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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0

     

    “하아.”

     

    아셀라가 바닥에 쓰러져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요하다. 절대 결계라고도 부를 수 있는 6위계 공간 마법, ‘결투장’ 덕에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사르르, 그녀의 머리칼이 새하얗게 새어갔다.

     

    이번에는 새치 정도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아셀라의 정수리에서 뻗어 나온 머리칼의 3할은 색이 달라져 있었다.

     

    남은 마나가 표면을 타고 흘러 윤기를 더해, 마치 은발처럼 보이게 한다.

     

    “…힘들어.”

     

    몸을 일으킬 힘도 없었기에 아셀라는 기어서 리치의 잔해로 향했다. 그가 빼앗았던 자신의 지팡이를 겨우 손에 쥐고는 소중히 품에 안았다.

     

    “후우.”

     

    7위계 신창.

    대륙이 있기도 전에 이 차원을 빚은 고대신의 영역에서 한 자루 무기를 빌렸다.

     

    그만한 마법을 썼으니 지불한 대가도 어마어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얼음으로 레플리카를 빚을 걸 그랬다. 위력은 비슷했을 텐데.

     

    “…지팡이를 가져가다니.”

     

    그런 전투법도 있었다. 하나 새롭게 배웠다.

     

    “쉴 틈은 없어.”

     

    아셀라는 휴식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5분 만에 흙먼지 묻은 몸을 일으켰다. 리치가 망가뜨린 결투장의 술식부터 고쳤다.

     

    “하나 넘어갔어, 다음은….”

     

    아셀라는 지치지도 않고 마법을 시전했다.

     

    천리안.

     

    시야가 급변하고, 그녀는 시간의 나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여기가 방금 지난 지점이지.”

     

    리치와의 대결은 분기점이었다. 그에게 패배했다면 언데드 대군이 왕국까지는 진격했을 것이고, 전황은 연합군에게 크게 불리해졌을 터였다. 아니, 연합군이 와해되어 제국 홀로 항쟁하게 됐을지도 몰랐다.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중요한 분기점.

     

    그 혼란 속에서 라스가 살아남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리치에게 질 가능성도 있었어.”

     

    자세히 보면 분기점에서 갈린 시간선의 두께가 다르다. 9대 1 정도.

     

    리치의 승률이 1할뿐이라는 말은 허세로 내뱉은 게 아니었다. 그가 방심하지 않았다면 신창을 쓸 새도 없이 패배했을지도 몰랐다.

     

    자신더러 강한 마법사느니 치켜세우며 가짜 겸손을 떨어댈 때부터 질 일은 절대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남은 분기점은… 열 개.”

     

    저것만 돌파하면 라스를 데려다줄 수 있다.

     

    그가 그토록 도달하고 싶었던 장소로.

     

    소위 ‘굿엔딩’으로.

     

    모든 장면을 살필 수는 없었다. 천리안은 많은 내용을 살필수록, 아셀라에게 가까운 미래를 볼수록 대가를 많이 지불해야 했다.

     

    그녀가 봤던 라스의 죽음은 이미 여기와 큰 줄기가 다른 시간선에서 있었던 사건이었기에 지불할 양이 많지 않았다.

     

    당장 가까운 분기점의 내용을 모두 살피려면 수명을 몇십 년은 바쳐야 할 터였다. 그랬다간 신창 같은 강력한 마법을 더 쓸 수 없게 된다.

    위계의 문제도 있었고.

     

    “언제인지만 알면 충분해.”

     

    ―화악!

    현실로 돌아온 아셀라는 텁텁한 전장의 공기를 맛보며 입꼬리를 찢었다.

     

    “조금만 기다려, 라스. 내가 데려다줄게.”

     

    아셀라가 결투장 밖으로 걸어나가고, 곧 황금의 공간이 닫혔다.

     

     

     

    ***

     

     

     

    “황녀님이 나오셨습니다.”

     

    용사 파티가 두 마리 째 거미 군주를 이어 쓰러트렸을 때 타냐가 말했다.

     

    “적군이 눈에 띄게 약해졌소!”

    “통제도 잃은 모양인데.”

     

    앰브로시아와 발렌이었다. 그게 알려주는 바는 명확했다.

     

    “아셀라가 이겼어.”

     

     

    [No. 022 : 마법 승부 12% → 0%]

    [엔딩이 삭제되었습니다.]

     

     

    물론 아셀라는 따라올 사람이 없는 강한 마법사다. 하지만 그건 카밀라의 혼을 제거하지 않아 재능이 온전했을 때의 이야기다.

     

    설마 혼자서 리치를 토벌하다니.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모습이 너무 멋졌기에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적군의 기세가 약해졌다! 보병, 출격하여 적군을 토벌해라!”

     

    장군이 정확하게 판단했다. 기회를 잡은 연합군 본대가 성문을 열고 역공에 들어간다. 누가 봐도 압도적으로 이쪽이 우위였다.

     

    “단장, 아셀라를 구출하러 가야 해.”

     

    전투를 마치고 나온 아셀라는 강 너머, 적진 한복판에 있었다. 언데드 대군이 그녀를 향해 몰려든다.

     

    “길을 뚫을게요!”

     

    리셰가 선행하고 용사 파티가 뒤를 쫓았다. 아셀라를 향해서였다.

     

    ―콰앙!

    더 힘을 아낄 필요도 없겠다, 타냐도 오러를 방출해서 적군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길이 열린 틈을 타 나는 다리에 박차를 가했다.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언데드에게 마법을 쓸 생각도 못 하고 있는 아셀라.

     

    마나를 다 써버렸나.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지친 기색을 숨기려는 태도다.

     

    “황녀님!”

     

    단숨에 그녀 앞에 달려들어 보호막을 펼쳤다. 뛰어들던 언데드가 신성력에 막혀 튕겨나간다.

     

    “파우스트.”

     

    나는 그녀에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을 내밀었다.

     

    “잡고 따라오시겠습니까?”

     

    아셀라가 코웃음을 쳤다.

     

    “의사 아니더냐. 들것을 가져왔어야지.”

     

    “그럴 여유가 없어서요.”

     

    “지금만 허락하마. 본녀를 업고 전장을 이탈해라.”

     

    허가도 나왔겠다, 나는 아셀라를 바로 들쳐업었다.

     

    ‘근력강화, 3단계.’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우리에게 뛰어드는 언데드는 날아오는 화살에 머리가 꿰이고, 검에 반토막나고, 내 신성주문에 시야를 잃고 돌아선다.

     

    “승리가 코앞이다! 검을 늦추지 마라!”

     

    장군의 외침을 들으며 우리는 치열한 전투의 한복판을 뚫고 성벽까지 귀환했다.

     

     

     

    ***

     

     

     

    리치가 죽어 힘을 잃은 언데드 군대는 연합군이 성벽에서 그야말로 불도저처럼 밀어버렸다.

     

    마지막 남은 거미 군주도 성수를 이용해 토벌했다.

     

    워낙 숫자가 많아서 그들을 전멸시키려면 앞으로 며칠은 더 걸리겠지만, 연합군의 숫자도 그만큼 많다.

     

    저들은 언데드 군을 통솔할 수 없으니, 이쪽은 손실을 최소화하며 교대로 상대하면 승리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다른 분들은 소녀가 치유하겠소. 파우스트, 전하를 부탁하오.”

     

    한숨 돌린 우리는 정비에 들어갔다. 나는 아셀라의 마나부터 회복시켜주고 상처 부위를 세척한 후 꼼꼼히 소독하고 치료했다.

     

    “마력회로가 일부 타버렸습니다. 당분간은 안정하십시오.”

     

    어지간히 강력한 마법을 쓴 모양이다.

    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으며 내게 진료를 받던 아셀라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럴 여유가 없단 건 잘 알잖니. 용사 파티가 한가롭게 누워있을 틈이 어디 있겠어.”

     

    “언데드 잔당을 토벌할 며칠은 여유가 있습니다. 마왕군은 병력을 보충하고 이후엔 마족군으로 공격해오겠지요. 언제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천왕들을 미리 토벌한 덕에 적어도 상대해야 할 적에 악마 군단이나 흡혈귀 하수인 부대가 없는 건 다행이다.

     

    원래는 악마 군단은 북쪽, 흡혈귀는 인간계 내부에서 발생했기에 텔레포트 게이트로 여기저기 다녀야 해서 정신이 없었다.

     

    마왕군도 그만큼 마족군을 더 충원했겠지만, 우리도 연합군의 숫자가 훨씬 많으니 대응할 수 있다.

     

    나는 아셀라의 치료를 이어가며 말했다.

     

    “휴식은 필수입니다. 바로 다음 전투에 들어가면 분명 죽습니다. 당분간 금지하겠습니다.”

     

    “왜 네가 그걸 결정해. 난 싸울 거야.”

     

    “지금 파티에 의사는 저 한 명이죠. 사실상 주치의라고 생각하시고 말을 들으십시오.”

     

    “…하, 누구 스승 아니랄까 봐.”

     

    아셀라가 고개를 젓고는 팔을 이마에 올렸다. 늘 강한 척하는 그녀니까 힘든 걸 숨기고 있을 게 뻔했다.

     

    그래도 일단은 말을 들을 생각인가 보다. 다행이네.

     

    그녀를 보고 있으니 조금 위화감이 있었다.

     

    “머리카락에 은발이 늘어나셨군요.”

     

    “응? 아, 이거.”

     

    대답하지 않는 아셀라.

     

     

    ―――――――――――

    · 이름 :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

    · 체력 : 24 / 31

    · 상태 : 마나 부족, 치료 중

    · 부상 : 화상 >>이력을 펼칩니다.

    · 위치 : 마력회로

    · 기분 : 그리움

    ―――――――――――

     

     

    갑작스런 탈색은 건강에 있어 좋은 신호는 아니다. 하지만 진단에 심각한 병은 잡히지 않고.

     

    마법에 관련된 건가.

     

    “은발은 강한 마녀의 상징이라고 하죠.”

     

    “그래. 리치와 싸우면서 경지가 올랐어. 그뿐이야.”

     

    심드렁한 말투였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담당의에게 감춘 병력은 없도록 해주시죠.”

     

    “전부야.”

     

    아셀라가 차갑게 말했다.

    머리카락에 대해서는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처방을 마치고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전투 고생하셨습니다. 리치는 강력한 마왕군의 간부였습니다만, 황녀님께서 토벌하셨으니 용사 파티에는 희소식입니다.”

     

    “이겨야지, 마왕도.”

     

    “고트베르크도 기뻐할 겁니다. 그도 마왕군 토벌에 힘쓰고 있으니까요.”

     

    내 얘기가 나오자 아셀라가 이제야 관심을 보이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래? 많이 기뻐할까?”

     

    “물론입니다. 덩실덩실 춤추다가 넘어져서 뒤통수가 깨질 정도로요.”

     

    “풋.”

     

    내가 골탕 먹은 장면을 상상하고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셀라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여기서 싸우고 있다는 건 비밀이니까. 리치를 혼자 쓰러트렸다고 알면 놀라서 까무러치겠지.”

     

    “예. 먹던 사탕이 입에서 흘러나오겠지요.”

     

    “…후후, 그래.”

     

    아셀라가 즐거워하며 슥 몸을 나를 향해 돌리고는 물었다.

     

    “파우스트, 그대는 라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했지.”

     

    “네. 그와는 오랜 시간 함께했습니다. 지금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흐응… 그럼 있잖아.”

     

    아셀라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빙글, 손가락으로 돌렸다.

     

    “라스, 혹시 은발도 좋아하니?”

     

    나는 잠깐 대답을 망설였다.

     

    머리색이 어떻다든가 하는 건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뭐….”

     

    나는 턱에 손을 얹으며 진지하게 고민한 후 대답했다.

     

    “황녀님이시라면 어떤 머리칼을 하셔도 좋아하리라 봅니다.”

     

    아셀라는 내 대답은 마음에 든 모양이었지만 약간은 체념한 미소를 지었다.

     

    “듣기 좋은 말은 됐단다. 라스가 나를 그렇게… 좋아할 리가 없거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알려고 하지 말아라.”

     

    “그가 황실을 떠나 황녀님께서 도망친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러고 싶을 게 당연했지. 라스가 그동안 내게 당한 일을 생각하면.”

     

    그야 황실에서 아셀라에게 불합리한 명령을 받은 적은 꽤 있다.

    지칠 정도로 심하게 내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해오기도 했고.

     

    그래도 그만큼 좋은 기억도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만 자고 싶구나. 얘, 파우스트. 다음에 라스에 대해 좀 더 들려주련.”

     

    그리 말하며 아셀라가 덮고 있던 이불을 꽉 붙잡으며 품 안에 말아 넣었다. 꼭 껴안을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몸짓이었다.

     

    “알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나는 촛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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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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