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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4

       “저, 그, 사라야.”

        

       공부하다가 문득 손아름이 나를 불렀다.

        

       “응?”

        

       노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자, 나와 눈이 마주친 손아름은 시선을 살짝 피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쳐서 부끄러운가?

        

       “만약에 내가 보여준 노트필기로 성적이 오르면, 기쁠까?”

        

       “어…… 아마, 기쁘겠지?”

        

       사실 ‘아마’ 기쁜게 아니라 확실하게 기쁘기는 할 것이다. 성적이 좋다고 불행한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소수의 특이 취향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만약에 그러면 그때 가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어…… 지금은 안되고?”

        

       왠지 말을 저렇게 하니까 좀 불안한데. 사실 나는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줄 수 있는 재력이 있다. 가령, ‘나 집 좀 사줘’, ‘나 차좀 사줘’ 같은 황당한 부탁도 아주 쉽게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물론 그런 부탁을 들어주기 시작하면 정말 한도 끝도 없으므로 아무 부탁이나 들어줄 생각은 없긴 하지만.

        

       손아름이 그 정도의 부탁을 할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응. 지금보다는, 그때 가서 부탁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 그렇구나…….”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뭔가 촉이 엄청 좋지 못했다.

        

       이거 완전히 고백 멘트 아닌가? 눈치 없는 남주인공이 여주인공한테 고백받기 며칠 전 이벤트 같은…….

        

       “그 만년필, 써주고 있었구나.”

        

       “어? 아, 응.”

        

       손아름은 내 오른손에 들린 묵직한 만년필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만년필은 비교적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뚜껑을 닫아두면 사실 뚜껑 볼펜과 구분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어쩌면 조금이라도 내가 쓸 걸 염두에 두고 쓰기 편한 형태를 골라 선물했는지도 모르겠다.

        

       찾아보니 엄청나게 비싼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등학생 기준으로는 선물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이기도 했다. 뭐, 어디까지나 ‘평범한’ 고등학생 수준에서의 이야기지만.

        

       ……만약 화영 고등학교의 일반 학생 기준이었다면 또 가격이 달라지긴 할 거다.

        

       뭐, 가격 비싼 만년필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도 없긴 하지만.

        

       “쓰기 괜찮아? 불편하지 않아?”

        

       “응, 꽤 괜찮아.”

        

       자세를 조금 신경 써야 하는 것을 빼면, 의외로 괜찮은 선물이었다. 그냥 평범한 노트에 썼다면 종이에 잉크가 스며들어 뒤쪽이 다 비쳐 보였겠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해야 하나, 이 집에 굴러다니는 노트 중에서 고급품이 아닌 노트는 없었다.

        

       그러니까, 뭐. 종이에 사각거리며 쓰는 감각이 꽤 좋았다. 기왕 선물 받은 거 그냥 방치하는 것도 조금 그렇잖아.

        

       “그렇구나…….”

        

       내 칭찬에 손아름은 부끄럽다는 듯 몸을 베베 꼬았다.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나는 잠깐 생각해보다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친구들과 선물을 열심히 주고받는 성격은 아니었고, 그런 것에 큰 의미를 두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내가 선물한 것을 상대가 즐겁게 사용하고 있다면 기분이 좋긴 하겠지.

        

       그렇게 평화롭게 대화하고 있는데,

        

       까드득.

        

       굉장히 뜬금없이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이가 들고 있는 볼펜 끄트머리가 우그러져 있었다.

        

       “…….”

        

       그리고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아서 나는 좀 무서웠다.

        

       “……괜찮니?”

        

       “응? 어, 어어.”

        

       하늘이는 그제야 자기가 볼펜을 씹었다는 것을 알았는지 화들짝 놀랐다.

        

       “괜찮지! 그냥 조금 집중을 심하게 했나 보다. 아, 계속 앉아만 있었으니 피곤하네~”

        

       척 보기에도 대놓고 연기하는 톤이었지만, 나는 그런 하늘이를 굳이 자극하지는 않기로 했다.

        

       “우리 조금 쉬면서 뭐 좀 먹을까?”

        

       하늘이가 무안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길래, 나도 모르는 척 그 뒤를 따라 일어났다.

        

       *

        

       협상 테이블은 언제나 사라가 샤워하는 도중에 펼쳐진다.

        

       세 사람이 사라를 빼두고 이야기할 타이밍이 딱 그때뿐이었으니까.

        

       사라는 거의 언제나 세 사람 중 하나와 같이 있었고, 사라의 정조가 위험해질 때는 세 명이 함께 있을 때가 아닌, 사라와 다른 아이 단둘만 있을 때였으니까.

        

       지금까지는 다소 안일하게 생각했지만, 유하늘과 신소희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정조를 위협할 상황’이 자신들에게만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지난번 이수아의 그 행동으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크게 깨달았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세 사람은 그때 협상할 생각이었는데—

        

       “아, 미안. 나 집에서 잠깐 불러서.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아, 그래?”

        

       샤워하려고 일어난 사라에게, 이수아가 갑자기 집에 가겠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사라가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저런 일을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계속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는 세 사람이었다. 당연히 이수아가 이렇게 나오니 잠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을 흘끗 바라보고, 다시 사라를 보며, 이수아가 말했다.

        

       “응. 급한 일이라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오늘 안에’는 돌아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

        

       이수아의 그 말이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진 것은 사라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럼, 다녀와야…… 겠지?”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야 당연히 이상할 수밖에.

        

       ‘다녀온다’는 개념은, 보통 ‘자기 집’에 적용하는 말이다. 따지자면 이수아는 ‘사라의 집에 와 있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제대로 된 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보낸 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다. 사라 입장에서는 이수아가 이렇게 말하면 조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기서 두 사람 모두 그 단어의 차이를 알고도 굳이 지적하지 않는 것은, 사라가 그걸 깨닫고 두 사람에게도 똑같지 않냐고 물어볼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

        

       실제로도, 사라는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마치 어떻게 떨어져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의 표정.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이걸 일부러 깨버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세 사람 중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앞까지 데려다줄까?”

        

       결국 사라는 생각을 포기했는지 그렇게 물었다.

        

       “응!”

        

       이수아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당했네.”

        

       탁자에 앉은 신소희가 머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그러게, 그렇게 도망갈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

        

       유하늘이 다리를 덜덜 떨면서 말했다.

        

       두 사람 다, 엄청나게 불안한 기색이었다.

        

       이수아가 협약을 멋대로 해석하고 사용하더라도, 오늘 사라의 샤워 시간에는 제대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 그 시간에는 방에 세 사람만 남으니까.

        

       협약은 사라 없이 세 사람만 있을 때 바꿀 수 있다. 묘하게 사라를 따돌리는 느낌이라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라한테 그 ‘협약’을 들키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전화도 안 받아.”

        

       유하늘은 전화기를 노려보며 말했다. 마치 거기 이수아가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통화라도 되면 ‘세 사람이 같이 있는’ 상황이 되니까. 그 상황을 피하려고 도망간 이수아가 그걸 허용할 리가 없다.

        

       “……사라가 얼마나 오래 씻더라.”

        

       “…….”

        

       신소희의 중얼거림에, 유하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꽤 오래 씻는 편이지. 요즘 생각이 많아졌으니까…….”

        

       다만 ‘그 시간’이 그렇게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길 때는 거의 한 시간 정도 욕조에 몸을 담그기도 하고, 급할 때는 순식간에 샤워만 하고 나오기도 했으니까.

        

       쏴아— 하고 물 쏟아지는 소리를 잠시 듣다가, 신소희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쫓아갈 거야, 말 거야. 빨리 정해. 빠를수록 좋으니까.”

        

       “…….”

        

       유하늘은 잠시 생각하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쫓아가자.”

        

       “좋아.”

        

       바로 따라 일어난 소희였다.

        

       *

        

       샤워를 끝내고 나왔는데, 방 안에 하늘이, 소희, 수아 세 사람이 없었다.

        

       대신 있는 사람은 양혜인이었다.

        

       “어…….”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다른 애들은요?”

        

       “갑자기 볼 일이 생겼다고 잠깐 나갔다 오신다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아, 그래요……?”

        

       어, 음…….

        

       뭐지, 나도 뭔가 일이 있어야 하는 건가? 부모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도피 중이라서 문자나 전화가 오지 않은 건 아닐까?

        

       ……뭐, 우연이겠지.

        

       “오늘은 제가 머리카락을 말려드리겠습니다.”

        

       “아, 네…….”

        

       나는 일단 양혜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의자에 앉은 내 뒤로 양혜인이 다가왔다.

        

       머리카락을 손으로 몇 번 정도 잡아서 부드럽게 늘어놓고, 헤어드라이어를 멀리 떨어뜨려서 최대한 머리카락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머리를 말린다.

        

       “…….”

        

       “…….”

        

       나와 양혜인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사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음, 생각해보면 요즘에는 양혜인과 이렇게 단둘이 있을 시간도 없었다.

        

       “요즘 일은 안 힘들어요?”

        

       아직도 집안일은 양혜인에게 다 맡기고 있다. 가끔 친구나 그룹을 끌고 오면서도 양혜인 하나한테 계속 맡긴다는 것이 조금 켕겨 그렇게 물었더니,

        

       “예,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할 수 있어 기쁩니다.”

        

       ……그런, 조금은 ‘보통’에서 벗어난 대답이 돌아왔다.

        

       “…….”

        

       무겁다.

        

       대답이 무겁다……!

        

       대체 그 세 아이는 갑자기 무슨 일이 터져서 사라진 거야.

        

       빨리 돌아와서 이 어색한 분위기를 좀 희석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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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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