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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5

     

    “황녀님.”

     

    라스가 아셀라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의 약혼반지가 맞닿으며 짤그락 소리를 냈다.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아셀라의 애원.

     

    쿵, 쿵.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긴장한 아셀라의 심장이 어느 때보다도 빨리 뛰었다.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현실로 착각해버릴 듯한 여기에서라면.

     

    눈앞의 라스가 한 말을 꼭 진짜 라스가 한 말처럼 받아들일 것만 같아서.

     

    그가 자신을 거부한다면… 지금껏 붙잡아왔던 실낱같은 희망이 부는 바람에 쓸려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알고는 있어.’

     

    아셀라는 원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황녀라는 신분으로서, 황족이라는 인외의 존재로 태어나서 황실의 의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본능은 숨길 수 없었다.

    진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저 지금까지 회피하며 눈을 돌리고 있었을 뿐.

     

    황실이 미웠다.

     

    카밀라가 미웠고.

     

    때로는 평범하게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출생을 원망하며, 저주하며.

     

    마법을 사랑했지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최소한의 공감조차 해주지 않는 분야에 빠져버린 자신의 지능을 원망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평범한 가족과 환경을 가진 평민들이 증오스럽기도 했다.

     

    그들의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며 누구보다 우월해야 할 황족인 자신이, 그 깊은 곳에 열등감을 숨기고 있다고 인정하기 싫었다.

     

    원망은 아셀라의 근원이었다.

     

    그렇기에 악행을 저지르고.

     

    악녀가 되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감정인지 잘 안다.

     

     

    잘 아는 만큼, 라스가 자신에 가졌을 원망이 그로 하여금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너무나 잘 보인다.

     

    설령 그를 죽인 게 자신이 아니더라도.

    세상을 멸망시킨 게 자신이 아니더라도.

     

    라스의 입장에서 보면 같은 사람이다.

    같은 폭군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다.

     

    자신과 함께 새롭게 보낸 시간이 얼마나 있어도, 사연이 있어도.

     

    그 몇 배, 몇십 배가 되는 라스의 원망을 덧씌울 수가 있을까.

     

    아셀라로서는 도무지 그게 가능할 것 같지 않았기에, 여태 라스를 만나볼 자신이 없었다.

     

    그의 감정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에게 거부당하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게 될지 상상조차 못 하겠으니까.

     

     

    그래도 하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선생님은 널 골랐어.

     

    그 사실을 일깨워줬던 용사의 한 문장.

     

    라스는 자신과 함께 후국으로 가자고 권유했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자신이 고백했을 때 바로 거절하려는 눈치도 아니었다.

     

    혹시, 혹시나.

     

    라스가 날 받아줄 수 있다면.

     

    내가 네가 아는 미래의 황제가 아니라고 증명하고, 스스로도 확신할 수 있게 되면.

     

    자격을 얻는다면.

     

    그러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정신을 차려보니 무슨 대단한 위업을 이루겠다고 마계의 한복판까지 와버렸다.

     

    “황녀님, 궁금한 게 있어요.”

     

    라스가 아셀라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질문했다.

     

    “응.”

     

    “왜 제게… 음… 그렇게…”

     

    “사랑해.”

     

    “…사랑에 빠지셨습니까. 황녀님처럼 아름답고, 남부러울 것 없으신 분께서. 저는…”

     

    라스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도 곧 마음의 결심을 한 듯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고백하는 일이지만, 저는 황녀님을 망가뜨렸습니다. 완벽한 황제로서 민중의 위에 군림하셔야 할 황녀님의 냉철한 정신을 흐트러트렸죠. 인류 역사에 있어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마법의 재능도 빼앗았습니다. 결코 황녀님께 긍정적인 영향은 끼치지 않았어요.”

     

    “아냐, 라스.”

     

    아셀라는 라스의 고백을 단번에 부정했다.

     

    “황제가 된 나는 완벽하지 않았어. 너는 나를 망가뜨렸다고 했지만.”

     

    툭, 아셀라가 고개를 숙이니 이마가 라스와 맞닿았다.

     

    “반대야. 너는 망가져 있던 나를 고쳤어.”

     

    서로의 호흡이 섞이는 거리에서, 문장은 귀가 아닌 숨을 통해 직접 전해진다.

     

    “너는 나를 완성시켜.”

     

    멈춰버린 세상 속에는 두 사람의 소리밖에 없다.

     

    오로지 둘만을 위해 준비된 무대에서.

     

    아니, 사실 배경은 필요도 없었겠지.

     

    아셀라는 라스만을 보고, 라스는 아셀라만을 본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그 무엇도 필요 없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

     

    “…황녀님이 돌아왔을 때.”

     

    라스가 천천히 대답을 전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할지 말지 정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선택입니다.”

     

    그 대답에 잠시 아셀라의 숨이 멎었다.

    마치 심장도 같이 정지한 듯, 피가 얼어붙는다.

     

    그러기도 잠시. 라스가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당겨 안으며 몸을 붙였다.

     

    “저는 이미 황녀님을 사랑하고 있어요.”

     

     

    ―――――――――――

    · 굿엔딩

    · ■■년 후, 다시 ■■에서 68% →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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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녹았어.

     

     

    아셀라는 몇 초 정도 기억이 날아갔다고 깨달았다.

     

    그만큼이나 라스가 전한 문장은 지금까지 그녀가 경험했던 어떤 마법보다도 파괴적이었고, 난폭했으며, 동시에 달콤했다.

     

    달아오른 귀에서 맛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아셀라는 이미 라스에게 달려들어 그의 입술을 정신없이 탐하고 있었다.

     

    ‘…응.’

     

    그만 잊어버릴 뻔했던, 몇 번인가 경험해봤던 맛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 버려서 그만 쿵, 라스를 바닥에 밀쳐버렸다.

     

    “미안, 괜찮아?”

     

    “네. 치료하면 돼요.”

     

    라스는 멋쩍게 웃고는 아셀라의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은발도 이뻐요.”

     

    “…다행이네.”

     

    “돌아오면 계속해요. 그러니.”

     

    라스가 부드럽게 아셀라를 품에 안아주었다. 아셀라는 몇 년 만에 느껴보는 그의 품에 새겨놨던 자신의 자리를 찾아 몸을 맞춰 넣었다.

     

    “무사히 돌아와, 아셀라.”

     

    꿈결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아셀라는 라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하아.”

     

    자리에서 일어난 아셀라는 부스스한 머리를 뒤로 넘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들 때의 풍경이었다. 텐트, 침낭 속이다.

     

    “…아핫.”

     

    금방 꿈 내용이 기억나버려서 혼자 피식거리며 웃고는 이리저리 몸을 배배 꼬았다.

    누구에게 들키면 당장 그의 눈알을 파버릴 정도로 부끄러운 장면이었다.

     

    라스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해주었다.

     

    비록 꿈속이라고 해도 현실보다 훨씬 생생했다. 아셀라는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나 텐트를 나섰다.

     

    “기침하셨습니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파우스트가 모닥불을 피우고 생선을 굽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잤어?”

     

    “열네 시간 정도입니다.”

     

    “진짜로? 허, 여덟 시간 이상 자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구나. 이렇게 개운할 줄 몰랐네.”

     

    아셀라가 기지개를 켜고는 가벼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파우스트, 너도 좀 잤니?”

     

    “저도 사람입니다.”

     

    “그럼 큰일이잖아. 둘 다 자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어떡하려고. 여기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잖니.”

     

    “저희 소지품은 시간이 흐릅니다. 시계를 가지고 있죠. 꿈은 어떠셨습니까?”

     

    아셀라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으며 파우스트의 옆에 쪼그려 앉아 생선을 한 마리 집어 들었다.

     

    “나쁘지 않더구나. 나중에 상을 내리마.”

     

    “고트베르크가 나왔나 보군요.”

     

    “시끄러워.”

     

    “참고로 루시드드림 포션은 특이한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용자의 머릿속의 정보를 토대로 꿈속 세상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기반으로 꿈이 만들어집니다.”

     

    “그게 무슨 의미야? 꿈에 나왔던 라스가 진짜 라스나 다름없었다고?”

     

    “예. 꿈속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진 몰라도 진짜 고트베르크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그는 같은 행동을 했을 겁니다.”

     

    “흐, 으흐응. 거짓말.”

     

    아셀라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생선을 한입 베어 물고는 바로 뱉었다.

     

    “안 익었잖니.”

     

    “시간이 멈춰있어서 익히는 데 요령이 필요합니다. 오래 걸립니다.”

     

    “됐어, 배고프지도 않고. 더 용건 없으면 용사나 데리러 돌아가자.”

     

    탁탁, 아셀라가 예장의 치마를 털고 일어섰다. 파우스트가 짐을 정리하고 뒤를 따랐다.

     

     

     

    ***

     

     

     

    잠도 푹 잔 덕분일까, 게이트로 돌아가는 아셀라의 발걸음은 내내 경쾌했다.

     

    뭐, 무엇보다도 나를 만나서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지만.

     

     

    첫 텔레포트 게이트로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 아셀라가 문을 열었고, 리셰도 금방 합류했다.

     

    “가져왔어요. 이게 빛의 결계석 맞죠?”

     

    리셰가 봉인함을 슬쩍 열었는데, 태양권을 당해서 시력을 잃을 뻔했기에 바로 다시 닫으라고 했다.

     

    “수고했다, 용사여. 허나.”

     

    아셀라가 리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방심은 금물이다. 아직 분기점이 많이 남았어. 실패는 용납하지 않겠다. 마왕에게 죽기라도 해보거라, 본녀가 죽여버릴 테니.”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승리하란 뜻이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왕을 토벌해야겠으니.”

     

    “어…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알았으면 됐어.”

     

    아셀라가 몸을 홱 돌리고는 뚜벅뚜벅 앞서나갔다. 용사 파티가 있는 장소로 돌아간다. 시간의 결계석을 처음 손에 넣은 장소까지다.

     

    리셰가 내게 소곤소곤 물었다.

     

    “황녀님, 무슨 일 있으셨나요?”

     

    “글쎄요.”

     

    “고트베르크 선생님이 이상한 바람 넣으신 건 아니고요?”

     

    “넣었다면 넣었다고 볼 수 있겠군요. …아니, 고트베르크요?”

     

    “아, 헉. 아니, 파우스트 선생님… 그게… 비밀로 할게요.”

     

    리셰가 목소리를 낮추며 손가락으로 입가에 엑스 표시를 그렸다.

     

    흠.

     

    어떻게 알았지.

     

    “타냐가 말했어요?”

     

    “스승님이요? 스승님도 아셔요?”

     

    “미치겠네.”

     

    리셰가 헤실헤실 웃으며 상체를 숙였다.

     

    “괜찮아요, 아무도 몰라요. 누가 봐도 감쪽같거든요. 저야 분위기 때문에 알았지만요.”

     

    “분위기도 다른 사람 아닙니까.”

     

    “음… 그 특유의 숨길 수 없는 그게 있는데… 어쨌든,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라요. 선생님이 와주셔서 한숨 돌렸거든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요. 용사님도 못 본 사이 듬직해지셨습니다.”

     

    “에헷.”

     

    리셰가 머리를 긁적였다.

     

    “선생님께서는 역시 용사 파티의 공략을 직접 도와주시러 오신 건가요?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으셨나요?”

     

    “그렇습니다. 마왕 토벌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고…”

     

    그때 상태창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 상급 포션의 제조 / 사용 경험치가 충분해졌습니다!

    · [연성 B]가 [연성 A]로 랭크업했습니다.

    · [강화 B]가 [강화 A]로 랭크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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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은 모든 포션의 제조법을 깨달았습니다.

     

    · 엘릭서 = 마왕의 피 + 고대룡의 역린 + 세계수의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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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리셰에게 대답했다.

     

    “마왕의 피도 필요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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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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