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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5

       에테르는 유리창 위로 고개만 슬쩍 내밀었다.

       

       교실 맨 앞자리에 학생이 두 명.

       

       그중 한 명은 인족 소녀였고, 다른 한 명은 금안족 소녀였다.

       

       금안족 소녀라.

       

       아무래도 저 아이가 세실 르네이 총장이 말한 레니냐라는 학생이겠지.

       

       하이엘프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것치고는 안색이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저 금안족 곁에 앉아있는 소녀가 문제였다.

       

       로테 살리에르.

       

       저 녀석이 혹여 자신이 마수라는 것을 알아보고 신고하기라도 한다면 그날로 카우렐리아에서 철수해야 한다.

       

       아니, 철수가 뭔가. 그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다.

       

       여기서 발각되면 최상급 정령들에게 둘러싸여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확률이 더 컸다.

       

       흑주를 완성하기도 전에 정령에게 당해 죽는다니. 상상만 해도 이가 갈린다.

       

       “크흠.”

       

       진정하자.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알았으니 일단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크게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차분하게 지내셔야 합니다.’

       

       눈동자를 염색해 준 기술자의 말을 떠올리고는 가져온 손거울로 얼굴을 비추었다.

       

       로테를 마주치고 놀란 모양인지 눈동자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주 잠깐, 홍채가 노란빛으로 명멸하기도 했지만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젠장.”

       

       로테 살리에르의 담임이 되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아무래도 여신이 뒷공작을 벌인 모양이다.

       

       근거?

       

       그럴싸한 근거야 하나 있다.

       

       일리야드 아카데미의 총장, 세실 르네이. 그녀는 최상급 정령을 넷이나 지닌 거물이다. 어쩌면 그녀가 거느린 정령이 여신에게 귀띔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세실이 자기 정체를 알았다면 가만두지 않았겠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계획이 하나라도 틀어져선 안 된다. 적당히 교사 역할을 수행하다가 신호가 오면 아카샤와 함께 세계수를 불태우는 거다.

       

       “후우.”

       

       에테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문을 다시 열었다.

       

       드르륵!

       

       “안녕하세요, 선생님.”

       “으응, 안녕.”

       

       로테 살리에르와 인사를 나눈다. 로테는 햇님처럼 포근한 미소를 지었지만, 에테르에겐 독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편했다. 3개월 전까지 같은 학교 학생이었던 소녀를 가르치게 되다니.

       

       그것도 같은 반 교실에, 담임까지 맡아서 말이다.

       

       에테르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려던 한숨을 참아내며 교탁에 교보재를 올려놓았다.

       

       한편 로테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얼떨결에 인사를 건네긴 했지만 설마 친구가 아카데미 교수로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굳이 찾아오거나 찾아갈 필요 없이 한 교실에서 일 년간 생활하게 되었으니, 에테르를 애타게 찾던 로테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적이었다.

       

       혹시 여신님께서 손속을 써 두신 게 아닐까?

       

       막 이래.

       

       “선생님.”

       “…응?”

       

       이런저런 생각을 늘어놓길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 레니냐가 교탁 앞으로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니냐라고 해요. 저기…….”

       “말하렴.”

       “선생님께서는 여기 반 담임이신가요?”

       “그런데. 왜?”

       “아뇨, 일찍 오셨길래 그냥 다른 분처럼 왔다 가시는 줄로 알았어요.”

       

       레니냐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선생님은 저 같은 금안족은 싫어하시나요?”

       

       에테르는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

       

       물을 마시고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사방에 분무질했을 정도로 어이가 없는 레니냐의 어퍼컷에, 에테르는 잠시 정신줄을 놓았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게, 절 싫어하는 교수님들도 많으셔서요.”

       “금안족이라고 해서?”

       “네.”

       

       폐부의 산소를 모조리 토해낸 것처럼 숨이 턱 막혀왔다.

       

       이 아이를 대체 어찌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에테르’는 연구하거나 지식을 전달할 줄만 알았지, 스승으로서 학생을 대해 주는 것에는 영 서툴렀다.

       

       “아니, 내가 널 차별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것이 에테르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다. 그러자 레니냐의 안색이 환한 조명처럼 밝아지기 시작했다.

       

       금빛 눈동자를 반짝거리던 레니냐는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교탁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선생님, 1년간 잘 부탁드릴게요.”

       

       박하 맛 별사탕이 가득 든 작은 유리병이었다. 병목에 분홍색 리본이 달린 것이 포인트라면 포인트였다.

       

       “이게 뭐니.”

       “선물이에요.”

       “그, 그래. 고마워.”

       “그럼….”

       

       레니냐는 귀를 파닥거리며 로테 옆자리로 돌아갔다.

       

       저긴 원래 내 자린데.

       

       “……?”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에테르는 머리를 풀어 헤치며 고개를 상하좌우로 흔들었다. 이제 기껏해야 3월인데, 벌써 더위를 먹은 모양이다.

       

       “허어.”

       

       자, 다시 한번 진정하는 거다.

       

       벌써 때려치우고 연구실에 틀어박히고 싶었지만, 일단 어떻게든 해봐야 한다.

       

       아직 조례시간까진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한숨 돌릴 여유가 있었다.

       

       에테르는 로테의 시선을 최대한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칠판 분필을 점검한다든지, 오늘 OT 내용을 점검한다든지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교실로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하는 학생들.

       

       에테르가 맡은 특별반은 원래 예정에는 없던, 그러니까 급조된 반이었기 때문에 학생 명단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차례대로 입실하는 학생들의 얼굴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 정말이지.

       

       들어오는 얼굴들이 하나같이 봐줄 만했다.

       

       “버멜이랑 프레이잖아? 너희가 여긴 어쩐 일이야?”

       “학교 이원화됐잖아! 헤를라인 선생님이 나는 수업 여기서 들어도 좋다고 하셨어!”

       

       세 사람은 서로를 얼싸안으며 조용하던 교실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에테르는 식은땀이 흘렀다.

       

       로테에 이어 버멜과 프레이까지. 벌써 에테르를 기억하는 사람이 셋이나 모였다.

       

       아니, 이제 넷이구나.

       

       “아.”

       

       토방 위에 얹어진 눈가루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뒤이어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 소녀에게로 집중됐다.

       

       엄청나게 아려한 미모라서?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저기, 저 애 말이야. 앞에 계신 교수님이랑 거의 똑같이 생기지 않았어?”

       

       누군가의 그 말에 에테르는 1분간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구면인 사람이 하나, 둘, 셋….

       

       거기에 아카샤까지 합쳐서 넷.

       

       아카샤는 당장 같은 편이긴 했지만, 하필이면 똑같은 외모가 나머지 세 사람에게 단서를 제공하고야 말았다.

       

       특히 로테. 그녀는 아카샤와 에테르를 동시에 만나본 유일한 존재였다.

       

       게다가 버멜에게도 자신에게 쌍둥이 여동생이 있다고 말한 적 있었다. 틀림없이 금방 눈치채겠지.

       

       그나마 속이기 쉬운 건 프레이인데….

       

       “어디서 아는 사람 냄새가 나.”

       

       프레이가 여우 수인이라는 걸 깜빡했다.

       

       마수라고는 해도 체향이 없는 건 아니다. 어느 환경에 오랫동안 머무르면 그에 맞는 향취가 생긴다고 해야 하나.

       

       프레이는 그걸 귀신같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카샤와 같은 반에 있는 것이 완전히 독이었다.

       

       그러니까…. 포석이 하나, 둘, 셋, 네 개였다.

       

       그냥 당한 게 아니라, 아주 호되게 당한 셈이다.

       

       또 다른 자신은 상상 이상으로 계략에 능했다. 이대로라면 반드시 들킨다. 버멜, 로테, 프레이 중 한 명이라도 알아채고 신고하면 그대로 게임 끝이다. 그리 생각하니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어라, 프레이 수인족이었어?”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프레이는 모자를 안 쓰고 있었다.

       

       로테는 프레이가 요호라는 걸 몰랐기에 살짝 놀란 눈치였다.

       

       “혹시, 내가 이래서 실망했어?”

       “아니야. 귀여워.”

       

       그래도 별다른 혐오 없이 받아주는 로테였다. 귀엽다는 칭찬에 프레이는 헤실거리며 허리춤 사이로 꼬리를 살랑거렸다.

       

       다른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프레이가 수인이라고는 해도 그다지 신경 쓰질 않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게, 수인족을 싫어하는 건 주로 인간이었으니까.

       

       숲과 친한 우드엘프는 수인과도 사이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물론 작정하고 싸우는 경우도 있었지만, 현재 마수라고 낙인 찍힌 금안족처럼 인식이 완전히 망가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엘프들은 마법을 못 다루는 자들을 더욱더 혐오했다. 마법은 곧 정령이나 여신과 소통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녕, 처음 보는 친구들이네. 너희도 이거 먹을래?”

       

       레니냐는 버멜과 프레이, 아카샤에게도 별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이제 보니 저것이 친해지고 싶다는 레니냐 나름의 표현이었다.

       

       혹여 저렇게라도 안 하면 엘프 학생들과 어울릴 수 없었던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쨌든.

       

       “크흠.”

       

       시계를 확인한 에테르가 헛기침을 했다.

       

       그와 동시에 학생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모였다.

       

       슬슬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할 때였다.

       

       “일리야드 아카데미 특별반에 모인 2학년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저는 여러분 반의 담임 겸 마도수리학 과목을 맡게 된 아스테야 하이젠버그 교수라고 합니다.”

       

       일단 사전에 준비해 둔 멘트를 술술 내뱉는다.

       

       물론 대본 없이도 할 수 있는 인사치레에 불과했지만.

       

       “여러분께서 알다시피 일리야드와 틸레트는 비슷한 시기에 마수에게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총장님께선 반대를 무릅쓰고 제국과 협력하여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바로 일리야드와 틸레트를 잠시 통합 운영하는 것이지요.”

       

       몇몇 학생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특히 오른쪽 구석에 앉아 있는 엘프 여학생의 눈빛이 똘망똘망하게 빛나고 있었다.

       

       “…해서 여러분들은 총장님의 지시로 인해 여러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엘프, 인간, 수인족, 그리고 금안족도 하나 있습니다. 각 종족 여러분은 힘든 시기에 싸우거나 혐오하지 마시고 서로 도우며 살 수 있도록 마음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말하다 보니 어린애들 다스리는 것처럼 되긴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처음치고는 무난하다고 생각한다.

       

       에테르는 시계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질문 있으면 하세요.”

       

       시간 잡아먹는 덴 이만한 필살기가 없다. 학부생 시절에 교수님들이 자주 사용해서 자기도 해 보고 싶었는데. 이거 생각보다 유용한데….

       

       “…….”

       

       또 머리가 아프다.

       

       뭔가 기억이 마구잡이로 섞인 느낌.

       

       하지만 편두통이 온다고 수업을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버멜이나 다른 학생들이 서로 정보교환을 하거나 아카샤에게 말을 걸기라도 한다면 세계수 방화가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질문 없으면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에테르는 남은 OT를 진행하며 병렬로 사고를 돌렸다.

       

       조금 생각해 보니까 알 것 같았다.

       

       들키는 건 완전히 시간문제였다. 오늘 OT가 끝나고 나면 아카샤나 자신에게 개인적인 질문 폭격이 들어올 게 뻔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타개할 수 있는가.

       

       비록 임시방편이기는 하겠지만, 괜찮은 해결책 하나가 방금 떠올랐다.

       

       “OT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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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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