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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2

        

         공기 중에 흩날리는, 시야를 수놓는 형형색색 물감의 궤적을 직원들이 멍하니 눈으로 쫓았다.

         

         끊어진 머리카락은 물론이요 붉은 건 생혈, 검은 건 사혈死血. 마지막으로 허여멀건 한, 사람 몸에서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면 안 될 뇌척수액까지.

         저열한 막싸움이나 최전방에서의 실전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엑사테크에서 일하다 보면 간혹 보게 되는 망가진 수냉 쿨러의 최후와 비슷한 내용물 털어놓기에 모두가 몸을 굳혔다.

         

         그걸 보이는 대상이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던 최고 상사이자, 연구소 실권의 탑이었기 때문에.

         

         눈에 띄는 부상은 없었다 호언장담한 깁슨의 말과는 달리 죽은 피가 차지하는 비율은 명백하게 엘렉트라 소장의 머리 쪽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을 증명했지만….

         

         지나친 고통이 원인이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당사자가 갑자기 자살해버린 이상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지긴 어려웠다.

         

         “씹, 이게 뭔…!!”

         

         실장이 무의식적으로 맥을 짚어보고자 바닥으로 뻗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이마에 작은 구멍이 난 수준도 아니고, 하필 적들의 주된 병력이 자사제 드로이드로 이루어져 있다는 소식에 부무장에도 고폭 탄약을 가득 채운 상태였던지라 잡을만한 동맥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사이버웨어도 당장 대상의 생명 징후를 감지하지 못했으며 체온이 떨어지는 속도는 냉각에 가깝다고 분석하고 있는 와중에 이러는 건 시간 낭비였다.

         

         위에서 전쟁이 났는데 감상에 젖어 있을 겨를이 어디 있나.

         

         “전 직원에게 고한다! 엘렉트라 네필라 연구소장의 사망을 확인, 전시 체제인만큼 보안실과 방위팀에서 작전권을 비롯한 명령권을 이어받겠다. 가능한 자원이나 구역만 폐쇄 처리, 전원 담당 위치를 포기하고 대피하라!! 소장님의 생명 신호가 사라진 걸 확인한 본사에서 15분 정도면 섬멸 부대가 도착할 거다! 빨리!!”

         

         차라리 그녀가 무대에서 퇴장한 게 여타 생존자들 입장에선 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하고 살 사람은 사는 게 맞다는 보안실장이 전권을 빠르게 승계했으니까.

         

         “다들 3인 1조로 흩어져서 대충 열린 공방(Workshop) 보이는 족족 다 밀폐, 차단 모드로 바꾸면서 올라간다! 인터컴은 항상 열어놓고! 뒈질 것 같으면 미련하게 싸우지 말고 아무 방에나 들어가서 잠그고 버티….”

         

         “잠깐잠깐 잠깐만, 실장! 일의 선후가 잘못되지 않았나!? 임원진 별도 대피 절차는 마저 시행해주고 가야지!”

         

         “…….”

         

         한시라도 빨리 손해를 최소화하면서 빠져나가야 할 상황에, 바쁜 사람 어깨를 붙잡는 깁슨을 실장이 밉살스럽게 흘겨봤다.

         

         체면치레 좋아하는 이기적인 새끼. 그렇지만 평소엔 선임 연구원 겸 상급자인 그의 요구를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해야 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런 비위 맞추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뒈질지 살지, 직위가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마당에 무슨.

         

         “…일반 연구소가 아닌, 독립형 복합 시설의 경우 임원으로 분류되는 건 소장 직위에 있는 개인에 한정합니다 미스터 깁슨. 소장님이 대피하실 때 따라 움직이는 편의 정도는 봐 드릴 수 있지만 댁을 지키고자 이 모든 인원을 할애했다간 나중에 제가 뒤집니다.”

         

         “아니 씨발, 선임 연구원 자격이 아니라……!!”

         

         자신이 설마 그걸 모르겠나.

         그저 ‘테러 관련 정보를 알고 있는 중요 참고인’ 이자, 명백히 적이 노리고 있을 주요 목표(Target) 중 하나인 스스로에 대한 정당한 신변 보호를 요청하는 거라고 윽박지르려던 깁슨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구구절절 죽은 엘렉트라와의 친분이나 뒷거래를 설명한다 한들,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째려보고 있는 실장이 그대로 따라줄까?

         

         기껏해야 증거부터 제시하라며 지랄하겠지.

         

         침입자와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밝히면 테러 내통자로 즉결 처분을 당할 수도, 그 외의 정보를 제시하고 싶어도 입수 경로를 밝히기 더럽게 애매한 것들뿐이다.

         

         하지만 제대로 주변 방비를 굳히지 못한다면 몇 미터 거리에서 눈에 불을 키고 여기를 노려보고 있는 레오나르가 바로 따라와서 자기 목을 꺾어 놓던, 알고 있는 걸 다 불고 뒈지게 고문을 가하던 할 텐데?

         

         추하게 실장 뒤라도 졸졸 따라가야 하나?

         아니지, 생존률을 높이려면 역으로 새로운 협상 카드를 확보하는 게 나을 것이다. 아마도.

         

         “좆 같은 새끼가!”

         

         말문이 막힌 것처럼, 혹은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 것처럼 몇 차례 입을 뻐끔거리던 깁슨이 보란듯이 바닥에 침을 뱉고는, 등판에 꽂히는 방위 부대의 비웃음 담긴 시선을 견뎌내며 비상구 쪽으로 달려나갔다.

         

         콰당!

         거의 넘어지듯 문짝을 밀어젖힌 그가 계단을 두 칸, 세 칸씩 마구 뛰어넘으며 올라갔다.

         

         일상생활에 여러모로 거슬리기는 해도 기계 의족과 의안의 성능만은 엑사테크 제품답게 보증 수표가 확실.

         도약력, 동체 시력 모두 나무랄 곳 없이 사용자의 급박함에 부응하여 운동과는 담 쌓고 지내던 책상머리 공학자를 날듯이 층계참을 거슬러 올라가게 도와주었으니.

         

         ‘괜찮아, 시간은 넉넉해. 오히려 내 편에 가깝지. 섬멸 부대가 올 때까지 15분? 14분?? 두 발은 앞서 움직였으니 분명 여유가 조금은!’

         

         거진 두 배에 가까운 혈액 순환 효율을 지녀야 할 몸이었지만.

         멀리 안전한 위치에서 드로이드를 조종하는 게 아니라 위험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긴장 탓인지, 미친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깁슨이 스스로를 다독였다.

         

         자신은 충분히 영리하게 처신했다. 그러니 안전하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제대로 상황 보고서나 손실 통계를 살피지는 않았지만 지상 전황이 나빠봐야 얼마나 나쁘겠는가?

         

         엘렉트라의 관리 심부름을 할 때 얻어 놓은 여벌 카드키도 있으니까 무사히 거기까지 가기만 하면….

         

         “깁스으으으으은——!!!

         “미친!”

         

         불과 몇십 초 전에 지나쳐온 지하로부터, 스피커 출력이 어찌 저기까지 올라가나 싶은 포효가 쩌렁쩌렁하게 수직 통로를 울렸다.

         

         어떤 해괴한 기술과 응용 과학을 결집시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엘렉트라를 자살로 위장하여 처리한 걸로 부족했는지 기어코 자기를 쫓아온 모습에 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아니,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깁슨의 팔과 목을 포함한 상반신 쪽 근육이 뻣뻣하게 굳고 머리가 둔기에 얻어맞은 것 마냥 쩡! 하고 울렸다.

         

         분명 고주파와 저주파 집중 방사를 이용한 피험체 안정화 연구… 이걸 공격용으로 써? 안 본 사이에 정말 어마어마하게 폭력적으로 변하셨구만!

         

         “거기서 기다리면 고통스럽지 않게 한 방에 끝내주마. 아가리에 기만과 거짓말이나 주워섬기는 네놈과는 다르게 말이다!”

         

         “거 씨발 참 매력적이네! 그런다고 내가 멈추겠냐…!”

         

         존나 다행히도 생물 근육에 작용하는 방해 공작은 그에게 큰 악영향이 없었다.

         물론 달리는 자세가 엉망이 되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라 하기엔 묘하게 뒤틀린 몸 형태가 우스꽝스러워졌지만 일단 계속 움직일 수는 있었으니까.

         

         고로 기동력을 제한하기 위해 어떻게든 없는 병력을 쪼개서라도 공습을 시도한 건 자연스러운 흐름의 일부였으니.

         

         콰지직!!

         

         “썅!?”

         

         저 위에서 수직 강하를 결행해 자폭하듯이 내리 꽂힌 드론이 계단 모서리에 부딪히며 터져 나갔다. 모자란 추진력으로 인해 아쉽게 폭격 궤도가 어긋났다.

         

         한가득 장전되어 있던 탄약과 고속 기동에 쓸 배터리는 이미 혈투를 치르며 전부 소모한지 오래.

         무식하게 부딪히는 걸로 깁슨의 얼굴을 뭉개 버리려 한 시도는 실패했지만 아직 탄환으로 쓸 드론은 몇 대 남았다.

         

         레오나르의 동업자인 누군가가 본다면 ‘아니 내(?) 드론이!!’ 라며 비명을 지를 판이었지만 그녀는 이 자리에 없었다. 운 좋게도.

         

         쾅!! 콰광! 콰지직!! 펑!

         

         “개, 씹, 또라이 같은! 병사들은 여태 뭘 한 거야!”

         

         흡사 새떼가 이상 현상을 일으킨 것처럼 하늘에서 금속으로 된 비가 쏟아져 내렸고, 깁슨은 입으로 불평을 멈추지 않았다.

         

         분명 중앙을 비워 둔 채 빙빙 도는 나선형 비상 계단 구조가 아니었다면 천장이 낮아서 이런 폭격에 노출될 필요가 없는 대신, 반대로 좁아 터진 시야가 발목을 잡아서 물려 죽었을 게 뻔했지만.

         

         찌이익! 끼긱!!

         

         다리를 절뚝이며 달려든 하운드로이드의 발톱이 뺨에 기다란 자상을.

         안구 보호용…이라기보단 안구 그 자체인 고글 근처에는 지워지지 않을 흠집을 남기며 스쳐 지나갔다.

         

         아슬아슬했다. 군데군데 고장이 났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목이 베이거나 어디가 잘려 나갔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번 이어진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본능에 따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다리를 놀린 보답으로, 깁슨은 어디 한군데 이상 꿰뚫리기 전에 숙소가 밀집한 층에 도착하는데 간신히 성공했다.

         

         우당탕…!

         

         주르륵 미끄러지는 다리를 억지로 교차하고, 손으로 타일을 집어가면서 깁슨은 겨우 무너진 몸을 바로 세웠다.

         

         마치 직전까지 자신을 덮쳐오던 사냥개를 흉내내는 것처럼 네 발로 사방을 짚는 모습은 정말 꼴사나웠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살아서 더 멀리 가겠다는 절박한 목적 수행엔 꽤 탁월했다.

         

         아니, 비유적 표현이나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가 갑자기 비루한 개새끼 마냥 바닥을 길 줄 몰랐던 탓에, 얼마 남지 않는 레오나르의 ‘탄환’들이 깁슨의 상반신이 있었을만한 높이를 맹렬하게 지나쳐 벽에서 폭산 했으니까.

         

         “이 Cafard 같은 노오오옴…!!”

         “흐힉, 흐핫!”

         

         온다. 분명 거의 다 왔다.

         

         이제는 정말 지근거리에서 들리는 사신의 울림에 호흡마저 잔뜩 꼬인 채로 헐떡인 깁슨이 어쩌면 인생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스퍼트를 냈다.

         

         어째 절박한 상황에 처하고, 들춰보면 볼수록 간사하고 일그러진 모습만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더는 실망할 것도 남지 않은 레오나르는 지긋지긋한 인연을 끊고자 서둘렀고.

         

         그렇지만 간발의 차로.

         정말 아나스타샤 기준으로 묘사하더라도 주먹 몇 개나 가까스로 들어갈 것 같은 격차를 가지고 두 사람의 우위가 갈렸다.

         

         삑, 삐빅—!

         

         꺼내든 카드키를 숫제 내던지듯 소장실 출입문에 꽂은 깁슨이 방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다급하게 향한 곳은 벽면 장식장, 먼지 한 톨 없게 병적으로 관리된 화분과 약병들을 모조리 옆으로 후려쳐서 떨어트린 그가 왜인지 안쪽 벽면에 박힌 온도 조절기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눌렀고.

         

         드르륵…! 돌연 열린 바닥에서 극진하게 보관된 냉동 캡슐이 올라왔으니.

         따로 세포 재생 공정까지 거쳤는지, 수술의 흔적조차 일절 남지 않은 레오나르의 원래 몸을 담은 보관함이 거기에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 그거 니꺼 아니야!

    오늘의 한마디 : Cafard = 바퀴벌레

    어제 연재분을 다 쓰고 나서 ‘맥락은 차이나지만 신나는 노래가 있지 않았나?’ 하고 고민하다가 오늘 겨우 기억해서 간만에 들었습니다.
    SayMaxWell – Undertale – Hopes and Dreams [Remix] , 무려 한글 자막도 누군가 따로 입히신 리믹스곡입니다.

    …어라? 이거 완전 아나스타샤가 악당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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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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