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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2

       

       내가 여자 무릎을 베고 누워본 적이 있던가.

        

       아주 어렸던 시절에 어머니 다리라면 또 몰라도, 다른 여자의 무릎 위에 머리를 뉘어 본 적은 없다. 하긴, 누구랑 사귀지 않는 이상은 해볼 일 없긴 하지.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경험은 조금 신선하긴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베개보다는 불편하다. 사람의 다리가 아무리 말랑하다고 해봐야 안에 있는 뼈와 근육 때문에 한계가 있으니까.

        

       게다가 소희는 나름대로 운동도 하고. 처음에는 생각보다 되게 말랑하다고 느꼈지만, 오래 베고 있을수록 평소에 쓰는 솜 베개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드는 이 감각은 뭘까.

        

       분명 평소에 침대에 누울 때보다 훨씬 불편한데도, 이상하게 만족스럽다.

        

       아니, 몸은 불편하면서도 심적으로는 아주 편하다.

        

       이유가 뭔지 생각해보았다.

        

       머리 뒤에서 느껴지는 소희의 체온 때문일까? 사람은 자기 체온보다 높은 온도를 따뜻하다고 느낀다고 한다. 그렇다는 건, 지금 소희의 몸이 나보다 더 뜨겁다는 뜻일까?

        

       가늘게 떠진 시야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소희의 얼굴은 조금 붉어 보이기도 했다.

        

       “오늘은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귀가 녹아내릴 것 같은 목소리.

        

       소희가 이런 목소리도 낼 줄 알았나?

        

       생각해보면 소희는 평소에도 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거친 성격의 양아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내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답답하고 거칠었던 포옹도, 이제는 무척이나 부드럽고 따뜻한 포옹이 되었다.

        

       마치 자기 몸이 가진 장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다는 듯한, 온몸을 천천히 붙여오는 것만 같은 포옹.

        

       “우리 주인님은 평소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소희의 손이 내 오른쪽 볼을 살짝 훑으며 지나갔다.

        

       “그러니까,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는,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있어도 돼. 가끔은 생각하는 걸 멈추고, 그냥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거야.”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하긴, 내가 요즘 좀 많이 긴장하고 지내긴 했다. 해야 할 일도 많아졌고, 그 와중에 시험 기간까지 겹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 결국 하고 싶지도 않은 공부를 해야 했다.

        

       공부 같은 건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더 이상 할 필요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대로, 우리 둘만 있을 때는 한숨 푹 자는 건 어때?”

        

       그런가?

        

       하긴, 아침마다 누군가에게 깔린 채 일어나는 것도, 생각보다 고역이다.

        

       여자아이의 냄새는 좋다. 나를 그렇게 좋아해 주는 것도 기쁘다. 사실, 이제는 포옹에 완전히 길들어서 아무도 안아주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옆에 안고 잘 쿠션이 없으면 제대로 자지 못하는 어린아이같이 되어버렸다고 할까.

        

       하지만…… 여기는 소희가 있으니까, 괜찮을지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편안한 낮잠도…….

        

       정신 차려!

        

       조용히 눈을 감고 의식을 망각의 저편으로 보내려는 나의 머릿속이 쾅 울렸다.

        

       정신이 확 들었다.

        

       “으응?”

        

       내가 눈을 번쩍 뜨는 것을 보고, 소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졸리지 않아?”

        

       “어, 아니, 그…….”

        

       사라가 깨웠다고 해야 하나?

        

       너가 지금 잠들면 내가 깨어나잖아! 게다가 이다음에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그런가?

        

       음, 그럴지도.

        

       소희는 세 사람 중에서도 나와 거리를 줄이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자는 도중에 너무 심한 일을 하지는 않겠지만…… 여기저기 조금씩 만져진다든지 입맞춤을 당한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건 어차피 밤마다 당하는 일 아닌가?

        

       일어날 때마다 옷이 조금씩 흐트러져 있던데.

        

       이익……!

        

       내 생각이 안일하다고 생각했는지, 사라가 분개했다.

        

       소희의 포옹은 위험하다고! 나도 지난번에 당할 뻔했단 말이야. 만약 여기서 잠들면, 그다음에 일어난 나도 잠들고, 너도 깨어났다가 잠들고 하면서 몇 번이고 정신을 바꾸면서 농락당할걸?

        

       에이, 설마. 소희가 서큐버스도 아니고.

        

       서큐버스…… 말 잘했네. 맞아, 서큐버스야. 아니면 조상 중에 서큐버스가 포함되어있거나. 아무튼 쟤는 위험해. 사람을 타락시킨다고.

        

       ……말이 조금 심하기는 하지만, 사라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긴 했다.

        

       하긴, 소희는 다른 침대에서 잠들 때도 매일 밤 내 위로 기어 올라와 자던 아이였다. 위험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소희는 여전히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금발 태닝 양아치 여자 캐릭터 중에서는 이상하게 포용력이 넓은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성적으로.

        

       그러니까…… 뭐, 소희의 이런 모습도 클리셰라면 클리셰일까.

        

       만약 원작이 진짜 본격적인 19금 미연시였다면, 이런 느낌의 플레이도 나왔을 것이다.

        

       다시 생각하니 등골이 조금 오싹하긴 했다.

        

       여기엔 지금 당장 제지할 사람도 없었으니까.

        

       “으음~”

        

       내 눈이 말똥말똥해진 것을 보고, 소희는 잠시 고민하더니 팔로 나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소희의 무릎에서 조금 일어나 앉은 자세가 된 나는…… 소희 품에 옆으로 안긴 어린아이처럼 되어 보였다.

        

       내가 소희의 품에 조금 누운 자세가 되어서 그런지, 여전히 소희보다는 조금 작아 보이긴 했지만.

        

       소희의 팔 힘은 나를 충분히 지탱할 수준은 되었지만, 그래도 자세 자체가 조금 불안정해서, 나도 모르게 소희 목에 손을 뻗어 매달리고 말았다.

        

       공주님 안기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딸을 안은 어머니의 자세라고 해야 하나.

        

       “저 그, 소희야.”

        

       “응?”

        

       그 자세 그대로 소희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 조금 부끄러워서, 나는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그, 개인 면담이잖아. 혹시 해야 할 이야기 같은 것 있으면, 지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해야 할 이야기?”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

        

       “내가 해야 할 이야기는…… 음~”

        

       소희는 아주 잠깐 고민된다는 듯 콧소리를 내더니,

        

       “좋아해.”

        

       그렇게 속삭였다.

        

       평소에 소희가 하던 것과는 다른, 속삭이는 목소리.

        

       쪽.

        

       그리고 기습적으로 볼에 뽀뽀했다.

        

       “핫.”

        

       순간 놀라서 소희 쪽을 돌아보다가, 이번에는 그대로 입술에 키스를 받고 말았다.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입술과 입술을 잠시 겹치고 있던 소희는 이내 고개를 뒤로 물렸다.

        

       아주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어…….”

        

       쪽.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소희는 다시 내 입술에 그런 소리가 날 정도로 확실하게 키스했다.

        

       이번에도 짧았다.

        

       성애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애정의 표현이라고 하면 되려나.

        

       내가 안겨있다는 것도 잊고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그 품 안에서.

        

       “좋아해.”

        

       쪽.

        

       그렇게 몇 번이고 나에게 속삭이며 입맞춤하는 소희 때문에, 나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

        

       “…….”

        

       결국,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소희와 함께 방 밖으로 나왔다.

        

       긴장을 잔뜩 하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긴장을 확 풀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마 그 둘을 계속 왔다 갔다 했던 것 같다. 그 결과, 내 걸음걸이는 햇볕에 말랐다가 바닷바람에 절었다가를 몇 번이고 반복해 건조에 실패한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사라야, 괜찮겠어?”

        

       마지막 차례인 수아가 나에게 물었다.

        

       표정에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어, 응…… 괜찮아. 다른 두 명도 했으니까, 너랑도 해야 공평하지.”

        

       “으, 응…….”

        

       그래도 차마 거절하지는 못하겠는지, 결국 수아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들어가자.”

        

       수아는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자기 쪽으로 끌었다. 분명 수아가 나보다 키가 조금 작을 텐데도, 내가 온몸을 기대는데도 흔들림 하나 없었다.

        

       “…….”

        

       음, 왠지, 수아도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자, 이쪽으로.”

        

       수아가 앉은 곳도 침대 위였다.

        

       하지만 수아는 침대 위에 아예 올라가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평소에 우리가 나란히 앉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리고, 자기 옆이 아니라 앞을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나는 말없이 침대로 올라가 그 맞은편에 앉았다.

        

       수아는 한동안 말없이 미소 지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

        

       어, 조금 어색한데.

        

       “자.”

        

       수아가 불쑥 양손을 내밀었다.

        

       “어…….”

        

       내가 그 손을 보고 망설이자, 수아는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말했다.

        

       “손, 잡아줘.”

        

       “어, 응.”

        

       나는 수아의 말대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수아의 손은 부드러웠다.

        

       수아는 맞잡은 손을 요령 좋게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이내 나와 손을 깍지 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은 채 양손을 깍지 끼고 있는 형태가 되었다.

        

       음, 부끄럽다기보다는, 뭔가 기묘한 자세였다.

        

       수아가 뭘 원하고 이러는 건지 고민하고 있는데—

        

       “에잇.”

        

       수아는 그대로 옆으로 픽 쓰러져 누웠다.

        

       당연히 수아의 손을 잡고 있던 나도 같이 옆으로 쓰러졌다.

        

       이제 우리는 양손을 깍지 낀 채 마주 보고 누워있었다.

        

       아, 이제야 좀 부끄럽네.

        

       수아는 손에 힘을 줘 팔을 구부렸다.

        

       왠지 그 힘을 거부하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그 손을 따라갔다.

        

       따라가고, 따라가고, 따라가다 보니…… 나와 수아의 얼굴은 곧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붙었다.

        

       “…….”

        

       “…….”

        

       우리는 말 없이 한동안 그렇게 서로 보고만 있었다.

        

       들리는 것은 둘의 숨소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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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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