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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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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우, 머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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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에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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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한밤중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은 침상과 내 몸에 달라붙은 부드러운 살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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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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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든 혜령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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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내 손가락을 타고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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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하는 하인이 고생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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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적나라한 정사의 흔적을 남에게 치우게 하는 게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이 시대에서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으니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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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에 화경의 고수가 직접 침구를 빠는 건 영 모양 빠지는 일이기도 했고, 여러 사람 기겁하게 만들 일이기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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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대야에 이불 넣고 발로 밟고 있으면 저게 극한의 돌려 까기인지 그냥 흔적 지우기인지 아무도 모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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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 모가지 날아가게 할 거 아니면 청소는 내가 안 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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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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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을 꼼지락거리며 내 몸을 더듬더니, 내 목에 팔을 휘감은 혜령이가 반쯤 풀린 눈으로 잠에 취한 채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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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더 자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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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에요. 슬슬 씻어야죠. 돌아갈 준비도 해야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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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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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볍게 입을 맞추고, 몸을 돌려 침상에 앉으니, 뒤이어 혜령이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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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혜령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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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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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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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 엉큼해요. 어딘지 알면서.”

       ​

       …생각해보면 그렇게 격렬하게 했는데 멀쩡하게 걸을 수 있을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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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혜령이의 허리에 팔을 감고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자연스럽게 살짝 축축한 살갗이 서로 맞닿아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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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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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스럽게 입맞춤을 한 우리는 한참 뒤에야 입술을 떼어내고는, 서로를 보며 쿡쿡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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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가 생겼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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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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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조만간 생길 것 같아요. 매일매일 이렇게 뱃속에 아기씨가 들어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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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령이가 배를 쓰다듬으며 어딘가 요염함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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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부터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건지, 아니면 어젯밤의 일로 지을 수 있게 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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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은 좀 힘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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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그랜드마스터라도 매일 세 명이랑 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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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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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려고 하면 할 수 있지. 그냥 매일 하기엔 여건이 좀 애매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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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돌아가면 적당한 집부터 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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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번 돈과, 갑옷을 판 돈이면 괜찮은 집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문제는 어디에 구하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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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 집을 구할지 고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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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은 어디든 정들면 고향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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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외네. 난 네가 해남도로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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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도에 가면 좋지만, 거긴 너무 좁은걸요! 딱히 먹고 살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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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긴. 거긴 어업이 주력 산업인 곳이라 내가 딱히 할 일이 없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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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해남도를 지켜주는 것뿐이지만, 그 정도야 지금의 해남검문 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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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아저씨를 무림맹에서 놔줄 것 같지도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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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무림맹에 묶여 있어야 할 이유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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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가라면 아버지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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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목에 휘감기는 새하얀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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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이어 내 어깨에 얼굴을 올려놓은 서련이 장난스럽게 내 귓볼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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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가는 이제 중원의 영웅인걸요. 그 누구도 가가가 해남도에 들어가는 걸 원하지는 않을 거예요. 원한다면 차기 무림맹주 자리도 충분히 얻으실 수 있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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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정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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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그 정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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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면 내 나이에 지금 경지면 무림사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수준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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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별로 구미가 당기는 일은 아닌데.”

       ​

       내가 꽤 오랫동안 맹주랑 있어봐서 아는데, 저 자리 수십 년 동안 서류작업만 죽어라 하는 자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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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서류의 산에 파묻히는 인생을 살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고생한 만큼 적당히 유유자적 살고 싶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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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목으로 칼을 부순 다음에 거절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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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후, 가가는 욕심도 없으시네요.”

       ​

       “그냥 늘어지고 싶어질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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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 은공이라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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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경이도 깼나.

       ​

       “뭐,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은 일단 씻어야지. 우리 꼴이 말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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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헤, 가랑이가 아직도 끈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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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그렇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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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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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한숨을 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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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씻으러 가자. 물은 아침에 준비해놓으라고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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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같이 씻는 거예요?”

       ​

       “그렇게 되겠네.”

       ​

       이젠 거리낄게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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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조용히 옆 방에 있을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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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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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해성을 수습하는 데에는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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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진 성벽을 제외하면 의외로 내부의 피해는 아주 큰 편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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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진 성벽은 본래라면 시간이 오래 걸렸겠지만, 중원이 좋은 게 뭐냐, 바로 넘쳐나는 인구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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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시대든 무시무시한 숫자를 자랑하는 중원인답게, 어려운 공사도 숫자로 밀어붙이니 금방 끝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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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보수를 전부 끝낸 우리는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묘한 시선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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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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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면 혼자서 연인들이랑 꽁냥대서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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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쪽이든 헛기침 한 번 하면 다들 시선을 피하는 게 퍽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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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주님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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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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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사랑이 넘치는 건 알겠는데, 계속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건 언제까지 하시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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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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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림이나 장강수로채도 저희를 보고 감히 싸움을 걸 생각을 못할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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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긴, 그날로 문 닫고 싶은 게 아니라면야 황군과 무림맹 무인들의 연합군을 건드릴 미친놈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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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교조차도 맘루크들 없이는 감히 전투를 걸어올 자신이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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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좋지 않아요? 느긋하게 풍경 구경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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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로운 게 좋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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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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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기분 좋은 단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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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실감은 잘 안 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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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이라도 내가 몰랐던 전쟁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

       파르스까지 죽였는데도 아직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이제는 내 삶에 전쟁이 깊숙이 박혀서 빼내지 못할 수준이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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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 무슨 생각 해요? 얼굴이 심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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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전쟁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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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전쟁 같은 생각은 그만두고 미래를 그리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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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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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령이가 꺼낸 달콤한 단어에 나는 미래를 떠올렸다.

       ​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늙어가는 모습이.

       ​

       물론 지금 내 상황상 ‘평범’이라는 단어가 내 인생에 끼어들 여지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제 지긋지긋한 전쟁과는 안녕을 고해야 할 때가 아닐까.

       ​

       과거의 악연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지금만큼 확실할 때는 없었으니.

       ​

       “미래 좋지.”

       ​

       “아이는 몇 명이나 갖고 싶어요?”

       ​

       “글쎄.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

       애초에 3명이나 아내가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

       내가 일부일처제가 당연한 세상에서 살다 온 것도 컸다.

       ​

       “전 딸 하나, 아들 하나 갖고 싶어요.”

       ​

       “저, 저도 그렇습니다.”

       ​

       “어머,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 인생 계획이 짜이는 느낌인데. 나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세 연인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얼마 안 가서 육아 지옥이 벌어지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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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명도 힘들다는 게 육아인데, 여섯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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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그랜드마스터도 소화할 수 있을지 장담이 안 되는 시련이다.

       ​

       물론 여섯 명이 동시에 나오지는 않을 테니 실제로는 내가 상상하는 것만큼 지옥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목표가 원대해서야 고생길이 훤한데.

       ​

       “저희도 숫자가 많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유모도 구하면 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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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모라.

       ​

       산파도 구하고 유모도 구하고 그래야겠지.

       ​

       어째 갈수록 해야 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네.

       ​

       가족 계획 쉽지 않구나.

       ​

       그래도…

       ​

       “인생 2막은 지금까지 보단 낫겠지.”

       ​

       세상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쟁보다 지옥 같은 경험은 할 수 없을 테니까.

       ​

       내 전쟁은 끝났으니, 나도 이제 인간 윌리엄으로 살아가면 되는 거다.

       ​

       “이보게 사위.”

       

       “예. 무슨 일이십니까?”

       ​

       “고생하게.”

       ​

       “예?”

       ​

       “가장 노릇은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일세. 인생 선배로서 위로해주는 것이니 잘 귀담아듣게. 세 명한테 바가지 긁히면 경지고 뭐고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걸세.”

       ​

       “제가 바가지 긁힐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

       “그래 보인다네.“

       ​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 정도는 아닌…데.

       ​

       왜 확신이 안 서지.

       ​

       여기도 남편 노릇이 쉽지 않은 건가.

       ​

       “아버지는 제가 가가를 못살게 굴 거라는 소리인가요?”

       ​

       “련아, 그런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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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실망이에요.”

       ​

       “련아…그런게 아니래도…”

       ​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맹주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초라해 보였다.

       ​

       자업자득이니 내 알 바는 아니지만.

       ​

       그것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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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가면 당장 혼례 준비나 하자.”

       ​

       “정말요?”

       ​

       “이러다간 배부른 신부들이랑 혼례를 올려야 할 기세니까.”

       ​

       몸에 무리가 가는 시기가 오기 전에 빨리 끝내야지.

       ​

       어쩌면 이미 들어섰을지도 모를 테니.

       ​

       나는 내 말에 배를 쓰다듬으며 배시시 웃는 혜령이를 바라보며 마음 편하게 미소 지었다.

       ​

       

       서련이 내 볼을 찌를 때까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제 얼마 안남았습니닷.

    사실 저번편이 두 편 분량을 한 편에 우겨넣은 수준이라 의도치 않게 다이어트를 했습니닷.

    뜌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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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eval Knight in a Martial Arts Novel

Medieval Knight in a Martial Arts Novel

무협소설 속 중세기사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fter two years of being reincarnated as a medieval knight, he finally realizes that he's been reincarnated into a martial arts 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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