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 머리야.
나는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한밤중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은 침상과 내 몸에 달라붙은 부드러운 살결들.
“…잘 자네.”
나는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든 혜령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내 손가락을 타고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청소하는 하인이 고생하겠네.”
이 적나라한 정사의 흔적을 남에게 치우게 하는 게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이 시대에서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으니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화경의 고수가 직접 침구를 빠는 건 영 모양 빠지는 일이기도 했고, 여러 사람 기겁하게 만들 일이기도 했으니.
내가 대야에 이불 넣고 발로 밟고 있으면 저게 극한의 돌려 까기인지 그냥 흔적 지우기인지 아무도 모를 테니.
하인 모가지 날아가게 할 거 아니면 청소는 내가 안 하는 게 맞다.
“아저씨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내 몸을 더듬더니, 내 목에 팔을 휘감은 혜령이가 반쯤 풀린 눈으로 잠에 취한 채 미소를 지었다.
“좀 더 자도 돼.”
“아니에요. 슬슬 씻어야죠. 돌아갈 준비도 해야 하잖아요.”
“뭐…그렇지.”
가볍게 입을 맞추고, 몸을 돌려 침상에 앉으니, 뒤이어 혜령이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혜령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저씨, 아파요.”
“어디가?”
“아저씨 엉큼해요. 어딘지 알면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격렬하게 했는데 멀쩡하게 걸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나는 혜령이의 허리에 팔을 감고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자연스럽게 살짝 축축한 살갗이 서로 맞닿아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게 했다.
“음…”
자연스럽게 입맞춤을 한 우리는 한참 뒤에야 입술을 떼어내고는, 서로를 보며 쿡쿡 웃었다.
“아기가 생겼을까요?”
“글쎄.”
“그래도 조만간 생길 것 같아요. 매일매일 이렇게 뱃속에 아기씨가 들어서면…”
혜령이가 배를 쓰다듬으며 어딘가 요염함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원래부터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건지, 아니면 어젯밤의 일로 지을 수 있게 된 건지.
“매일은 좀 힘든데.”
아무리 그랜드마스터라도 매일 세 명이랑 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못해요?”
“하려고 하면 할 수 있지. 그냥 매일 하기엔 여건이 좀 애매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일단 돌아가면 적당한 집부터 구해야지.
지금까지 번 돈과, 갑옷을 판 돈이면 괜찮은 집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문제는 어디에 구하냐인데.
“어디에 집을 구할지 고민이네.”
“집은 어디든 정들면 고향이지 않을까요?”
“의외네. 난 네가 해남도로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해남도에 가면 좋지만, 거긴 너무 좁은걸요! 딱히 먹고 살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긴. 거긴 어업이 주력 산업인 곳이라 내가 딱히 할 일이 없긴 하지.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해남도를 지켜주는 것뿐이지만, 그 정도야 지금의 해남검문 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저씨를 무림맹에서 놔줄 것 같지도 않고요.”
“내가 무림맹에 묶여 있어야 할 이유는 없는데.”
“가가라면 아버지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지 않을까요?”
내 목에 휘감기는 새하얀 팔.
뒤이어 내 어깨에 얼굴을 올려놓은 서련이 장난스럽게 내 귓볼을 깨물었다.
“가가는 이제 중원의 영웅인걸요. 그 누구도 가가가 해남도에 들어가는 걸 원하지는 않을 거예요. 원한다면 차기 무림맹주 자리도 충분히 얻으실 수 있을걸요?”
그 정돈가?
아니 그 정도지.
생각해보면 내 나이에 지금 경지면 무림사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수준이니.
“그건 별로 구미가 당기는 일은 아닌데.”
내가 꽤 오랫동안 맹주랑 있어봐서 아는데, 저 자리 수십 년 동안 서류작업만 죽어라 하는 자리잖아.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서류의 산에 파묻히는 인생을 살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고생한 만큼 적당히 유유자적 살고 싶은 거지.
그러니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목으로 칼을 부순 다음에 거절할 생각이었다.
“후후, 가가는 욕심도 없으시네요.”
“그냥 늘어지고 싶어질 뿐이야.”
“으, 은공이라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경이도 깼나.
“뭐,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은 일단 씻어야지. 우리 꼴이 말이 아니잖아.”
“헤헤, 가랑이가 아직도 끈적해요.”
“저도 그렇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나는 한숨을 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으러 가자. 물은 아침에 준비해놓으라고 했으니-”
“다 같이 씻는 거예요?”
“그렇게 되겠네.”
이젠 거리낄게 없지.
우리는 조용히 옆 방에 있을 욕실로 향했다.
————
청해성을 수습하는 데에는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
무너진 성벽을 제외하면 의외로 내부의 피해는 아주 큰 편은 아니었으니까.
무너진 성벽은 본래라면 시간이 오래 걸렸겠지만, 중원이 좋은 게 뭐냐, 바로 넘쳐나는 인구수다.
어느 시대든 무시무시한 숫자를 자랑하는 중원인답게, 어려운 공사도 숫자로 밀어붙이니 금방 끝나더라.
그렇게 보수를 전부 끝낸 우리는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묘한 시선과 함께였다.
…너무 했나?
아니면 혼자서 연인들이랑 꽁냥대서 그런 건가.
어느 쪽이든 헛기침 한 번 하면 다들 시선을 피하는 게 퍽 우스웠다.
맹주님 빼고.
“크흠…”
딸사랑이 넘치는 건 알겠는데, 계속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건 언제까지 하시려는 건지.
“평화롭군…”
“녹림이나 장강수로채도 저희를 보고 감히 싸움을 걸 생각을 못할 거랍니다.”
하긴, 그날로 문 닫고 싶은 게 아니라면야 황군과 무림맹 무인들의 연합군을 건드릴 미친놈은 없겠지.
마교조차도 맘루크들 없이는 감히 전투를 걸어올 자신이 없을 텐데.
“그래도 좋지 않아요? 느긋하게 풍경 구경도 하고~”
“평화로운 게 좋긴 하지…”
평화.
참 기분 좋은 단어야.
아직 실감은 잘 안 나지만.
당장이라도 내가 몰랐던 전쟁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파르스까지 죽였는데도 아직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이제는 내 삶에 전쟁이 깊숙이 박혀서 빼내지 못할 수준이라는 건가.
“아저씨, 무슨 생각 해요? 얼굴이 심각해요.”
“그냥 전쟁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이제 전쟁 같은 생각은 그만두고 미래를 그리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미래라.”
혜령이가 꺼낸 달콤한 단어에 나는 미래를 떠올렸다.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늙어가는 모습이.
물론 지금 내 상황상 ‘평범’이라는 단어가 내 인생에 끼어들 여지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제 지긋지긋한 전쟁과는 안녕을 고해야 할 때가 아닐까.
과거의 악연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지금만큼 확실할 때는 없었으니.
“미래 좋지.”
“아이는 몇 명이나 갖고 싶어요?”
“글쎄.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애초에 3명이나 아내가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내가 일부일처제가 당연한 세상에서 살다 온 것도 컸다.
“전 딸 하나, 아들 하나 갖고 싶어요.”
“저, 저도 그렇습니다.”
“어머,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 인생 계획이 짜이는 느낌인데. 나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세 연인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안 가서 육아 지옥이 벌어지겠군.”
한 명도 힘들다는 게 육아인데, 여섯 명?
이건 그랜드마스터도 소화할 수 있을지 장담이 안 되는 시련이다.
물론 여섯 명이 동시에 나오지는 않을 테니 실제로는 내가 상상하는 것만큼 지옥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목표가 원대해서야 고생길이 훤한데.
“저희도 숫자가 많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유모도 구하면 되구요!”
유모라.
산파도 구하고 유모도 구하고 그래야겠지.
어째 갈수록 해야 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네.
가족 계획 쉽지 않구나.
그래도…
“인생 2막은 지금까지 보단 낫겠지.”
세상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쟁보다 지옥 같은 경험은 할 수 없을 테니까.
내 전쟁은 끝났으니, 나도 이제 인간 윌리엄으로 살아가면 되는 거다.
“이보게 사위.”
“예. 무슨 일이십니까?”
“고생하게.”
“예?”
“가장 노릇은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일세. 인생 선배로서 위로해주는 것이니 잘 귀담아듣게. 세 명한테 바가지 긁히면 경지고 뭐고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걸세.”
“제가 바가지 긁힐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래 보인다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 정도는 아닌…데.
왜 확신이 안 서지.
여기도 남편 노릇이 쉽지 않은 건가.
“아버지는 제가 가가를 못살게 굴 거라는 소리인가요?”
“련아,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 실망이에요.”
“련아…그런게 아니래도…”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맹주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초라해 보였다.
자업자득이니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돌아가면 당장 혼례 준비나 하자.”
“정말요?”
“이러다간 배부른 신부들이랑 혼례를 올려야 할 기세니까.”
몸에 무리가 가는 시기가 오기 전에 빨리 끝내야지.
어쩌면 이미 들어섰을지도 모를 테니.
나는 내 말에 배를 쓰다듬으며 배시시 웃는 혜령이를 바라보며 마음 편하게 미소 지었다.
서련이 내 볼을 찌를 때까지.
이제 얼마 안남았습니닷.
사실 저번편이 두 편 분량을 한 편에 우겨넣은 수준이라 의도치 않게 다이어트를 했습니닷.
뜌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