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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1

   EP.231

     

   가능하다면 모든 화신들과 포탈을 통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탑의 시험을 받는 주체가 나였기에 포탈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띠링.

     

   [탑의 17층에 입장합니다.]

     

   단발적인 종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

     

   하지만 나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아래를 제외하면 완전한 순백색의 공간이 나를 맞이했기에 곧장 반응할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익숙하다.’

     

   지금까지 탑을 오르며 이런 공간을 접한 적이 몇 차례나 있었다.

     

   10층에서 11층을 올라가던 그날, 탑의 주인인지 신인지 모를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리고 튜토리얼이 시작된 초창기. 나에게 주어졌던 개인 임무로 스카이 게임즈의 20층을 올랐을 때가 그러했다.

     

   낯설지 않은 광경에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와는 달리 나의 신형이 또렷하게 보였다. 나의 마력 또한 주변의 압박감을 충분히 견뎌 내고 있었고 오히려 나의 존재감이 주변으로 흘러가며 격의 공간을 창출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를 향해 들려오는 하나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저를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니… 정말 강해졌군요.」

     

   10층에서 11층을 넘어갈 때, 나의 앞에 등장했었던 존재.

   백색의 천을 걸친 아름다운 외모의 절대자가 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이군요.”

     

   나의 딱딱한 인사에 그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당시에는 감정이 격해지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감동 따위를 느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차분한 마음으로 그를 마주할 수 있다.

     

   그것으로 나의 격이 상승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함과 함께 나의 손에 쥐어진 세상과 사람들을 품고도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 정도의 그릇을 지니게 된 기분이 든다.

     

   「눈빛이 아주 좋아졌어요.」

   “뭐, 그동안 많이 굴렀으니까요.”

     

   많은 고통과 시련이 있었다. 몇 차례나 죽을 뻔했고 실제로 죽음 직전까지 내몰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이겨 냈다는 사실.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려니 괜히 나 자신이 대견해졌다.

     

   “이곳은…… 일반적인 세상은 아니군요.”

     

   나는 주변에 마력을 퍼트려 17층이라 불리는 ‘무無’의 공간을 살폈다.

   여름철의 아지랑이처럼 펼쳐져 가는 나의 격.

   나의 힘이 공간으로 펼쳐질수록 나는 이곳이 소위 말하는 ‘장소’가 아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꽤 아름답지요?」

   “……하하.”

     

   이곳은 조금의 티끌도 섞이지 않은 완전한 그의 공간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 이곳에 들어온 내가 불순물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훗. 우리 좀 걸을까요?」

     

   웃음을 흘리자 정제된 마력이 그의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백색의 공간.

   마치 흑백 영화에 색감이 입혀지듯, 마력이 흘러가는 길에 따라 새로운 공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쏴아아-

     

   아름답다.

   푸른 들판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곳곳에 심어진 작은 나무들에는 열매가 맺혀 있었고 그 아래로는 잔잔한 시냇물이 흐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넌지시 그를 향해 질문을 건넸다.

     

   “이곳은 당신의 심상 세계인 겁니까?”

     

   나의 물음에 그가 역시 알아챌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등골에 소름이 돋아난다. 16층에서 혼돈과의 결전을 통해 심상을 구현해 본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앉아서 이야기하죠. 아, 장소는 익숙한 곳으로.」

     

   황당하다는 나의 표정을 뒤로한 그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다시 한 번 변화하는 주변의 환경.

   눈부시게 밝았던 주변의 명도와 채도가 낮아지며 익숙한 밤공기가 나의 코를 자극한다.

     

   밤거리. 자잘한 소음.

   야경. 잔잔한 가로등.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맞은편에 보이는 네온과 LED로 만들어진 간판 아래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익숙한 회색 의자와 너저분한 책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 하하……”

     

   내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근무했던 편의점.

   나의 삶의 도피처 중 하나였던 장소가 탑의 17층에 펼쳐졌다.

     

   「마음에 들지 않나요? 다른 곳으로 갈까요?」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젓고는 덜덜거리는 의자를 끌어 자리를 잡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 거친 느낌은 여전했음에도 피곤한 날 나의 몸을 뉘이게 해 주었던 안락함을 그대로 간직한 의자였다.

     

   “후우……”

     

   얼마 만에 모든 것을 잊은 채,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매일 같이 검을 휘두르며 미친 듯이 달려왔던 시간.

     

   긴장이 풀리니 머리가 시야가 점점 더 넓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자리를 마련해 준 존재를 바라보며 운을 띄웠다.

     

   “당신은 정체가 뭡니까?”

   「정체라…… 혹시 제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저의 질문에 답해 줄 수 있을까요?」

   “납득할 수 있는 질문이라면. 이참에 문답으로 가시죠. 대답 하나에 질문 하나. 공평하죠?”

   「좋으실 대로.」

     

   나의 말에 그가 손을 뻗어 어디선가 꺼내온 음료를 슬며시 건넸다.

     

   탄산이 채워져 단단하게 느껴지는 보라색의 캔 음료.

   냉기가 스멀스멀 나오는 것을 보니 냉장고에서 금방 꺼내온 것 같았다.

     

   「포도 맛 좋아하나요?」

   “싫어하진 않습니다. 근데 이것도 질문입니까?”

   「그런 걸로 하죠.」

     

   치익-

     

   자연스럽게 캔 뚜껑을 딴 그가 음료를 원샷한다.

   뭔가 몽롱하게 보게 되는 그의 행동들.

     

   “조금 전에 했던 질문을 다시 드리죠. 당신은 누구십니까?”

   「질문이 애매하군요. 저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인지 역할을 말하는 것인지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해주시면 좋겠어요.」

   “음……”

     

   그의 답변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체성이라면 성좌나 그 밖의 절대자일 것이 분명해 보이는 느낌.

   성좌라는 답변을 들으면 의미가 없는 답변일 것이고 절대자라 말한다면 들어도 지금 나에게 굳이 의미가 있는 답변은 아니다.

     

   “역할을 묻고 싶군요.”

     

   나의 물음에 그가 팔짱을 끼며 하늘을 바라봤다.

   달을 바라보는 것인지 그 너머에 있는 어느 별을 바라보는 것인지 모를 아득한 시선.

     

   「역할이라…… 단순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플레이어들을 이끄는 인도자라고 보면 되겠군요.」

   “……네?”

   「탑의 주인이랄까? 뭐… 지금은 그 엇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의 말에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알싸한 충격이 뒤통수로 전해졌다.

   탑의 주인, 인도자.

     

   그게 뭐가 되었든 우리가 탑을 오르도록 하기 위해 세상을 멸망시킨 당사자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제 차례군요. 탑을 오르는 것은 어떠셨습니까?」

   “……”

   「음. 침묵인가요?」

     

   그의 말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려는 것을 붙잡으며 그를 응시했다.

     

   “개…같았습니다.”

   「적나라한 표현이네요.」

   “더 심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참은 겁니다.”

     

   나는 다음에 내가 그에게 던질 질문을 재고했다.

   처음에는 다음 층에 관한 질문이나 17층을 클리어하는 방법에 대해 물으려 했지만 이 자가 정말 탑의 주인이라면 물어야 할 것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랬습니까?”

   「이번 질문도 조금 애매한 것 같은……」

   “저를 지켜봤다면 제 말의 의미를 잘 알지 않습니까? 대답하십시오.”

     

   우리에게 멸망이라는 시련을 준 이유.

   우리가 화신이 되고 성좌가 되어야 했던 이유.

   그리고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했던 이유.

     

   「음…… 이건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 같군요. 혹시 잠시만 일어나 보시겠어요?」

     

   그의 말에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춤에 갈무리해 놓았던 무명검으로 손을 가져가는 것은 덤.

     

   「멸망한 세계의 정복자…… 아니, 김시인. 당신 정말 강해졌군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아요.」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묘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는 서서히 손바닥을 펼쳐 주변을 쓰다듬듯 쓸었고 다시금 공간이 변화하는 것을 보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

     

   스카이 게임즈 20층의 강당.

   튜토리얼이 시작되기 직전, 박조철을 만나고 포탈이 열렸던 그 장소가 나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에 사람은 없었다. 그곳에 있던 것은 덩그러니 놓인 2개의 가죽 소파와 무대 위로 펼쳐진 거대한 스크린 뿐.

     

   「보시는 김에 좀 준비를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17층까지 올라온 당신을 향한 경의의 표시라고 생각해 주세요.」

   “도대체 뭘……”

   「알고 싶어 하지 않으셨나요? 이 탑이 만들어진 이유와 성좌들… 아니 당신이 탑을 올라야만 했던 이유.」

     

   그가 먼저 소파에 몸을 뉘이며 어디선가 감자칩을 꺼내 든다.

   여유로운 모습. 하지만 그의 행동에는 알게 모르게 슬픔과 고뇌가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감자칩? 팝콘?」

   “……”

     

   나는 그가 건넨 감자칩을 받아들며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재생되기 시작한 영상.

   그리고 그 영상의 중심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고아원에 버려진 어린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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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You to Climb the Tower? 누가 탑 오르라고 협박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sudden message arrived, heralding the end of humanity.

[Climb the tower. If you refuse, you will die.]

We are being threatened by a mysterious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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