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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3

        

         다소곳하게 가슴팍에 모아진 두 손. 목 위쪽과 손을 제외하고는 전신을 빈틈없이 감싼 턱시도.

         

         주기적인 중력과 장시간 눌림으로 인한 부작용 계산, 근밀도 관리까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중추 신경계가 통째로 적출되었음에도 마지막으로 거울을 봤을 때와 거의 달라진 게 없는 몸.

         

         약간 붉은 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과 수염. 심지어 눈가에 생기기 시작한 옅은 주름마저 지금 막 문가에 도착해 캡슐을 본 레오나르에겐 그리움을 배가시켰지만.

         

         단지, 그 냉동 캡슐의 보관 현황을 표시하는 계기판… 그리고 상태를 조정하는 제어판에 달라붙어서 뭔가를 죽어라 만지작거리고 있는 깁슨의 행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

         

         말은 필요 없었다. 여태 서로를 죽일듯이 덤벼들었는데, 저 새끼가 친절히 저걸 돌려주기 위해 급히 선행했다고 볼만큼 레오나르는 낙관적이지 않았다.

         

         팔이 뻗어진다. 그에게 손톱이 있었다면 모조리 놈의 머리통에 박아 넣기 위해 곤두세웠을 기세로.

         하지만 우악스런 손길은 아깝게 원하던 곳에 닿지 못하고, 깁슨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채기 직전에 멈춰야만 했으니.

         

         “씨발, 거기서 한걸음만 더 움직여 봐! 이 빌어처먹을 캡슐을 그대로 유골함으로 만들어서 니 새낀 고운 뼛가루만 가져가게 될 테니까!!”

         

         비밀번호 입력부터 유지 보수 메뉴 진입, 수백 가지는 족히 넘는 항목에서 특수 기능 탭을 찾아 유사시를 대비한 소체 인멸용 소각 기능을 팝업 시키기까지.

         

         비공식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캡슐 조작에 등재될 수 있을만한 솜씨로 일련의 작업을 끝낸 그가 비명을 질렀다.

         미친듯이 떨리는 손가락은 금방이라도 통제를 벗어나 화면을 터치할 것처럼 진동하고 있었고.

         

         최신식 캡슐 모델이다.

         분명 보관 성능만큼이나 소각 화력도 높을 터이고, 만약 버튼을 누른다면… 깁슨의 골통을 깨부수고 시체를 치워버리고 작동을 중지시키는데 4초? 조작해야 할 부위에 피라도 튀면 5초?

         

         거기에 진화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까지 더하면 여기까지 와서 유골함을 들고 돌아갈 셈이냐는 협박은 과연 과장이 아니었다.

         

         “…….”

         “좋아, 씻팔! 뒤로 물러나라고. 천천히. 허튼 생각하지 말고! 그 이상한 전파 공격이나… 엘렉트라한테 한 짓이 뭔지는 몰라도 나한테 쓸 계획은 집어치워!! 뇌가 곤죽이 되도 손가락 까딱할 힘은 남아있을 테니까!”

         

         뿌드득!

         

         사람 손이 가진 특유의 마찰력과 그립감마저 재현하기 위해 세밀하게 새겨진 결마저 보이는 거리에서.

         회백색 합금 손마디가 찬찬히 말려들어간 다음 주먹을 쥐고 물러나는 광경을 직관한 깁슨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진짜 조금만 늦었어도 협상 테이블이 통째로 날아가는 건 물론이요, 그 위에 올라간 게 자기 머리가 될 뻔했지만 일단은 살았다고. 그는 안도했다.

         

         씨발, 친구의 호의도 개무시하고 세상에서 지가 제일 잘나고 쿨한 줄로만 아는 레오나르의 몇 없는 약점도 손에 쥔 채로 말이다!

         

         그제야 여유를 좀 되찾은 그가 과열되어 계집애 마냥 안짱다리 상태로 널브러져 있던 다리를 추스르며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기습당할라 시선은 정면에, 양손은 모두 제어판에 고정한 상태로.

         

         “이 병신 머저리 같은 새끼야!! 이제 이 지랄 난 상황을 다 어쩔 거야!? 그냥 너 좋다고, 너 없인 못 산다고 들러붙는 정신 질환자 년한테 ‘그래 그래, 나도 사랑해~’ 몇 마디 선심 쓰듯이 던져주고 복직하면 모두가 행복했는데!”

         

         본인은 양쪽의 갈등을 해결해준 유일한 공통 지인으로서 친분을 유지하고, 연구소장과 그녀의 애인인 천재 공학자는 자신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주로 깁슨에게 있어서 완벽한 결말, 엘렉트라와 레오나르도 적당히 만족할만한 미래 구도를 그렸거늘 좆 같은 고집을 부려 전부 날려 먹다니.

         

         “……일방적으로 참고 속이기만 하는 게 무슨 썩어 문드러진 관계더냐? 침을 뱉었으면 뱉었지, 난 그런 식으로 한 때의 애인을 기만할 마음은 없다. 내가 너 같은 줄 아나!”

         

         “그래!! 매번 그게 문제였지 예전부터! 편하게 가는 법도, 지가 얼마나 복받았는 줄도 모르는 새꺄!!”

         

         이 모든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내가 가졌더라면.

         엘렉트라에게 구애받을 만큼 중후한 외모나 성격을 보유한 게 나였다면.

         구태여 뒤에서 손가락질당하고, 욕먹을 짓거리를 안 하고도 얼마든지 성과를 뽑아낼 재능이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었더라면.

         

         서로를 향해 타이르고 윽박지르면서도 최초부터 이렇게 타산적인 면모만 보고 맺은 인연은 아니었다고 둘 다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이미 뒤늦은 일이다.

         

         참아 넘길 수 없는 영역을 짓밟혔다 느끼는 것 또한 양측 모두 마찬가지였으니까.

         

         “누구는! 이런 씹창난 개눈깔 달고 대체품 임상 시험만 7년이 넘게 기다리고 있는데, 배불러 터진 잘난 놈께서는 신경성 부작용이 생기신 것도 아니면서 그냥 ‘난 딱히 이런 걸 바란 적이 없다’? 출세가도에 올랐다는 새끼가 시설 뒷문 부수고 사라졌을 때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알고??”

         

         “흥! 다른 직원들은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멋대로 추측해서 떠들었겠지만, 너는 다르지 않나! 애새끼처럼 굴지 말고 네 해묵은 골칫거리들을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것도 작작…!”

         

         “아가리 좀 닥쳐!! 옛날부터 네 그런 점이 재수없었다 말하는 거니까! 그놈의 원론 타령은 씹. 아, 안 그래도 퓨어 프로젝트 대상자 주제에 인간미 없기로 유명하던 새끼가 가면 하나만 둥둥 띄워 놓고 그러니까 어울리긴 하네!”

         

         다양한 가정, 의미 없는 경우의 수, 오갈 데 없는 짜증, 찌들대로 찌든 열등감.

         심적으로, 물리적으로도 막다른 곳에 몰려 온갖 질척거리는 감정의 격류를 제어하지 못하고 폭발시킨 깁슨이 꽥꽥 소리를 질렀다.

         

         유리하게 협상을 하겠다는 당초의 목표는 어디로 간 걸까.

         

         설득은커녕 원색적인 비난에 가까운 욕설만 지껄이거나 말거나, 떨어질 정나미도 얼마 남지 않은… 혹은 방금 그걸로 바닥을 보인 레오나르는 외려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 모자란 사교성을 열과 성을 다해 지적해준 건 고맙게 여기지. 하지만 과거 행실을 깎아내리는 건 그쯤 하고, 적당히 원하는 바나 말하지 그러나?”

         

         “씹새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중대한 약점을 쥐었다지만 저울 반대편에 걸린 건 레오나르의 진짜 목숨-뇌-.

         명령조로 죽으란다고 그가 죽을 리도 없었을뿐더러, 노골적으로 시간을 끌다간 이도 저도 아니게 될 확률이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바른 말만 하는 게 깁슨의 신경줄은 몇 배로 건드렸지만 급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떡하지? 보안팀 멍청이들이 숙소까지 올라오려면 얼마나 더 걸리지?

         안 돼. 그런 불확실한 것보다 더 유효한 카드가…… 아!

         

         요란하게 굴러가던 눈이 잠깐 멈칫 하고 허공에 고정되었다가 정면으로 돌아왔다.

         

         레오나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정확히는 과하게 의미 부여하는 걸 자제했다고 할 수 있겠다. 과도한 흥분 상태에 있는 깁슨의 초점은 아까부터 미친듯이 흔들리고 있었기에.

         

         또… 이어진 그의 말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거기 무릎 꿇고 엎드려. 그 각진 대가리 이쪽으로 내밀고.”

         

         “지금, 뭐라…?”

         

         “두 손 등뒤에 붙이고 처엎드리라고!! 퉤! 화풀이 삼아서 한 대만 후려갈기고 이 씨팔거 들고 가게 해줄 테니까. 어차피 엘렉트라도 뒤진 마당에 이런 물건이 남아있으면 감찰 건수밖에 더 돼?”

         

         선심 쓰듯이 건네진 제안에 레오나르의 오페라 가면 아바타가 벌레 씹은 것 마냥 노골적으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안 아프게 죽여주겠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렸나? 뭐, 모르는 새에 기회 되면 식사나 같이 하자며 헤어질 사이로 돌아왔나?

         솔직히… 단시간 내에 과하게 주어진 스트레스로 인해 착란 증세가 왔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냐는 소견서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짜맞춰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쿵!

         

         괜히 복수하고도 상쾌하지 못하게, 나중에 속였다고 질질 짜지만 말아달라는 마음으로 일단 자존심을 접고 요구사항에 따랐을 뿐.

         

         한 쪽, 곧이어 다른 쪽 무릎도 소장실 바닥에 맞닿고. 느릿하게 그의 모니터가 지면과 평행한 각도까지 수그러졌다.

         그렇게 일시적이지만 뻣뻣하기 그지없던 모가지를 굽혀 놓았단 만족감에 깁슨은 히죽하고 저열한 웃음을 지었다.

         

         중독될 것 같은 저질스러운 쾌감과는 별개로 예고했던 ‘화풀이’도 구질구질하게 잊지 않은 채 덤처럼 얹었고.

         

         “…원망하지 마라. 일을 키운 네 잘못이 존나게 크니까!”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미처 어떤 반응을 돌려주기도 전에. 밑에서부터 형체가 흐릿하게 보일 속도로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한 대, 그걸 저 몸뚱이에 맨주먹을 휘둘러봐야 제 손만 아플 거라는 건 용케 유념한 걸까?

         정확히는 레오나르를 적어도 일이 초쯤은 정신 못 차리게 만들어야 한다는 계산이 깁슨 안에서 섰기 때문이었지만… 그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아직은.

         

         콰지직—!!

         

        “전시 체제 돌입…이 아니라! 경호 드로이드 ES시리즈 비상 가동!! 실장 새끼 입버릇이 고새 옮았네!”

         “!!”

         

         결국 어지간한 타격을 한참 넘은 충돌에 버티지 못한, 잘게 갈라진 모니터 파편이 별가루처럼 사방에 뿌려지는 와중 발악처럼 실내에 울린 깁슨의 목소리에.

         

         목이 옆으로 확 꺾인 채 넘어지면서도 레오나르의 사고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경호 드로이드… 맞다. 시설 방위 병력과는 별개로, 간부인 소장에게는 품위 유지용 전속 기체가 할당되어 있었다.

         

         심지어 만일 실전에 투입될 경우 정말 돌발 사태나 비상시밖에 없다는 무적의 논리 하에 오직 전투력만을 극대화한 녀석이.

         제품 카탈로그엔 경호 드로이드라 적어 놓은 대분류가 무색하게, 막상 판매할 때에는 변수 제거 및 특수 살상용에 적합한 고가품이라는 추천 설명이 곁들여지는 슬래셔(Slasher; 베어 여는 자) 모델이.

         

         – 출력 안정화 완료, 긴급 부팅 절차 이상 없음. 엑사테크 직원이 아닌 민간인은 즉시 스캐닝 범위 밖으로 물러나 주시기바랍니다. –

         – Output stabilization completed, system all green. Civilians other than Exatech-employees are requested to immediately step out of the scanning ran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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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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