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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5

        

         “으아아… 진짜 힘들어 뒤지는 줄 알았네.”

         

         아까부터 입만 열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한숨과 앓는 소리가 밤거리를 향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스러졌다.

         

         안 좋은 상황에서 억눌렀던 약한 마음이 뒤늦게 튀어나왔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농담이나 과장없이 하루가 이렇게 길었던 적이 처음이다.

         

         약속 시간까지 기껏 마음 졸이며 기다렸더니 룸메이트라는 녀석이 홀랑 빠지질 않나.

         제대로 치료를 해준 것 같기는 하다만 쇳덩어리로 처맞고 의식불명 상태에 처하기도 하고.

         누구는 전장 바꿔가며 2차전, 3차전을 벌이느라 탈진 직전인데 적들의 수장은 갑자기 울면서 목숨을 끊기까지.

         

         심지어 막판에 레오나르가 남은 보안팀을 손수 박살내고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만 열어준 직후에는, 지상에 나오자마자 무슨 일본식 이레즈미 무늬가 잔뜩 들어간 추리닝을 입은 괴인과 마주쳐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세상에 누가 전쟁터 한복판을 싸구려 방독면과 운동복 차림새로 활보한단 말인가?

         무장도 빈약하기 짝이 없던 주제에, 병사 한 명의 헬멧을 붙잡아 들어올리고 목덜미에 단검을 박아 넣은 채로 왠지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모습은…… 진짜 더럽게 오싹했다.

         

         그나마 이쪽에 볼일이 없었는지 드로이드들을 불러들이기 전에 홀연히 떠나갔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분명 위험했을 상대가 분명.

         

         오밤중의 소란을 듣고 혹시 뭐 주워 먹을 게 있나 끼어든 용병?

         외곽 지대 근처인만큼 목숨 걸고 돈 될만한 물건들을 쓸어 담으러 온 스캐빈저?

         아니면 엑사테크에 사적인 복수심을 품은 관계자나, 나처럼 의뢰를 받은 청부업자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사실 이제 와서는 잘 모르겠다.

         아니, 진짜로! 내 눈썰미가 나쁜 게 아니라 이 넓은 네오 헤이븐에서 우연히 마주친 복면 쓴 괴인의 정체를 바로 간파하기엔 단서가 부족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긴장이 많이 풀어지기도 했고, 내 상식 탬플릿(Template; 견본) 상으론 그런 복장은 뒷골목 양아치나 갱단이 입을 법한 활동복이라 외려 그동안 너무 많이 봐서… 쩝.

         

         “하아… 한동안은 또 인터넷 감시 빡세게 해야겠네. 정체를 모르니까 딥 웹(Deep web; 일반적인 검색 엔진이나 방식으론 접근할 수 없는 숨겨진 웹 영역) 쪽도 신경 써서 검열을… 아이씨, 머리 아파.”

         

         하여간 당장은 다리를 움직이는 것 외엔 특별히 할 일이 없는 퇴근길이다.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렸으나… 나머지 기계들은 시선 분산용 미끼 삼아서 날뛰게 만들어 놓은 다음, 레오나르가 임시로 보관해줄 수 있다는 수준의 드로이드만 챙겨서 안전 가옥으로 대피.

         

         거기서 그와 성실하게 ‘잔업’까지 마치고 나서야 알리바이도 챙길 겸 다시 블랙 마켓 통로로 쓰이는 가게까지 돌아가 택시 타고 겨우 귀가하는 게 현재다.

         

         응? 잔업이 뭐냐고?

         이런 기업 엿 먹이기 류 작전에 따로 뒷배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응당 후방 기술직이 해야 할 흔적 지우기를 말한 거다.

         

         이번 경우엔 그 두 명 모두 일선에서 개고생을 하다 돌아온 셈이지만, 열악한 조건이라는 설명을 듣고도 낀다고 했던 건 나니까. 딱히 불만은 없다. 음.

         

         오히려 내가 무심코 놓칠 수 있는 부분도, 현직 지명수배자이자 암시장 보안 실장님께서 조목조목 짚어가며 챙겨줘서 많이 배웠다 할 수 있으리라.

         

         결국 종합적으로 보면 고생은 좀 했지만 얻은 게 훨씬 더 많았다.

         아니, 맡겨 놓은 로봇만 얘기한다기보단, 능력적인 측면에서도 한계까지 몰아붙였더니 좀 능숙해진 감이 있다 해야 하나? 뚜렷한 명령을 내리는 것과 목적성을 부여하는 건 차이가 좀 크더라고.

         

         “어머? 오늘 업무가 좀, 많이 수고스러우셨나 보네요?”

         “수고… 어, 많이 수고한 것 같네요. 네.”

         

         차마 번듯한 기업에서 일하고 있을 게 분명한 -전혀 아니지만- 입주민에게 나갈 때와는 달리 표정이 썩어서 돌아왔다는 인사를 건넬 수는 없었는지, 뒷말을 흐리며 손으로만 눈가의 다크 서클을 가리키시는 플라자 로비 직원분께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유, 그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일을 겪었죠.

         그저 예의 상 건넨 말에 일반인이라면 별로 듣고 싶지 않아 할 유혈 낭자한 이야기를 다짜고짜 들려드릴 순 없으니 제가 참겠습니다. 예이….

         

         띠링!

         엘리베이터 벽에 이마를 댄 채로 특유의 시원함을 만끽하던 것도 잠시, 누른 층에 도착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렸다.

         

         아무리 나른한 몸에 냉기가 감도는 게 좋다 한들 집의 아늑함과 비교가 될까.

         얼른 들어가서 쉬는 게 상책이지.

         

         – 아나스타샤 발렌타인님 확인되었습니다. 3일만의 외출은 어떠셨나요? –

         

         “……쓸데없는 기능이 켜져 있었네.”

         

         현관문에 달린 안면 인식 장치가 괜한 수식어를 붙이는 것에 대해 투덜거리며 나는 임시로 놔둔 상자 안에 신발을 벗어 던지곤 안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겨우 돌아온 만큼 뒤도 안 돌아보고 쉬고 싶었지만… 침대에 곯아떨어지기 전에 까먹지 말고 할 게 있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용무가.

         

         문제가 발생한 원인이나 책임 소재가 명확한 게 아닌 이상, 그걸 스스로의 부족함을 살피는 계기로 여기기보다 외부에서 찾으려 하는 게 좋은 버릇이 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잘 알고 말고.

         

         그렇지만 졸지에 팔자에도 없던 소녀 가장이 된 내가 밖에서 갖은 고난을 겪으며 돈벌이를 하는 동안.

         결국 코빼기도 안 내비친 우리 바보한테 혼잣말을 겸한 생색을 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냥 잠들 수가 없었다.

         

         이게 너무 스펙타클 한 우여곡절로 가득 찬 모험이다 보니, 차마 자랑을 안 하고 넘어가기엔 섭섭했달까? 진짜 사지 멀쩡하게 돌아온 게 기적이라니까!

         

         “제로, 이 집돌이 녀석아! 어딨어? 방금 막 돌아왔는데, 진짜 오늘 무슨 난장판이 벌어졌는지 넌 전혀 모를…… 어라?”

         

         툭 하고, 발에 포장 비닐이 채였다.

         그러고보니 집안 풍경이 조금… 어수선하다.

         

         바닥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포장지, 파손 방지용 내장재, 빈 상자들이 눈에 밟힌다.

         

         평소부터 내가 미안할 정도로 틈만 나면 청소에 몰두하는 제로가 이걸 참아 넘겼다는 게 이상하리만치 어질러져 있었고.

         

         그러고보니 인기척도 안 느껴지고 분위기가 좀 서늘한 것 같았다.  

         항상 생활 소음이나 케어봇 특유의 규칙적인 기계음으로 가득하던 집에 감도는 불길한 정적.

         

         뭐야 혹시 급하게 나갔나? 나름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더니 아직도 못 돌아왔다던가?

         

         얘가 정말 집에 없어야 가능할 것 같은 지독한 적막감에, 그리고 일종의 오솔길(Trail)처럼 기다란 흔적(Trace)을 남기며 내 컴퓨터가 들어찬 은둔 방까지 이어진 쓰레기들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저기, 제로? 깡통아…??”

         

         수근거리기 시작한 가슴 한 켠의 불안함, 간질거리는 조바심을 억누른 채로 그를 찾으며.

         

         안으로, 더 안쪽으로.

         방문 근처에 어지럽게 흩어진 볼트, 너트, 전선 조각 등을 애써 못 본 체한다. 이제야 집에 돌아온 내가 외면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텐데.

         

         만에 하나, 천에 하나라도 적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성은 무방비한 접근을 경고했지만.

         감정은 한시라도 빨리 방문을 열고 무슨 좆 같은 변고가 일어났는지 확인하라며 자꾸만 나를 보챘다.

         

         살짝 열려 있는 문을 밀친다.

         그렇게 차라리 안에 아무것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 반, 나머지는 안을 정리하느라 내가 온 걸 몰랐던 제로가 지금이라도 싱겁게 나타나길 원하는 상태로.

         

         “아…?”

         

         여느 때처럼 캄캄한 내 아지트는 굉장히 어질러져 있었다.

         

         꾹 닫혀 있어야 할 전자기기 본체들은 바닥에 나뒹굴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전선은 치렁치렁하게 늘어져서 희미한 조명에도 세상 음산한 그림자를 자아냈다. 한 쪽에는 못 보던 물건들도 좀 있었고.

         

         하지만 이 모든 디테일은 눈에 곧바로 들어오지 않았으니.

         그야 어쩔 수 없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건 한 케어봇의 최후. 한 가운데에 가슴팍과 머리 장갑이 모조리 뜯겨 나간 채 쓰러진 제로가 보이는데 어떻게 내가 한눈을 판단 말인가.

         

         “……대체 왜?”

         

         바닥에 주저앉아 잔인할 정도로 헤집어진 내부를 더듬어봐도 감전은커녕 미약한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은 지 한참 지났다는 사실만 재확인했을 뿐.

         

         또 다시.

         옛날 그때처럼 손에 마구잡이로 생채기가 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 왜, 누가, 어째서, 하필 지금.

         다양한 질문이 입을 비집고 나오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뭐든 즉각적인 반응을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내 바보 같은 몸은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기에.

         

         “….”

         

         나는 그저 조용히, 들썩이는 어깨와 비교되게 미동도 않는 제로의 머리를 껴안고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악의가 나와 그를 빗겨가기라도 할 것처럼.

         

         

         

         ★ ☆ ★ ☆ ★

         

         

         

        시간을 약간, 몇 시간 거슬러 올라 제로의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해 주고 집을 나간 직후.

       

         – ………5. –

         

         근래 몇 일 간, 면밀하게 관측하면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충직한 집사를 자처하는 케어봇은 침착하게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 4. –

         

         상대는 절대 먼저 움직이거나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하지만 경애하는 그의 주인에게 특별한 용건이 생긴다면. 아무리 늦더라도 10초 이내로는 뭔가 반응을 돌려준다.

         

         – 3. –

         

         가령 일반적이지 않은 방문객이 찾아온다던가, 정해진 기준을 넘는 진동이나 소음이 들린다던가 하면 날카롭게 움직인다는 걸 학습했으니.

         반대로 결점이 거의 없는 무결한 적이라 해도 찌를 틈이 생긴 셈이다.

         

         – 2. –

         

         아나스타샤에게 여타 메가코프들과 관련된 이슈들을 이대로 넘겨도 괜찮냐 물었을 때, 확실히 찝찝한 부분도 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다며 그녀는 소란 피우는 걸 지양했었다.

         

         그래서 제로는 여태 인근에 보이는 파라다이스 징수 부대원을 과하게 경계하는 것도, 언젠가 닥쳐올지도 모르는 헤이롱의 위협을 상정하는 것도 그만두고 주인의 기대에 부응했지만.

         

         최초로 생긴 그들의 사유지 앞에 저런 시한폭탄이 처박힌 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설령 그게 전부터 절실하게 느낀 개선점과 계획한 일정을 모조리 어그러트리는 한이 있더라도.

         

         – 1. –

         “!!”

         

         덜컹!

         

         문이 활짝 열린다. 복도 양쪽 문이 동시에.

         그리고 예전보다 한층 단단하고 날카로운 고강도 특주품으로 대체된 히든 블레이드가 솟구친다.

         

         레오나르의 안내 로봇을 따라 승강기를 타고 내려간 아나스타샤의 뒤를 쫓고자 나온, 지긋지긋한 에나마 추적자의 숨통을 끊기 위한 섬광이 교차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최후의 엇갈림.

    쌍검이 교차한 모양새를 표현하려다가 ‘쌍어리’ 라는 단어가 떠올라서 사전에 검색했는데 결과가 없더라고요?
    그냥 ‘착각인가….’ 하고 넘어가려다 혹시나 해서 구글에 다시 검색했더니 쌍검 참백도(…)라는 설명이 튀어나오는 걸 보고 기겁했습니다.

    이게 사람 무의식 속엔 이상한 단편 정보가 참 많이 저장되는구나… 싶었습니다.

    항상 재밌게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고 추천 눌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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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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