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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6

       오랜만에 공부라는 것을 해서 그런 걸까.

        

       어쩌면 내 머릿속에 의외로 학생 시절의 정보가 그럭저럭 남아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험 끝나고 친구들끼리 모여 가채점을 해본 결과, 그럭저럭 점수가 나왔다. ‘좋다’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 학기보다 열심히 했구나’같은 말을 들을 정도는 되었다. 평균 바로 아래쪽에 있는 점수였으니까.

        

       과거였다면 내가 시험을 보건 공부를 하건 말건 평균 점수 이상으로 나왔을 텐데.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왜 내가 공부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

        

       어차피 내 진짜 이름으로 받는 점수도 아니고, 사라가 봐야 할 시험을 내가 대신 봐주고 있는 셈인데. 원래는 이것도 사라가 해야 할 공부였고.

        

       나도 몇 문제 맞혔거든.

        

       그렇긴 했다. 사라도 나름 양심이 아팠던 건지, 시험을 보고 있는 내 머릿속에서 종종 어느 문제의 몇 번 보기가 정답이라고 주장하곤 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맞춘 문제가 전 과목 다 합쳐서 세 문제잖아.

        

       사라는 그 이후로 대답이 없었다.

        

       ……진짜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이런저런 짓을 해달라고 친구들한테 말해볼까 하다가, 그랬다간 내 정신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

        

       가채점이 끝나고, 나는 친구들과 떨어져서 손아름과 단둘이 학교 건물 뒤를 걷고 있었다. 이런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아무리 못해도 하늘이, 수아, 소희 중 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그 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 단둘이 대화할 타이밍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성적은 오르지 않았네.”

        

       손아름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내 성적이 오르면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던가.

        

       숫자만 놓고 보면, 평균 이상의 점수에서 평균 미만의 점수가 되었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중간고사 전후로 상황이 엄청나게 애매했다. 그래서 나는 선생들이 성적을 손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최나경이 먹인 뇌물은 그때까지도 나름대로 작동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성적이 평균 이상으로 나왔던 걸 보면 말이다. 나는 그때 성적은 둘째치고 시험 자체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도.

        

       하지만 지금은 뇌물을 많이 받아먹은 선생은 죄다 직장을 옮겨버렸지.

        

       “……그거 말이야.”

        

       손아름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나는 사실 그냥 입 다물고 있으려고 했다. 혹시라도 얘도 나한테 반했으면 안 되잖아.

        

       잘난 척은.

        

       시험 이야기하고 있을 때는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사라가 드디어 반응했다.

        

       그런데 잘난 척이 아니고 사실인걸.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인기가 많았던,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면 이 사랑도 당연하게 여기고 쉽게 쉽게 넘겼겠지만…… 아무래도 이런 관심과 사랑을 받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뭐, 조금 조심하려는 거다. 더 많은 관심을 받으면 내가 정말로 컨트롤하지 못하게 될까 봐.

        

       그런데, 왜 지금은 말하려고 하는 거야?

        

       사라가 물었다.

        

       딱히 따지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조금 웃음도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너 참 많이 유해졌다.

        

       ……너가 할 말은 아니지.

        

       나는 유해진 적 없다. 원래 유했다면 또 몰라도.

        

       참 잘나셨네요.

        

       그래도 사라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내지는 않는 건, 사라도 그만큼 손아름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나는 손아름에게 말하기로 했다.

        

       “그 성적, 내 실력은 아니었을 거야.”

        

       “응?”

        

       “내가 화영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니던 중에도…… 그, 나의 모친께서 학교에 이런저런 돈을 내고 있었으니까.”

        

       “…….”

        

       “아마 내가 아예 시험을 보지 않고 학교를 빠졌더라도 그 점수가 나왔겠지.”

        

       “…….”

        

       손아름은 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조금 떨고 있는 걸 보니,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화가 날 수밖에 없겠지. 아무리 공부가 즐거워서 하는 성격이라고 하더라도, 별다른 노력 없이 높은 점수를 얻는 인간을 보면 화내는 게 당연했다. 특히 선도 위원을 맡고 있을 정도로 정의감이 투철한 손아름이라면 더욱.

        

       “그러니까—”

        

       미안, 이라고 말하려는데, 뭔가 파란 것이 내 시야를 확 덮었다.

        

       손아름의 머리카락이었다.

        

       “어, 헿?”

        

       “많이 힘들었지?”

        

       “……어?”

        

       나에게 확 달려든 손아름은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내 시야를 덮고 있는 파란 것은 손아름의 머리카락이었고.

        

       “……그동안 너의…… 그 사람에게, 괴롭힘당하고 있었던 거잖아.”

        

       그 사람이라는 것은 아마 최나경을 말하는 것일 거다. 이제는 ‘어머니’라고 대놓고 말하기도 뭣해진 그 사람.

        

       “……학교 성적이나 출석 체크는, 학교에 얼마나 열심히 다니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야. 그리고 그 확인으로 학생이 얼마나 무사한지 알 수 있는 지표가 되기도 하고.”

        

       그러니까, 최나경은 사라가 학교에 제대로 다니고 있다는 증거를 위해서 그런 돈을 써가며 성적을 유지하고 개근상을 받도록 조작하고 있었다.

        

       이건 나도 생각한 적이 있었지.

        

       하지만 보통 이런 말을 하면 돌아오는 것은 돈 많은 부모가 있어서 좋겠다는 말일 텐데.

        

       ……나만 하더라도, 돈이 많으면 그저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손아름이 그렇게 말했다.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얼마 전, 양혜인이 나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던 양혜인이었다.

        

       그래, 아직 확실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제대로 마무리 되기 전까지는,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굳이 친구한테 들려줘서 고민하게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게. 드디어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되었네.”

        

       나는 손아름에게 안긴 상태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런 게 친구 간의 포옹이지.

        

       포옹하는척하다가 뒤로 밀어 넘어뜨리거나, 은근슬쩍 자기 가슴에 내 얼굴을 묻어버리거나, 내 품을 파고들면서 몸을 비비거나……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정의 포옹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전생에도 포옹 같은 걸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긴 하지만. 남자끼리 우정의 포옹 같은 걸 왜 하겠어.

        

       “그러니까,”

        

       나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약속했던 대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으면 부탁해도 돼. 0점에서 여기까지 오른 셈이니까.”

        

       “그, 그래도 될까?”

        

       “그래.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줬으니까.”

        

       내 말에, 손아름은 포옹을 풀었다. 그리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순진한 얼굴에는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부탁이 조금 부끄러운 것이긴 한 모양이다.

        

       아, 또 이러네.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언짢은 기분이 올라왔다.

        

       사라의 감정이다.

        

       왜? 아까 전까지만 해도 괜찮을 것처럼 굴었으면서.

        

       지금이랑 그때가 같아?

        

       ……아직 몇 분 안 지났는데?

        

       아, 그건 얘 표정 보기 전이라서 그런 거였고!

        

       뭐라는 건지, 참.

        

       나는 땍땍거리는 사라의 말을 잠시 무시하고 손아름을 바라보았다.

        

       손아름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서 우물거리며 양손을 모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엄청나게 불안한 모양이다. 혹시라도 내가 부탁을 거절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말해봐, 들어줄게.”

        

       “응.”

        

       아, 진짜.

        

       “그, 그럼…….”

        

       손아름은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러줬으면 좋겠어.”

        

       “응?”

        

       어?

        

       “나 부를 때. 기왕이면 성은 떼고, ‘아름’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런 새삼스러운 부탁을 하는 손아름……아니, 아름이의 표정은 어떻게 수습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빨갛게 물든 상태였다.

        

       “어, 어어…… 아름아, 이렇게?”

        

       “응.”

        

       …….

        

       변명이라도 해 보시지. 질투의 여왕.

        

       아, 아닌데? 분명히 그렇고 그런 분위기였는데?

        

       뭐가 그렇고 그래. 그냥 친구로서 할 수 있는 부탁인데. 나라도 꽤 친해진 친구가 계속 성 이름을 붙여서 부르면 좀 거리감이 느껴질 것 같긴 했다.

        

       뭐, 사실 내가 아름이의 이름을 무조건 성을 붙여 불렀었던 것은 아니지만. 몇 번인가 이름으로 부른 적은 있다. 하지만 보통은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름이 쪽이 나를 불렀을 때 대답하거나, 너, 같은 말을 더 많이 썼던 것 같기는 하다.

        

       “아름아, 앞으로는 이렇게 부를게?”

        

       “으, 아, 으.”

        

       본인이 그렇게 불러달라고 해놓고, 막상 내가 그렇게 부르니까 엄청나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아름아, 아름아, 아름아.”

        

       “아, 아냐, 지금은 그만 해도 될 것 같아.”

        

       반응이 조금 재미있었다.

        

       “왜, 아름아.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해서 이렇게 아름이라고 불러주고 있잖아? 아름아?”

        

       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이름을 계속 부르자, 아름이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홱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나에게 박치기를 했다.

        

       입술로.

        

       “쪽.”

        

       입술에다가.

        

       “……어?”

        

       “……아.”

        

       우리 둘은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렸다.

        

       영겁의 시간……이라고 느껴질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아, 아아아! 미안!”

        

       아름이가 펄쩍 뛰었다.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펄쩍 뛰었다. 땅에서 발이 적어도 십 오 센티미터는 떨어졌으리라.

        

       “미안해애애애애!”

        

       그리고, 아름이는 그런 메아리를 남기면서 전력 질주로 내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

        

       나는 멍하니 입을 연 채로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그랬어?

        

       사라가 따지듯 물었다.

        

       변명 좀 해 보시지? 난봉의 왕?

       

       …….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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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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