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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5

        

       누군가는 말한다.

       예언이라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관측한 순간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되고야 만 것이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에 반박한다.

       미래라는 것은 가변적이며, 아주 자그마한 일로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수많은 예언자가 예견한 종말은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수가 있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묻는다.

         

       예언이라는 것은 고정적인가, 가변적인가?

       예언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진정 예언을 회피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는다면 정해진 미래로 향하는 헛된 발버둥에 불과한 것인가?

         

       “프라우 빈터. 혹시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네?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아요.”

         

       자기실현적 예언.

         

       자성 예언이라고도 불리는 이 말은 예언을 생각하며 움직인 결과 그 예언이 이루어지게 되어버리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회심리학적 현상은 사람들에게 자기에 대한 믿음, 성공을 그리고 그것에 매진하는 자세의 중요성에 관해 설명할 때 예시로 사용되기도 하며, 예언자들이 맞이하는 파멸적 미래를 이야기할 때 ‘델포이 신탁’과 함께 예시로 드는 것 중 하나였다.

         

       “미래에 관한 생각이 강렬할수록 사람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예언이 이루어지게 되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자기실현적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지 말라고 하면 필히 코끼리를 떠올리게 되어버린다.

         

       예언 역시 마찬가지.

       

        예언을 떠올리고 마음에 둘수록 그것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게 되는 법.

         

       복권에 당첨되는 예언이 나온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기대감을 잔뜩 품고 복권을 많이 살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복권에 당첨되는 미래’가 올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다치게 될 거라는 예언을 들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평소 이상으로 긴장하게 될 것이고, 그 긴장 때문에 몸은 빳빳하게 굳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굳어버린 몸은 평소라면 그냥 타박상으로 끝나버릴 것을 근육 파열까지 일어나게 만들어버린다.

         

       이러한 예언의 성질을 학계에서는 ‘예언의 자기 실현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의 자기 실현성에는 반드시 끼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입니다.”

         

       확증 편향.

       정보의 수용과 판단을 자기 멋대로 하는 경향성.

         

       사람이라는 동물은 본래 자기 주관대로 행동하고, 자기 자신이 수용한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동물이다. 같은 정보를 수용하더라도 사람들은 제멋대로 해석하여 적용하며, 정보를 편향적으로 수용하여 때에 따라서는 완전히 틀린 답을 내놓기도 한다.

         

       “확증, 편향이요?”

       “네. 점이나 예언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경향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확증 편향 중에서는 행동 확증(Behavioral confirmation)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기대가 타인이 그 기대를 증명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끌게 하는 경향을 말한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대를 그대로 투영하여 상대방이 그 기대에 충족하게 만드는 일종의 행동 유도라고 할 수 있으며, 앞서 말한 자기실현적 예언의 한 유형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여럿이 기대하면 타인은 그것에 대하여 반응한다.

         

       적대감을 보이면 적대적으로 변한다.

       비협조적이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정말 비협조적으로 변하고, 협조적인 사람이라고 기대하며 대하면 그들은 정말 협조적으로 그들을 대하게 된다. 학계에서는 이것이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증거라고 말하기도 하고, 인간이 집단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감정을 미약하게나마 교류하기에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여러분은 이미 확증 편향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라우 렌츠에게 예언을 각인시키고, 신경 쓰이게 했지요. 거기에 더해서…. 마음과 행동이 향하는 곳이 다른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진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는 엘라를 보며 방긋 웃었다.

         

       “여러분은 프라우 렌츠께 절대로 윌리엄을 만나지 말라고, 절대로 그놈의 뜻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다녔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네.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엘라는 진성의 질문에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아주 상식적인 행동인데, 여기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혹시 이런 말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과도한 부정은 긍정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라고.”

       “네?”

       “이는 강한 부정에는 불안감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실현 가능성이 꽤 높아 보이는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자신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말하기 때문에, 과도한 부정이 곧 긍정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행동이 바로 그것과 같습니다.”

         

       정말로 예언이 실현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면 저런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

       그냥 개소리를 들었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구나 대충 넘겨버리고 말겠지.

       하지만 저들이 저렇게 말하는 것은 윌리엄이 아무리 반쪽짜리 예언자라고 할지라도 예언자이고, 허구한 날 쓸모없는 것들만 보아왔어도 썩어도 예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나오는 행동이었다.

         

       윌리엄의 예언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게 놔두고 싶지는 않다.

         

       윌리엄의 예언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싶다.

         

       이러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엘라가 보이는 것 같은 태도였다.

         

       “여러분은 예언이 실현되지 않기를 바라는 한편, 그 예언이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이라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윌리엄이라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예언이 주는 강렬한 인상이 의식과 무의식에 강하게 틀어박히면, 반드시 그것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진성은 엘라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자신이 한 말을 다시 주워 담았다.

         

       “아니. 취소하겠습니다.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리라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직감은 있었을지언정, 이러한 사실을 의식적으로 알고 활용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군요.”

         

       이것을 알고 있었다면 더 좋은 방법이 많았을 테니까요.

         

       진성은 그렇게 윌리엄을 정확하게 평하며 엘라를 바라보았다.

       엘라는 진성의 말을 부정하고 싶어 하면서도 진성의 말에 반쯤 설득이 되어버린 표정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얼굴에 서린 불안감은 아까보다 커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프라우 빈터. 정말로 예언을 이루게 하고 싶지 않다면 이렇게 조급한 태도를 보이는 대신, 그 사람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옳습니다. 당신이 예언의 이미지를 프라우 렌츠께 내보이는 만큼 그 미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커질 수 있으니까요.”

         

       진성은 불안해하는 엘라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러자 갑자기 손을 잡힌 엘라는 화들짝 몸을 떨 수밖에 없었고, 불안감 가득한 얼굴에서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엘라는 조용히 풀을 뜯어 먹다가 나뭇잎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 놀라는 토끼처럼 깜짝 놀란 표정으로 진성을 바라보았고, 진성은 엘라를 안심시키려는 듯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이끌었다.

         

       “셰프. 프라우 빈터께 달콤한 디저트 하나 부탁드립니다.”

       “어떤 디저트를 드릴까요?”

       “달콤하고, 폭신하고, 빠르게 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미리 준비해놓은 것이 있으니 그걸로 드리겠습니다. 티라미수, 괜찮으십니까?”

       “네. 그걸로.”

       “알겠습니다.”

         

       그는 엘라의 한 손을 가볍게 잡은 채 이끌어 그녀를 식탁 앞에 앉히고는 셰프에게 디저트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셰프는 맨날 달콤한 디저트를 요구하는 아나스타시아 용으로 미리 만들어놓았던 티라미수를 꺼내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그리고는 적당한 크기의 커피 머그잔을 꺼내 그 위에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티라미수를 집어넣었고, 코코아 파우더와 슈가 파우더를 이용해 라떼 아트(latte art)로 그려놓은 듯 잎사귀 모양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곤 미리 준비해놓은 거품 소스를 위에다가 잔뜩 올렸다.

         

       “여기 주문하신 티라미수 나왔습니다. 위에 올려진 거품 소스는 분자요리로 만든 블루베리와 산딸기 맛 거품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티라미수는 일반적인 티라미수의 모양이 아닌, 카페에서 머그잔에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카페 모카를 시켰을 때 나올법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감쪽같은지, 셰프가 티라미수라고 하지 않았다면 커피라고 착각하고 마시려고 컵을 들어 올렸으리라.

         

       진성은 신기한 형태의 티라미수를 앞에 둔 엘라에게 말했다.

         

       “프라우 빈터. 과도한 고민은 상황을 해결시키기는커녕 악화시키고, 나쁜 미래에 더 가깝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은 버리시고 현재를 즐기세요. 게다가 그 예언이 아주 파멸적인 예언이라면 모를까, 그저 한 사람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언이 이루어지는 미래도,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 미래도 프라우 렌츠에게 해가 가지 않는 만큼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니 달콤한 것을 먹고 머리를 채우는 걱정을 잊어버리고,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프라우 렌츠에게는 절대로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진성은 걱정을 덜어버리는 것이 예언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며 엘라에게 티라미수를 먹으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엘라는 그러한 진성의 재촉에 못 이긴 듯 티라미수를 먹기 시작했고, 한 입 먹고는 단맛에 중독되기라도 했는지 진성이 재촉하지 않았음에도 자동으로 손을 움직여 티라미수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는 엘라가 티라미수를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자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예언의 때를 위한 준비가 필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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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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