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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4

     

    “물리법칙은 작용하는 듯한데 배도 안 고프고 힘도 안 드는구나. 정지한 시간이라, 기묘한 현상이야.”

     

    아셀라는 멈춘 세상이 흥미로웠는지 이것저것 만져보며 앞서나갔다.

    그녀의 손에 닿은 이파리가 흔들리다가 금방 다시 정지한다. 마치 우리 주위에서만 시간이 조금씩 흐르는 느낌이랄까.

     

    “저기, 이쪽 방향이 맞나요? 빛의 결계석은 북쪽에 있잖아요.”

     

    리셰의 걱정에 아셀라가 팔을 내저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로 가는 편이 빨라. 마법도 작동하니 내가 게이트를 열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주면 되잖니.”

     

    “아하, 정말 그렇네요.”

     

    마계에는 우리가 타고 온 게이트 말고도 네 개가 더 설치되어 있었다. 각 마도사 부대는 마왕성 근처 곳곳에 잘 숨어서 포진해 있다.

     

    그녀의 말대로 다른 결계석까지는 걸어가는 것보다 게이트를 타는 게 훨씬 가깝다.

     

    아셀라 혼자서 게이트를 열 수 있으니 이런 공략법도 가능하네. 감탄했다.

     

     

    왔던 길을 반나절에 걸쳐 걸어 게이트에 도착했다. 마도사 부대는 별 탈 없이 그 자리에서 게이트를 지키고 있었다.

     

    ―화악!

    아셀라가 마나를 불어넣으니 금방 게이트가 열렸다.

     

    “용사, 출발하렴. 사흘 후에 다시 열어줄 테니 늦지 말고.”

     

    “네. 두 분도 조심하세요.”

     

    리셰가 먼저 게이트를 넘었다. 마왕성의 북동쪽 포인트다.

     

    “다음, 우리 차례야.”

     

    다시 게이트를 여는 아셀라. 나는 미리 멀미약을 먹고 진입했다.

     

     

    삽시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푸석푸석한 정글은 사라지고 검은 모래가 가득한 지역이 나타났다.

     

    “뭐니, 이건.”

     

    게이트를 타고 나온 아셀라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콧바람을 내뿜었다.

     

    이쪽 마도사 부대는 한창 전투 도중이었다. 마물에게 기습당한 모양이었다.

    마도사 다섯 명과 기사 다섯, 공룡형 마물떼가 그들의 머리를 집어삼키려 입을 벌린다. 잡아먹히기 직전인 위험한 사람도 있었다.

     

    “게이트 하나 못 지키고 한심하기는.”

     

    “마계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업입니다. 너무 나무라지 마시죠.”

     

    나는 그리 말하며 마물떼를 이리저리 옮기며 서로를 향해 입을 내밀도록 각도를 조정하려 애썼다. 워낙 덩치도 크고 무거워서 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일일이 언제 토벌하니.”

     

    아셀라가 마법을 시전했다. 마물들의 이마 정중앙을 향해 얼음창을 쏘아놓는다.

     

    시간이 다시 흐르면 삽시간에 쓰러지겠지.

     

    어리둥절할 마도사 부대를 위해 용사 파티가 왔다 갔다는 메모도 남겨놓았다.

     

    그러고 있으니 아셀라가 기사 두 명의 얼굴을 붙여놓고 있었다.

     

    “뭐 하십니까.”

     

    “이러면 얘들은 눈 떴을 때 깜짝 놀라지 않겠니. 숨겨져 있던 취향에 눈 뜰지도 모르고.”

     

    쿡쿡 악마처럼 웃는 아셀라.

    이럴 때도 악취미적인 장난을 치는 걸 보면 역시 본성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았다.

     

     

    목표는 멀지 않았다. 우리는 금방 결계 마법이 시전 중인 동굴을 찾았다. 지하 유적으로 내려가니 자동방위형 골렘들이 지키고 있었다.

     

    지금은 시간이 멈춰있어서 방어 능력은 하나도 없는 장식물이 되어버렸다. 레벨로 치면 거미 군주가 70, 얘들은 80즈음이다.

     

    절대 둘이서는 상대 못 할 수준이지만 유유히 사이를 지나 지하 유적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이 닫혀 있군요. 상당히 튼튼해 보입니다.”

     

    최하층에 도착하니 두꺼운 석문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미래에서는 문이 망가져 있었는데, 시간이 이른 나머지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였다. 콰아앙! 아셀라가 슥슥 진을 그리더니 폭음과 함께 문에 금이 쩌적 가며 갈라졌다.

     

    “이런 건 내부의 수분을 얼리면 쉽게 부서져.”

     

    “생활의 지혜로군요.”

     

    “그럼.”

     

    아셀라가 살짝 힘을 주니 몇십 센티는 되는 돌문이 조각조각 밀려났다. 파편이 공중에 떠 있는 게 꼭 무중력 속 같았다.

     

    안에서 제단 위에 올려진 짙은 보랏빛의 결계석이 눈에 들어왔다.

     

    “공간의 결계석입니다. 접촉한 대상을 무작위의 장소로 날려버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조심하시길.”

     

    나는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준비해온 봉인용 함에 결계석을 넣었다.

     

    “금방 끝났네. 돌아가자.”

     

    뭐가 그리 급한지 홱 몸을 틀고 또각또각 걸어나가는 아셀라.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용사에겐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저희는 여유가 있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돌아가지요.”

     

    “음… 그도 그렇네. 마법 연습이라도 할까.”

     

    “혹시 휴식의 뜻을 모르십니까?”

     

    지하 유적을 다시 올라와 동굴 밖으로. 산지를 걸으며 아셀라가 말했다.

     

    “모처럼의 기회잖아. 리치가 말했어. 마왕은 자기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한 마법사라고. 상대하려면 나도 빈틈없이 준비해야 해.”

     

    “휴식도 준비입니다. 저희 체감상으로 일어난 지 스무 시간이 넘었습니다. 수면을 취할 때입니다.”

     

    “안 졸려.”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몸은 안 힘들지 몰라도 수면은 뇌가 요구하는 현상입니다.”

     

    “아, 정말. 라스랑 똑같은 소리나 하고.”

     

    “짜증 내시는 걸 보니 더더욱 필요하신 게 틀림없군요.”

     

    아셀라가 고까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여전히 고집은 세구나.

     

    좋은 생각이 났다.

     

    나는 아이템박스를 열어 안에서 텐트와 침낭, 포션 하나를 꺼냈다.

     

    “숙면을 취하면서 좋은 꿈을 꾸게 해주는 루시드드림 포션입니다. 원하는 꿈을 꾸게 해주죠.”

     

    “원하는 꿈?”

     

    “예.”

     

    내 말에 아셀라가 관심이 생겼는지 포션을 향해 시선을 기웃거렸다.

     

    “…얼마나 생생한데?”

     

    “루시드드림은 자각몽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인식하면 안에서 생각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원하는 뭐든 할 수 있죠. 감각은 뇌가 느끼는 것이므로 현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예. 혹시 고트베르크와 만나고 싶으시다면 추천드리죠.”

     

    “하, 뭘 다 아는 듯이.”

     

    아셀라는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곧 내게서 침낭을 빼앗아갔다.

     

    “텐트 쳐.”

     

    “그러죠.”

     

    작전대로 됐다.

    아셀라를 재우려는 계획은 성공이다.

     

    리셰가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그동안 피로를 최대한 풀어주며 컨디션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줄 생각이다.

     

    그간 이래저래 스트레스받을 것도 많았을 테고, 전장에만 있었으니 아셀라의 성격상 제대로 잠을 잤을 리가 없었겠지.

     

    “쭉 들이키세요.”

     

    아셀라는 내가 주는 포션을 의심 없이 마시고는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라스가 날 안 싫어하면 좋겠어.”

     

    나는 텐트를 나섰다.

     

     

    “후우.”

     

    가면을 벗고 땀을 닦아냈다. 오랜만에 맨 공기를 맡으니 시원하네.

     

    “위장 포션 효과 끝내고.”

     

    아이템박스에 입고 있던 옷을 주섬주섬 집어넣고 양복과 백의를 꺼내 단정하게 챙겨입는다.

     

    머리가 좀 길었는데, 괜찮겠지.

     

    텐트로 돌아가 새근새근 잠든 아셀라를 확인했다. 그녀를 꺼내 업고는 이동을 시작했다.

     

    내가 아셀라에게 준 건 루시드드림 포션이 아니라 가벼운 수면유도제였다.

     

    애초에 루시드드림은 숙면 시에는 체험할 수 없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처방은 아니다.

     

    잠을 자게는 하겠지만, 그 전에.

     

    “아셀라.”

     

    파우스트가 아니라 라스로서 그녀와 만나보고 싶었다.

     

    뭐, 순전히 내 억지고 아셀라에겐 어울려주길 부탁할 뿐이니 의사로서 올바른 행동이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었다.

     

     

     

    ***

     

     

     

    새근새근 기분 좋게 자던 아셀라는 느껴지는 인기척에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어딘가 부드러운 곳에 놓여있다. 누군가의 허벅지라고 깨닫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황녀님.”

     

    그런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

     

    아셀라가 절대 잊을 리가 없던, 항상 듣고 싶어서 그리워하던 그 목소리였다.

     

    번쩍 눈을 뜬 그녀는 시야에 라스의 얼굴이 가득 차 있었다.

     

    아셀라는 자기도 모르게 사르르,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가득히 띄웠다.

     

    “오랜만이에요, 황녀님.”

     

    라스가 자신을 불러주자 아셀라는 가슴 깊은 곳부터 따뜻한 감정이 가득 차오르는 걸 느꼈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진다.

     

    …진짜다.

     

    따뜻한 체온도, 부드러운 감각도.

     

    어느 때보다도 진짜 같은 느낌이었지만 아셀라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꿈이구나.’

     

    닥터 파우스트, 분명 그도 환자를 여럿 미치게 한 의사가 틀림없었다. 이렇게 생생한 꿈을 보여주는 포션을 만들어내다니.

     

    그것도 가장 보고 싶었던 장면을.

     

    “라스.”

     

    “네, 황녀님.”

     

    “안아줘.”

     

    라스는 말없이 그녀의 요구에 응했다. 아셀라가 천천히 그의 옷가지를 당기며 상체를 일으키고, 그대로 몸을 맡기니 온몸으로 받아준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고 쓰다듬어주는 라스.

     

    정말이지 기분 좋은 꿈이었다. 그가 이렇게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준다니. 평생 깨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설령 꿈속이라도, 아셀라는 그에게 꼭 전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라스.”

     

    “네.”

     

    “미안해.”

     

    라스는 어리둥절한 태도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아셀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계속 사과하고 싶었어.”

     

    라스는 짐작 가는 곳이 없는 표정이었다.

     

    “사과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해야지요. 그렇게 황녀님을 떠나버렸잖아요. 설마 그래서 마계같이 위험한 곳까지 오시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라스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걸리게 된다.

     

    라스가 내가 여기 있다고 알 리가 없는데.

     

    “아냐, 그래서 싸우려고 한 게 아니야.”

     

    아셀라가 고개를 숙이며 성토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네게 돌아가고 싶어서, 네게 사랑받고 싶어서 싸우기로 했어.”

     

    “예…?”

     

    “라스.”

     

    아셀라의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침착하게 있고 싶어도 몇 년 만에 본 그의 모습은, 코로 들어오는 그의 향기는 너무나도 자극이 강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기도 바쁘다.

     

    “언젠가, 내가 당당해져서 네게 돌아가면.”

     

    아셀라가 애원하듯 부탁했다.

     

    “나를… 사랑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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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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