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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2

     

    “용사님, 한 마리 더 옵니다.”

    “확인했어요.”

     

    타냐와 리셰가 합을 맞추며 달려드는 마수, 기린에게 검을 휘둘렀다.

    타냐가 오러를 벽으로 휘감아 쳐내면 리셰가 후방을 찌른다. 방어가 무너진 틈새에 발렌의 화살이 작렬하고 아셀라의 얼음창이 마무리한다. 완벽한 합이었다.

     

    “황녀님, 뒤!”

     

    후방에서 아셀라에게 뛰어드는 기린.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기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파우스트가 끼어들어 기린의 날카로운 이빨에 왼팔을 내주었다. 방어한 틈을 타 반대쪽 손에 든 검에 신성력을 휘감아 무식하게 내리친다.

     

    “파우스트군!”

     

    앰브로시아의 보조. 즉시 타냐가 돌진해 오러를 날카롭게 정제했다.

     

    스릉! 검격이 그어지고, 기린의 목이 툭 땅에 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파우스트군, 팔을 보여주게. 물어뜯기지 않았소이까.”

     

    앰브로시아의 걱정에 파우스트가 대수롭지 않게 대응했다.

     

    “괜찮습니다. 이걸 장비하고 있었기에.”

     

    쿵! 파우스트가 팔에 감고 있던 철판을 풀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두꺼운 강철이지만 껌을 씹은 듯 엉망이 되어있었다. 보호구가 없었다면 진작 팔을 잃었을 터였다.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했소? 덕분에 상처가 적군. 내 바로 치유해주리다.”

     

    치유주문이 들어간다. 기린 무리의 토벌이 끝났다.

    처음 도착한 숲속, 몇 시간 전진하던 끝에 만난 마물 무리였다.

     

    “고생하셨어요. 마물들이 강력하네요.”

     

    “마계에는 마기가 짙지요. 이런 평범한 숲에도 재앙급 마물이 떼로 몰려다니는군요. 마왕성 근처라 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파우스트 선생도 마물 공략에 능숙하시군. 꼭 고트베르크 선생 같소이다.”

     

    앰브로시아의 칭찬에 파우스트가 코웃음을 쳤다.

     

    “그 녀석이 그리 거들먹거리고 다녔습니까? 마물 상대법도 제가 알려준 것입니다.”

     

    “허허, 이제 사정을 알겠구먼. 치료 끝났소이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여신님의 은총이 있기를.”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그들을 보며 아셀라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방금 파우스트는 자신 때문에 부상을 입을 뻔했다.

     

    본래 황족인 그녀라면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터였다. 평민은 응당 황족인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황실에서는 상식이었고, 지금까지 삶에서도 그러했다.

     

    ‘…하지만 여기는.’

     

    용사 파티, 그것도 인간족이라곤 여기 여섯 명이 전부인 적진의 한복판이다.

     

    신분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 여기서는 누구나 방심했다간 마물의 한 끼 먹이가 되어버리는 공평한 존재다.

     

    그런 상황이니 파우스트가 아셀라에게 보여준 건 진정한 의미로 희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인사해야 하나…?’

     

    아셀라는 혼란스러웠다. 파우스트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사과 인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황녀로서 자신을 보호한 일을 칭찬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파티가 안전한 장소를 찾아 캠핑할 준비를 마칠 때까지 그 혼란은 이어져, 파우스트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그는 라스의 스승이고.’

     

    저렇게나 친한 사이이니 라스에게 소중한 존재일 게 분명했다. 라스도 그를 잃는 건 결코 원하지 않으리라.

     

    ‘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지금 자신의 임무가 더욱 막중하다고 느껴졌다.

     

    혹 마왕을 토벌했다 하더라도 파우스트가 죽는다면. 심지어 그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면 나중에 라스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은 더더욱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

    사사건건 그의 미래를 망치는 악녀라고 힐난받아도 변명할 수단이 하나도 없을 터였다.

     

    “드십시오, 저녁입니다.”

     

    그런 아셀라의 앞에 따뜻한 그릇이 들이밀어졌다. 파우스트의 손이었다. 어느새 야영 준비를 마친 파티가 식사 준비도 마쳐놨다.

     

    이미 모험가 활동을 오래 한 리셰와 타냐, 애초에 야생 출신인 발렌, 뭐든지 잘 해내는 파우스트, 그들을 적극적으로 서포트하는 앰브로시아에 비해 아셀라 자신은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내가 가장 쓸모없지 않아?’

     

    아셀라는 평생 한 번도 가져보지 않은 자기비하가 솟구치는 걸 간신히 억누르며, 파우스트가 내민 그릇을 받아들었다.

     

    양송이가 들어간 곱게 갠 스프.

     

    한 수저 떠먹으니 훈훈함이 온몸에 퍼진다.

     

    파우스트가 그녀의 옆에 앉아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가면 밑으로 빵이 들어가는 모습은 어딘가 기괴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파우스트가 먹던 빵을 스프 그릇에 올려놓았다.

     

    “불편하시다면 자리를 바꾸죠.”

     

    “아냐, 거기서 먹어.”

     

    아셀라는 파우스트를 자리에 억지로 앉히고는 말했다.

     

    “…아까 도와준 데에는.”

     

    어쩐지 목이 메인다. 황실에서 만든 빵보다 버터가 덜 들어가서 그럴 터였다.

     

    “…감사를 표하마.”

     

    간신히 꺼낸 인사였건만, 파우스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까딱였다.

     

    “파티 활동에서는 각자 맡은 포지션에 따라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지요. 치유사는 파티원이 전투력을 최적으로 유지하도록 보호해야 합니다. 역할을 다했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앞으로도 그러시면 전투력이 떨어집니다.”

     

    그의 딱딱한 대답에 아셀라는 기가 찼다.

     

    “하, 사람이 인사를 했으면 솔직하게 받아야 하는 것 아니더냐.”

     

    “감정 기복이 심해지면 전투력이 약화됩니다. 저 같은 평민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시는 건 황녀님답지도 않군요.”

     

    “네가 나를 얼마나 잘 안다고?”

     

    파우스트가 잠깐 멈칫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모릅니다. 전해 들은 걸로 사람을 판단할 순 없겠지요.”

     

    “흐응.”

     

    아셀라는 그 이야기를 들으니 파우스트에게 물어보려던 것이 생각났다.

     

    “라스가 내 이야기를 많이 했어?”

     

    “예. 쉬지 않고 했습니다.”

     

    아셀라는 불안해졌다.

    혹시 라스가 파우스트에게 밝혔던 건 아닐까. 자신이 시간을 반복하고 있고, 그때마다 황제 아셀라가 세상을 멸망시키고 자신을 죽였다고.

     

    “…뭐라든?”

     

    그래도 궁금하다.

     

    호기심은 불안과 공포를 이기는 법이다. 아셀라는 참지 못하고 파우스트에게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상상하던 그대로의 악녀였다고 하더군요.”

     

    “…그랬겠지.”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사는 별세계의 사람 같다고도 했습니다. 몇몇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면서 말이죠.”

     

    “…처음.”

     

    아셀라가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네. 그러면 지금처럼은 안 될 텐데.”

     

    벌써 그와 처음 만난 게 언제인지.

     

    열네 살, 어릴 적의 일이라 희미하게 열화되어 있는 게 너무나 불만이다.

     

    하지만 잊을래야 잊을 수는 없었다.

     

    아직 쌀쌀한 겨울의 끝, 봄이 찾아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찬 바람이 매섭게 불어대는 계절에.

     

    그녀의 눈동자를 가득 메워버릴 정도로 샛노란 장미가 가득 피어있던 그 정원에서, 아셀라는 라스를 처음 만났다.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겨놓은 장면이다.

     

    자신에게 초월적인 마법이 생겨서, 이를테면 10위계 시간 마법을 써서, 지금 바로 그 장소, 그 몸으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지금 당장 네 품에 안길 텐데.

     

    “지금처럼은 안 된다… 황녀님은 그와 헤어진 일을 후회하고 계십니까?”

     

    파우스트의 질문. 아셀라가 코웃음을 쳤다.

     

    “당연하지 않겠니. 내가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파혼도….”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아셀라.

     

    “나는 라스가… 좋은걸.”

     

    아셀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잊겠니. 내 혼약자를, 내 주치의를.”

     

    “…그럼 왜 후국에 다시 연락하지 않으셨습니까? 라스는 월광궁과 후국의 외교 관계가 틀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건.”

     

    아셀라는 그것까지는 대답할 수 없었다.

     

    파우스트에게 천리안으로 본 것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자신이 그 모든 미래를 봤다고 고백했다간, 라스에게도 전해질 게 분명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어. 파우스트, 너야 이해 못 하겠지만.”

     

    “그럼 한 가지 가정입니다만.”

     

    파우스트가 물었다.

     

    “라스가 파티에 합류해서 같이 싸운다면 어떠시겠습니까.”

     

    “…불러올 방법이 있어?”

     

    “텔레포트 게이트야 열려 있으니 연락하면 당장에라도 합류할 수 있겠지요. 그가 있으면 공략에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다만.”

     

    “절대 안 돼.”

     

    아셀라가 눈을 부릅뜨며 파우스트를 노려봤다.

     

    “라스는 여기 오면 죽어.”

     

    “…확신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래. 경고하마, 닥터 파우스트. 라스 고트베르크에게 본녀가 여기 있다고 알려서도 안 되며, 그를 용사 파티에 끌어들이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야. 마왕은.”

     

    아셀라가 매서운 얼굴을 했다.

    월광궁을 통치할 때의 그것이었다.

     

    “본녀가 토벌할 테니.”

     

    대답을 들은 파우스트가 살짝 고개를 내렸다. 허공을 바라보는 듯한 태도였다.

    라스도 비슷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셀라는 순간 위화감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알겠습니다. 황녀님이 그를 아끼는 마음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아는 척하지 마. 내가 라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흠, 그렇습니까.”

     

    “그래.”

     

    “어디가 그렇게 좋습니까?”

     

    “전부 다.”

     

    “세 개만 꼽자면요.”

     

    “왜 세 개나 고르는데? 그야 뭐… 내 기분을 가장 잘 알아줘. 그래서 오히려 약 올리려고 할 땐 괘씸하지만. 손놀림도 좋아. 알지, 여자애도 아니고 걔 손가락 엄청 가늘어. 진료할 때 부드럽게 눌러주거든. 경박한 척하면서 은근 성격도 있어서 나설 땐 나서고. 그럴 땐 남자 같아. 아는 것도 많아서 얘기도 잘 통해. 왜, 주제를 하나 던졌는데 전혀 상관없는 대답이 돌아오면 짜증나잖아. 알아?”

     

    “잘 모릅니다. 네 개 얘기했는데요.”

     

    “시끄러워, 더 들어봐. 머리카락도 새하얘서 잘 어울리잖아. 키가 조금 작은 게 흠이라면 흠이지. 아, 혹시 라스 키 더 컸니?”

     

    “아뇨.”

     

    “그래. 걔 여동생도 그렇고 고트베르크가 작은 집안 같긴 했어. 내가 힐을 낮추면 되니까 그건 상관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칼을 잘 쓰는 남자는 섹시하잖아.”

     

    “라스는 검을 못 다룹니다만.”

     

    “자기만의 칼이 있잖아.”

     

    “메스 말이군요.”

     

    “응. 애초에… 걔한테 들어오는 혼담을 생각해 봐. 누군들 안 가지고 싶겠어.”

     

    아셀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겐 처음부터 자격도 없었어.”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선명했다.

     

    “그러니, 자격부터 손에 넣을 거야.”

     

    식사를 빠르게 마친 아셀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파우스트에게 말했다.

     

    “내일을 위해 이만 수면을 취하마. 파우스트, 파티원을 보호하는 게 그대의 임무라고 하였지.”

     

    “예.”

     

    “그대의 임무를 다하여라.”

     

    아셀라가 몸을 틀며 작게 덧붙였다.

     

    “…부탁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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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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