이틀리는 사람들을 밀치며 디안 교수를 소리쳐 불렀다. 면담 요청을 위해서였다.

       

       인기 좀 얻었다고 자만할 게 아니라 어서 개인교습 진도를 나가야 할 거 아니냐, 이거 계약위반이라고 강하게 항의할 생각.

       

       그러나 디안 교수는 덩치 큰 브로그 교수가 등을 밀고 가는 통에 나이틀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안 돼! 멈춰요!”

       

       인파에 이리저리 치이며 나이틀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상점가 공사가 시작된 이후 나이틀리는 디안 교수를 제대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디안 교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공사현장을 기웃거리며 참견을 하느라 교수실에 붙어 있지를 않아서.

       

       저 지독하게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인간은 단 한 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기에 나이틀리는 뭔가 말을 걸려다가도 포기해온 것.

       

       개인교습은 둘만의 비밀이었기에 함부로 제삼자가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오늘 행사가 끝나자마자 복귀하는 디안 교수를 붙잡아 최소한 면담 약속이라도 잡으려고 했는데…!

       

       어찌어찌 사람들을 뚫고 나간 나이틀리는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북적북적한 디저트 카페의 노천 테이블에 디안 교수가 앉아 있었다. 다른 교수들, 그리고 전투학과 조교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디안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나이틀리는 곧 결심을 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기, 디안 교….”

       “수석교수님! 음료는 뭐 드실래요?”

       “아, 그거 내가 메뉴판 보고 직접 고를게!”

       

       나이틀리가 막 다가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디안이 벌떡 일어나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따라 들어 가려는데 갑자기 오크 교수 브로그가 덩달아 일어나면서 길이 완전히 막혀 버렸고.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기에 나이틀리는 입술을 깨물며 몸을 돌려야만 했다.

       

       도대체 같은 아카데미 안에 있으면서 왜 이렇게 말 걸기가 어려운 거야?!

       

       저 인간은 지치지도 않나, 어떻게 일과 내내 저러고 있지? 미친 인간 같으니.

       

       씩씩대며 강의동으로 가던 나이틀리는 문득 어떤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

       

       그래…. 일과중에 바쁘다면… 일과 후에 만나면 되는 거잖아?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했지…?

       

       

       # # # # #

       

       

       그날 늦은 밤.

       

       한 명의 학생이 망토를 두르고 기숙사를 나섰다.

       

       후드까지 뒤집어쓴 학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빠른 걸음으로 건물의 그림자로 몸을 숨겼다.

       

       잠시 또 동태를 살피다 다음 건물 그림자로 또 다음 건물 그림자로.

       

       그렇게 징검다리를 건너듯 이동한 학생이 도착한 곳은 아카데미 남쪽의 교직원 구역.

       

       교직원 구역은 기숙사 몇 동과 교수 및 기혼자들을 위한 주택들이 늘어선 일종의 아카데미 속 작은 마을이다.

       

       구역 초입 이정표 아래에 웅크리고 앉은 나이틀리는 잠시 방향을 가늠하고는 몸을 숙이고 빠르게 달려갔다.

       

       졸업1반 반장의 권한으로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이미 디안 교수가 지내는 주택의 위치는 파악해 놓은 상태다.

       

       아마 저기 이 층 짜리 단독주택인 것 같은데.

       

       그쪽으로 가면서 나이틀리는 설마 디안이 교수들을 불러서 정원에서 바베큐 파티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디안 교수의 주택은 물론이고 구역 어디서도 그런 떠들썩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주택의 정문에 도착한 나이틀리는 명패에 ‘전투수석교수 디안’이라 써진 것을 확인하고는 담벼락에 몸을 바짝 붙였다.

       

       일단 안쪽 상황을 보고 그 다음에 초인종을 울리자. 혹시나 다른 학생이나 교수가 있으면 곤란해.

       

       담벼락 너머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던 나이틀리는 어디선가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놀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사각사각사각사각. 그것은 마치 펜으로 종이에 글을 쓰는 듯한 소리로 나이틀리의 옆에서 들리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악!!”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린 나이틀리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분명 의무소에서 숙식하고 있을 신성사제 마야가 서있었다.

       

       마야 사제는 어디서 구했는지 반듯한 주춧돌을 발판 삼아 올라가 담벼락 안쪽을 힐끔거리며 손에 쥔 일지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저건… 의무소의 환자일지…?

       

       나이틀리가 비명을 지르자 마야 사제가 무심한 눈으로 나이틀리를 돌아 보더니 주춧돌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사제복 안에 환자일지를 넣으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주인님!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요! 도둑이 들었나 봐요!”

       

       그때 안쪽에서 여자애의 외침과 함께 우당탕탕 발소리가 들리며 정문이 벌컥 열렸다.

       

       “도둑이야!”

       

       디안 교수의 하녀인 올리시아가 손에 무쇠팬을 쥔 채 빠르게 주변을 살피다 담벼락에 주저앉은 나이틀리와 눈을 마주쳤다.

       

       “엥…?”

       “아….”

       

       나이틀리와 올리시아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야, 올리시아. 호들갑 떨지 마라. 설마 아카데미에 도둑이 들겠냐?”

       

       뒤늦게 디안이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마 봄철에 발정난 고양이… 가 아니고….”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눈이 동그래진 디안에게 나이틀리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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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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