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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0

     공동여왕이라는 단어가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한 나라에 두 명의 왕은 존재하지 않는 법인데, 지금 두 명의 왕이 생겼으니까.

     왕권이 반으로 나뉘었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라는 국왕이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이 왕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법적인 문제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 처리했다.

     왕국의 관습법이나 전통에 ‘왕이 두 명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법칙도 없었다.

     일종의 꼼수이자 억지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무슨 재앙 같은 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노스트럼 입장에서는 세인트 지오의 머리 위에 왕관이 걸려있는 게 재앙 그 자체.

     하지만 세인트 지오가 갑자기 죽어버린다면 모두가 곤란해질 상황이 발생할 게 뻔했기에,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마도자동선을 타고 전국을 유람하며 자유롭게 즐기게끔 놔두기로 결정했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은 순순히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의 왕위 등극을 받아들였다.

     마치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 결과.

     나리아는 공주이자, 왕녀이자, 여왕이 되었다.

     그 누구도 부정하거나 반박할 수 없었다.

     안 그러면 노스트럼 왕국은 제로스 바르셀과도 같은 자에게 홀려서 왕국을 내전으로 멸망시킬 뻔한 세인트 지오가 계속 다스려야 하는 상황처럼 되었고, 누군가는 왕좌에 올라서야만 했으니까.

     책임은 막중하되, 호사는 누릴 수 없는 자리.

     

     국가를 떠받들어야 할 자리에 앉은 나리아에게 있어, 지브롤터와의 ‘협상’은 모든 왕국의 귀족들이 지켜보고 있는 여왕으로서의 정치적 데뷔 무대다.

     과연 그레이 지브롤터를 상대로 협상을 제대로 이끌어낼 수 있을까?

     그것이 현재 왕국 귀족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초유의 관심사.

     만일 협상만 제대로 타결된다면, 노스트럼은 다소 기형적인 상황이 되었더라도 노스트럼 왕국 그 자체를 유지할 수는 있게 되리라.

     몇몇 이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협상이 결렬되어 지브롤터가 바르셀로나까지 가진 채로 홀라당 제국으로 넘어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

     노스트럼을 떠날 수 없는 이들.

     제국을 증오하거나, 제국으로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

     노스트럼이 그저 무능왕이라는 특이점이 사라지고, 누군가의 말대로 ‘위대한 노스트럼’이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으로부터 펼쳐지기를 바라는 이들.

     그들은 바라고 있다.

     나리아.

     그레이.

     두 사람의 결합을. 

     * * *

     “우웩.”

     내가 회귀한 시점부터, 약혼이라는 단어는 어느정도 노스트럼 사교계에서 간혹 언급되기도 했다.

     단지 내가 지금까지 헛소리로 치부를 했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런 헛물을 들이켜는 이들의 오해를 적극적으로 해소하는 걸로 약혼 이야기가 더는 사교계에서 떡밥으로 돌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어떤 이들에 의해, 약혼 이야기가 다시 수면 위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거 아십니까? 나리아 공동왕을 그레이 지브롤터와 결혼 시켜야 한다는 이야기.”

     “알고 있으니까 굳이 언급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습니다만.”

     “저도 싫습니다. 하지만 그런 음해와 중상모략을 펼치는 이들이 있으니,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리아도 싫어하고 나도 싫어하고, 서로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 싫어하는 걸 아카데미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랬으나.

     “그들에게는 개인의 감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스트럼 왕가와 지브롤터가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것이 더 중요할 뿐이죠.”

     “거지같은 충성병자들….”

     충성병자들에게는 왕가와 지브롤터가 맺어진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지브롤터가 노스트럼을 뒤집어 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발등에 불 떨어진 건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그 방법으로 나리아 여왕과 약혼을 맺게 하려고 하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말이죠.”

     나도 나리아도 서로를 상대로 약혼을 할 생각은 없다.

     “하나 묻겠습니다. 아스타시아와 약혼할 생각은 있는 겁니까?”

     “아스타시아가 물어보라고 시켰습니까?”

     “그런 식으로 답변을 회피하는 걸 보니까 뭔가 미루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나리아.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약혼은 할 겁니다. 영지전 일어나기 전에도 분명히 했던 부분이고.”

     당사자도 알고 있다.

     “나리아. 이건 진짜로 비밀입니다.”

     “약혼을 미루고 싶어한다는 것?”

     “귀 좀.”

     “아얏.”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리아의 머리를 붙잡은 다음, 그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으으읏.”

     나리아는 질색을 하며 몸서리를 쳤고, 나는 바로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알겠습니까? 비밀로 해주십시오.”

     “그러도록 하죠. ‘방법’만.”

     “그걸로 됐습니다.”

     나리아가 괜히 나를 골탕먹이겠다는 의도로 아스타시아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다.

     ‘왕국 사람들도 차라리 나리아처럼 이해했으면 좋으련만.’

     아스타시아와의 약혼은 하겠지만, 약혼식에는 좋은 날과 시간,장소와 분위기가 있다.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약혼식을 거행했다가는 무조건 사고가 나기 마련.

     “약혼식. 어떻게 할지 기대하겠습니다.”

     “예. 빠른 시일내로 할 건 확실하니까, 나머지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괜히 아스타시아의 드레스에 암살자들의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으니.”

     약혼식.

     그냥 하기에는, 여러모로 쉽지 않다.

     “암살이나 저격 위험 때문에 그런 거라면, 차라리 제국의 황궁에 가서 약혼식을 하는 건? 아, 황제랑 만나기 싫어서 그건 좀 싫은 겁니까?”

     “아스타시아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황궁에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러면 정치적으로 나리아 공동왕의 입지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이게 다 사랑에 미친 정치적 남동생을 장가보내기 위한 누님의 눈물겨운 희생이 아니겠습니까?”

     “퍽이나.”

     “…….”

     나리아가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저것은 내가 험한 말을 한 것 때문이 아니라-

     “저를 못 믿는 겁니까?”

     내 말 속에 담긴 불신과 근심을 나리아가 눈치챘기 때문.

     “그레이 지브롤터 바르셀로나 백작이 제국 황녀와 약혼을 했다고 해서, 그로 인한 노스트럼 왕국 귀족들의 걱정을 제가 넘어서지 못할 것 같습니까?”

     “카르멘 왕비와 윈체스터 대공이 돕는다고 해도, 아무래도 조금 걱정되는 게 사실이죠.”

     과연 나리아는 노스트럼 왕국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간신히 지브롤터를 후작가로 노스트럼에 주저앉혔지만, 아직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근심과 걱정, 불안감이 가득하죠. 예. 언제든지 지브롤터가 왕국이 아닌 제국의 편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불안감.”

     나는 티테이블에 놓여있는 양피지 하나를 펼쳤다.

     “노스트럼의 지도가 대격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브롤터 영지만큼 왕국의 영토가 줄어드는 거?”

     “지브롤터 영지만 그러하겠습니까?”

     나는 지브롤터의 위아래를 가리켰다.

     “세빌리야. 세이레네. 그리고 그 이외에 수많은 영지들. 이미 친제국적인 모습을 보이던 가문들이 이제는 완전히 제국파로 돌아섰습니다.”

     오염지대의 옆에 있는 세빌리야의 경우, 소드마스터 로버트를 배출한 지역이라면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고 있다.

     협곡이 열리기 전부터 해로를 통해 교역을 한 세이레네의 경우, 아예 해협 사이에 거대한 다리를 지어서 교류하자면서 말도 안 되는 사업 예산을 요구하며 여론을 모으고 있다.

     “세빌리야처럼 지브롤터에 비비려고 하는 이들은 그나마 양반이고, 아예 세이레네처럼 자체적으로 제국과의 연줄을 만들려고 하는 이들도 존재하죠.”

     “그들은….”

     “당연하게도, 저와 아스타시아의 약혼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쪽과는 정 반대로군요.”

     왕국이 반으로 갈라졌다.

     “제국과 먼 곳에 있을수록 친 노스트럼파. 제국과 가까울수록 제국파. 하, 정말이지.”

     그레이 지브롤터가 왕국의 공동여왕과 약혼해야 한다는 왕국파.

     그레이 지브롤터가 제국의 황녀와 약혼해야 한다는 제국파.

     고작 약혼일 뿐이지만, 그 약혼이라는 단어에 걸려있는 정치적 계산은 너무나도 복잡한 상황이다.

     “그레이 백작. 그대는 그 때, 저를 여왕으로 만들어준다고 했습니다.”

     “그랬죠.”

     “노스트럼의 곳간이 비고 나라가 망하고 왕성에 거미줄이 펼쳐지고 곧 망할 나라가 되게 생겼지만, 어쨌든 여왕이 되기는 되었죠.”

     “…….”

     결국.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며, 나리아도 바보는 아니다.

     “적어도 저는 이런 상황에서, 최소한의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명목으로?”

     “제가 있어야 노스트럼이 유지가 될 거 아닙니까.”

     “…….”

     “다 무너져내려가는 집을 이어받고 그걸 이끌고 나가게 생겼는데, 최소한의 도움은 요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좋은 인재들 알려줬잖아요.”

     폭삭 주저앉을 집에다가 배라도 굶지 말라고 음식 좀 보내줬더니, 이제는 가구랑 식기까지 바꿔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브롤터 협곡 장학생. 그들은 몹시 우수한 이들입니다. 제국으로 떠난 유학생들이나 어학연수, 연구출장 등으로 제국 교육부로 간 이들은 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뒤로는 비리를 저지르는, 이른바 황금여명 같은 이들이죠.”

     나는 지난 1년 반 가량, 오로솔 아카데미에서 옥석을 가려내어 나리아가 챙길 수 있게 만들었다.

     “딸기 케이크에 올려진 딸기 중 안 썩은 것들을 골라내어 먹여줬더니, 이제는 아예 케이크를 처음부터 만들어달라고 그러시는 겁니까?”

     “이왕이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으면 좋겠는데. 아앙. …알겠습니다. 안 할테니까, 지팡이는 내려놓고.”

     약간의 경고를 날리자, 나리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가 축 내려갔다.

     “그레이 지브롤터가 재상으로 일해주면 참 좋을텐데.”

     “싫습니다.”

     “윈체스터 대공께서도 그레이 지브롤터를 옆에 두고 일하게 해야 나라가 잘 돌아갈 거라고 했는데.”

     “제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어머니께서도 그레이를 잡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 잡는다는 표현이 약혼이나 재상이나 그런 게 아니어야하겠죠.”

     “……후. 어쩔 수 없군요.”

     나리아가 한숨과 함께,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것만은 꺼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계약서?”

     고급스러운 양피지.

     제국의 기술이 하나도 손을 타지 않은, 순수한 노스트럼의 기술만으로 만들어진 최고급 양피지.

     심지어 그 겉은 마석가루가 뿌려진 금줄에 마법진까지 새겨져, 그냥 겉으로 보면 종이여도 실상은 마법적 구속력을 가진 특수계약서였다.

     “약혼합시다. 우리.”

     “…….”

     “이 조건이면 되는 겁니까?”

     “……흠.”

     나는 나리아가 펼친 계약서의 내용을 찬찬히 살폈다.

     사실상 내가 내 이름만 서명하면 되도록 나머지 모든 조항들이 적혀있는 계약서.

     “이거, 대외적으로 공표할 거죠?”

     “물론입니다. 대대적으로 알릴 겁니다. 어떻습니까?”

     “……확실히.”

     나는 책상에 놓여있는 깃털펜을 들었다.

     “이런 약혼이라면, 얼마든지.”

     나는 그대로, 내 이름을 적는 칸에 정자로 서명을 했다.

     * * *

     “그래서 나리아랑 약혼했다고요?”

     “아스타시아.”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닌데, 벌써 그렇게 약혼을 해버리다니!”

     “다 알면서 자꾸 그러면 저 화냅니다.”

     “헤헷.”

     약혼에 관한 마법적 계약이 이루어졌다.

     나리아와 그레이.

     먼 훗날.

     나리아의 자식과 그레이의 자식이 성인이 되었을 때 서로가 동의한다면 20살에 결혼하기로.

     “그런데 나리아는 누구랑 결혼을 하는 거죠?”

     “결혼 안 하고 자식 안 낳으면 계약은 미뤄지는 거죠.”

     “…….”

     “뭐, 나리아도 다 짝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찌됐든 약혼을 맺었다는 게 중요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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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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