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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4

       5살 이전의 일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된 사건은 어린 시절의 일이라고 해도 선명하게 남기 마련이었다.

         

       레이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4살 때의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마차 사고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다가 막 퇴원한 참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와서 그럴까. 집도 거리도 심지어 자신을 데리러 온 아빠도,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아빠는 집에 오자마자 그녀를 후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 벤치에는 엄마가 앉아 있었다. 엄마는 마치 나무토막처럼 미동도 없이 멍하니 정원 구석의 빈 그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초췌한 몰골. 눈 뜬 채로 죽은 게 아닌가 싶었다.

         

       “여보, 이것 좀 보시오. 레이나가 다시 돌아왔소. 건강한 모습으로 말이오.”

         

       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엄마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딸의 모습을 본 순간 초점 없었던 눈동자는 빛을 되찾았다.

         

       “레이나?”

         

       솔라네는 딸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중간에 한 번 넘어져서 신발이 벗겨지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맨발로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혹시나 시선을 돌린 사이 딸이 사라질까 두려운지 땅에 무릎이 쓸리는 와중에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솔라네는 딸 앞에 무릎을 꿇고 딸의 얼굴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졌다.

       이 눈, 코, 입. 분명 그녀의 딸인 레이나였다.

       솔라네는 그녀를 꼭 품에 안고 눈물 젖은 얼굴을 마구 비벼댔다.

         

       “역시 살아있었구나! 여보, 맞죠? 내 말이 맞았죠? 그러면 그렇지. 의사가 무슨 실수를 한 거지? 그래. 이상하다 싶었어. 우리 레이나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가망이 없다느니 이상한 소리나 하고. 엄마 얼굴 기억하니? 응? 두 달 만에 봤다고 까먹은 건 아니지?”

         

       그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실제로 그녀는 지난 두 달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잠자는 것도 멍하니 있다가 기력이 다해 실신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종종 딸의 환영을 보고 울부짖기도 했다.

         

       “레이나가 놀라겠소.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아직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거 같더구려.”

         

       남편의 달램에 솔라네는 눈물을 닦고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미안, 레이나. 엄마가 너무 걱정했거든. 레이나가 이렇게 멀쩡한데 신부님은 자꾸 우리 딸을 묻으려고 하고. 땅속은 차가웠니? 외로웠지? 미안. 엄마가 다시는 우리 레이나 손을 안 놓을게. 알았지? 엄마랑 계속 붙어 있는 거다?”

         

       레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혼수상태여서 그럴까. 모든 게 낯설고 떨떠름했다.

         

       다행히 그런 어색함은 며칠 가지 않아 사라졌다.

       아빠와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고, 자신이 썼던 그림일기를 읽고, 아빠와 엄마가 속삭여 주는 추억을 들으면서 그녀는 금방 원래의 자신을 회복해나갔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즐거운 나날이었다.

       특히나 재밌던 것은 곡예 연습이었다. “백텀블링을 했었더라면 마차를 피할 수 있었을 거야!”라는 엄마의 주장에 어린 나이에 몸을 단련하는 것을 시작했다.

       일류 곡예사인 두 사람은 딸에게 아낌없이 재주를 가르쳐 주었다. 레이나는 배우는 족족 그것을 흡수해 나갔다.

         

       “대단하지 않소? 나나 부인의 어렸을 적보다 더 뛰어난 거 같은데…….”

       “우리 딸이 예전에는 이렇게 재능있는 줄 몰랐는데요? 후훗, 우리가 잘 가르친 덕분일까요? ‘천재는 만들어진다’라고 하잖아요.”

         

       그 말에 지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들어지긴 무슨. 타고난 거겠죠. 부인과 제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 고작 4년. 엄마는 그녀가 8살 때, 병으로 돌아가셨다.

         

       지몬은 레이나가 어렸을 적에 쓰던 물건들을 모두 아내의 관에 함께 넣었다. 그리고 매장이 끝나고 조문객이 모두 떠난 후에도 한참이나 묘비 옆을 지켰다.

         

       아빠는 엄마의 묘비 옆에 돌멩이를 쌓아 작은 묘비를 만들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 아마 석공이 만든 반듯한 비석이 아닌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을 엄마에게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매년 엄마의 기일마다 아빠는 그 옆에 돌멩이로 비석을 쌓는 것을 반복했다.

         

       엄마의 죽음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그날 이후로 자신을 대하는 아빠의 태도가 변했다.

         

       “저……아빠?”

       “아빠라고 부르지 마라!”

         

       지몬의 싸늘한 대꾸에 레이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그는 딸의 겁먹은 눈동자를 보고는 잠시 표정을 풀었다가 다시 굳히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나. 너도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잖니. 언제까지 아빠 소리를 할 거냐. 아버지로 부르거라.”

         

       갑자기 아빠, 아니, 아버지가 왜 자신을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알겠어요, 아버지.”

         

       9살.

       그녀는 아버지를 이해하려 했다.

       어머니를 잃은 탓에 많이 상심하신 거겠지. 우리 둘이서만 즐겁게 지내면 어머니에게 죄짓는 기분이 들어서 미안하니까.

         

       10살.

       본격적으로 곡예사가 되기 위한 연습에 들어가면서 아버지의 태도는 더 엄격해졌다. 그래도 레이나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 방식이 달리진 것일 뿐이다.

         

       열심히 해서 두 분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곡예사가 될 거야.

       나는 두 분의 딸이니까.

         

       11살.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욕을 들었다.

       아버지는 그녀의 작은 실수 하나하나를 혹독하게 평가했다. 간단한 재주만 펼쳐도 세상 제일의 재능이 나타난 듯 기뻐하는 아버지는 더 이상 없었다. 그녀 자신도 그것이 꿈속의 일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버지는 그녀를 가혹하게 대했다.

         

       12살.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맞았다. 단련이라는 명목을 앞세우긴 했지만, 자신을 걷어차는 아버지의 눈동자에는 분명 증오가 어려 있었다.

       내가 잘못한 거야. 아버지가 화낼 만해. 아버지의 이름에 모자라는 실력을 지녔으니까.

         

       13살.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금지당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원래 공연에서 사적인 친분을 과시하면 팀워크가 무너지잖아? 아버지의 말이 옳아. 내가 여기서 어리광 피우면 안 되는 거야.

         

       14살.

       처음으로 패배를 경험했다. 그녀보다 3살 많은 시골 서커스 학교 출신 남자애였는데, 놀라운 실력을 지녔다. 확실히 세상은 넓었다.

       아버지는 수치스럽다며 그녀의 데뷔 계획을 뒤로 미뤘다.

         

       15살.

       아버지가 자신을 ‘돈값 못하는 년’이라고 불렀다.

       그동안 키워준 비용이 아깝다는 것일까?

       그날 방에 들어가 앨범에 고개를 파묻고 엉엉 울었다.

         

       16살.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용모는 점점 더 돌아가신 어머니와 닮게 되었다.

       금발에 큰 키, 성숙한 몸매.

       어머니와 친했던 주변 인물들은 현의 마술사가 돌아왔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을 바라보는 아빠의 시선은 더욱 싸늘해졌다. 가끔은 혐오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곤 했다.

         

       잘못 봤겠지.

         

       그리고 17살.

       레이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애의 영혼을 바라봤다. 반투명한 모습이긴 했지만,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어린 자신이었다.

       평소에 앨범을 날짜순으로 꼼꼼히 정리해뒀기에 그녀는 그게 몇 살 때의 모습인지 알아차렸다.

       4살 때였다.

         

       “엄마, 손님이에요! 공연 시각에 너무 일찍 도착했는데 엄마가 보고 싶대요! 그래서 제가 놀다 말고 데려왔어요!”

         

       꼬마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엄마라니.

       네가 뭔데 우리 엄마를 엄마라고 불러?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불안감이 가슴 안에서 꿈틀거렸다.

       저 미친 꼬마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까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래, 레이나. 잘했단다.”

         

       레이나? 누가 레이나인데?

       그녀는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엄마의 모습을 다시 살폈다. 혹시 동명이인이 아닐까? 어쩌면 가짜일지도 몰라. 서커스 업계에서는 명성이 좀 쌓이면 비슷한 짝퉁들이 나타나니까.

         

       그러나 레이나는 자신을 향하는 목소리, 눈빛, 손짓을 보고 감히 그녀가 엄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반가워요. 저는 판타스틱 플로어의 극장주인 레이디 판타스틱이라고 합니다. 무슨 볼일이시죠?”

         

       레이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면을 벗고 딸이 여기 왔음을 엄마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무의식이 그걸 거부했다. 그녀는 대신 솔라네의 손에 든 악기를 가리켰다.

         

       “그, 그게……베이스 연주를 잘하신다고 하셔서요. 제 연주를 들어주셨으면 해서…….”

       “아, 혹시 다섯 합주에 참가자신가요?”

       “네? 네……네!”

       “후후, 저도 다음 주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어요. 들어보고 싶네요. 경쟁자분의 솜씨가 어떨지. ”

         

       레이나는 솔라네의 악기를 빌려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는 아버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악기를 뺏어서 바닥에 내동댕이칠 정도로 형편없었다.

       엄마 앞이라고 잔뜩 긴장한 탓도 있었고, 가짜 레이나의 눈치를 보느라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무엇보다 곡 자체의 완성도가 떨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그녀가 7살 때 혼자서 만든 곡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울림이네요. 하지만 이렇게 긴장해서야 중앙 광장의 무대 위에 설 수 있겠어요?”

         

       그녀의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지적에 레이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제 이 사람을 엄마라 아니라고 의심할 수 없었다. 마치 살아있을 때의 엄마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곡 선정도 베이스에 어울리지 않아요. 어째서 이런 곡을……?”

       “……들어보신 적 있나요?”

       “아뇨. 처음 들어보는데요.”

         

       레이나는 하마터면 큰 소리로 탄식을 내뱉을 뻔했다.

       그만큼 그녀가 느끼는 좌절은 컸다.

         

       “제가 7살 때, 어머니 생일에 바치는 곡이었어요.”

       “아, 그래서 어쩐지 축가이면서 어린애의 유치함이 있다고 했어요. 우리 딸이 있어서 그런 곡을 고르셨나 보군요.”

         

       우리 딸?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엄마가 자신 말고 다른 아이를 딸이라고 부르는 것은 참기 힘들었다.

         

       아빠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분 앞에서 원더스타인 단장님 볼에 입을 맞췄을 때?

         

       아니, 그보다 어째서.

       어째서 엄마는 이걸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이건 중요한 기억이잖아. 내가 작곡한 첫 노래인데. 엄마의 생일날을 위해 준비한 곡인데.

       엄마는 그렇게 좋다고, 감동스럽다고, 평생 못 잊을 거라고 말해놓고…….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엄마.”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순간 그녀의 입은 야속하게도 재빨리 다음 말을 갖다 붙였다.

         

       “……라고 아까 아이가 부르더군요.”

         

       레이나는 그녀가 뭐라고 변명하길 기대했다.

         

       여긴 정령이나 요정 같은 것들이 많잖아. 아, 그래. 환상이 아닐까? 내가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가짜 인형을 만든 거야. 어쩌면 최면일지도 몰라. 아니, 체인질링! 뻐꾸기처럼 자기가 진짜 자식인 척 인간 사이에 섞여드는 요정이 있다고 들었어. 그게 아닐까?

         

       하지만 솔라네의 다음 말은 그녀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네. 레이나. 제 사랑스러운 딸이죠.”

         

       그녀는 품에 안은 어린 레이나을 쓰다듬어 주었다.

         

       “헤헤.”

         

       큰 레이나는 엄마의 무릎 위에 앉아 눈웃음치는 그 가짜를 붙잡아 패대기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거긴 내 자리인데.

       그런데 왜 네가 그걸 자기 것인 양 차지하고 있는 거지?

       

       “딸이 일찍 죽었나 봐요.”

         

       레이나는 말을 내뱉고 자신도 놀랐다. 그 목소리에는 자기도 모르게 악의적인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딸을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 야속한 엄마에 대한 원망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솔라네는 아무런 이상한 점을 못 느끼고 웃으면서 어린 레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사실 저보다 4년 먼저 죽었어요. 하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함께 했죠. 딸이 제 수호령이 됐거든요.”

       

       레이나는 아까 첸 호크가 해준 말이 기억났다.

       강한 원한이나 집념 때문에 저승으로 오지 못하고 지상을 배회하는 영혼들도 있다고 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악령을 떠올렸는데, 저런 경우도 가능하다는 건가?

         

       “수호령이요?”

       “네. 아, 그렇지만 저는 절대 좋은 엄마가 아니에요. 저는 죽고 나서 알았거든요.”

         

       순간 레이나의 직감은 외쳤다.

       지금이 질문을 멈춰야 하는 때라고.

       여기서 뭔가를 더 캐물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불길한 마음을 억누르며 질문했다.

         

       “뭘 말인가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은 찰나였지만, 그녀에겐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솔라네의 입이 열렸고,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천둥처럼 레이나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딸이 4살 때 죽었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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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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