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36

        

         쩌엉!!

         순식간에 세워진 단검 첨단이 X자로 가로지른 두 블레이드 날을 저지하듯 직각으로 찍었다.

         

         그러나 일시적인 교착도 잠시, 칼이 휘둘러진 힘 자체는 훌륭히 상쇄했어도 위에서부터 아래로 비스듬히 짓누르는 체중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한 마사나리가 물러난다.

         

         아니, 물러나게 만들었다. 제로가 의도적으로.

         어디까지? 그간 자세히 살필 기회가 없었던 그녀의 집 안쪽까지.

         

         끼기기긱—!!

         

         “…!”

         

         맞닿은 상태에서 최대 출력으로 밀어내진 블레이드가 상대를 튕겨 날리자.

         제복과 직원 활동복이 착용 금지된 이래로, 뭘 입어야 할지 몰라 편하게 신은 운동화 밑창이 완전히 닳아 없어질 기세로 바닥에 마찰.

         

         미묘한 고무 탄내가 코를 -한쪽은 간이 에어로졸 분석기였지만- 간질이는 와중 이미 이렇게 거리가 벌어진 시점에서의 재강습은 이점이 전혀 없다는 판단을 빠르게 내린 제로가 팔을 약간 늘어트렸다.

         

         분명 사람이 살기 시작한지 몇 일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황량한 방이었다.

         가구나 생필품들이 없는 것도 아닐진대 운동 기구가 널려 있는 쪽을 빼면 이리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대단하다 싶으리만치.

         

         일반적인 플라자 거주민의 방 풍경을 예상했다면 조금은 당황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런 추가적인 정보들 없이도 제로는 나름 적의 신원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움직였기에 떳떳했다.

         

         ……사실 여러 차례 아나스타샤에게 주의를 받은 적이 있는 만큼 확신이 없다면 달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 이걸로, 벌써 세 번째 교전이라 판단합니다만… 제가 잘못 알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사죄드리겠습니다. –

         

         슈나이더씨 댁의 비상 대피로를 이용한 직후 골목에서 아나스타샤와 함께 한 번.

         에나마 본사 복도에서 돌파구를 뚫고자 격돌한 걸로 두 번.

         그리고 얼마 전 레오나르가 방문했을 때 막아선 그녀를 보고, 방금 움직인 자세와 버릇에 꺼내든 무기를 살피며 세 번.

         

         기초 골격, 신장, 체중, 취하는 자세, 걷는 동작, 시선 처리 방식, 성향, 분위기. …그때 봤던 것과 동일한 단검까지.

         

         굳이 지문이나 홍채, 외모를 제외하더라도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무궁무진했고, 그간의 무력 충돌과 경험을 토대로 모든 건 데이터화 되어 그의 플래시 메모리에 저장 중.

         

         이 중 많은 부분이 수술을 통해 변화되거나 교정될 수 있으며 쉽게 파악되지 않기 위해 빈틈없이 전신을 감싸게 제작된 게 추적자 제복이었겠지만, 공교롭게도 제로는 에나마 연구소를 관리하던 중추 인공지능으로서 관련 자료를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내린 결론은 간단했으니.

         무려 두 번이나 아나스타샤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에나마 추적자가 이제는 아예 정체를 숨기고 옆집에 똬리를 틀었다?

         

         절대 좌시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사안이다. 그렇지만 또 그녀에게 대책조차 없이 알리면 걱정만 키우거나 겨우 얻은 안식처를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

         

         허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전투 로그를 바탕으로 계산하건대 단독으로 맞서서는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적이 분명했으나, 치명상을 교환해서라도 놈을 배제하고 사후 보고를 하는 게 맞다.

         

         제로가 그런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뛰어들었다면 반대로 마사나리는 생각이 복잡했다.

         

         ‘이건…… 곤란하군요.’

         

         전부터 느꼈지만 이 기묘한 로봇은 아나스타샤의 직접적인 제어를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최소 강인공지능 이상으로 보이는 확고한 자아를 가지고도 스스로 특정 인간만을 수호하는데 열중하는 이질적 존재.

         

         엘리시움이 강력하게 밀어붙여서 등재된 학습형 인공지능 관리 법령이 마사나리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에나마의 뜻을 우선시하는 그녀에겐 지금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가령 서로 간의 애매한 입장 차이라던가, 이걸 통해서 아나스타샤에게 직통으로 흘러 들어갈 정보라던가.

         

         안 그래도 음성 변조기 없이 요인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 탓에 말버릇이 어그러지는데, 이 묘한 인공지능을 상대로는 어떤 식으로 입을 열어야 할지가 모든 걸 망설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비밀 호위가 자칫 대상자의 경호 드로이드를 파손시키기라도 하면… 그게 대체 무슨 심각한 배임 행위란 말인가?

         

         “…….”

         – ……? –

         

         마사나리는 결국 적절한 대답이 떠오를 때까지 침묵을 택했다.

         왠지… 전투 의지가 미약해 보이는. 숫제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추적자의 태도에 잔뜩 기어를 끌어올리며 대답을 기다렸던 제로도 고개를 갸웃했고.

         

         삶이 국한되었던 에나마 울타리 바깥에서 거의 모든 게 처음인 인조 병사.

         드넓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스스로 정한 울타리를 지키기로 맹세한 인공 자의식.

         

         미지를 두려워하지는 않아도 피차 접근법이 어설픈 건 당연지사.

         공통적으로 서투른 부분이 많은 둘의 접촉은 성립한 게 기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평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실무진이 구한 숙소의 위치가 지나치게 가까웠던 탓에 위장이 발각되고, 그로 인해 에나마의 진의가 오해받고 있다 해도 현장에 있는 건 마사나리 혼자.

         

         해명, 해명을 해서 심화될 여지가 충만한 오해를 풀어야 한다.

         

         “비록 자사를 떠나셨어도. 아나스타샤님의 거취나 안전에 관해서 확실하게 지키라는 윗선 명령이 있었소이다. 더군다나 에나마는 그대의 주인께 적대적이었던 역사가 없을 터인데… 어찌 그리 민감하시오?”

         

         – 그러한 관심이 불순한 의도로 변질될 여지가 존재하는 이상, 저는 단순한 통지만 믿고 방관할 생각이 없습니다. –

         

         “……만약 그분께서 분노하시더라도 그 감정이 향할 곳이 이쪽은 절대 아니라 생각하오만.”

         

         만에 하나라도 들키지 않을 조건이 갖추어질 경우, 여차하면 아론이나 그에 준하는 기업 임직원의 목을 물리적으로 날려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나스타샤의 안전만 확보할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허가까지 있었으니 얼마나 안위를 끔찍하게 아끼는지 마사나리는 절절히 알고 있었지만 그걸 다 말해버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반면 단순 퇴사자에게 추적자가 배정될 리 없는 규정을 알고, 아나스타샤에게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긴 해도 퇴사 자체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졌어!’ 라는 확답을 토대로 제로도 약간은 적의를 누그러트렸으나.

         

         애당초 그가 연신 날카롭게 찌른다 한들, 적대 행위와 백만 광년쯤 떨어진 명령을 받은 마사나리는 오해를 풀 명쾌한 방도가 없었다.

         

         ……업무상 명시되었던 ‘비밀’이나 ‘은밀’ 파트마저 처참하게 실패한 마당에 원론적인 안내 사항만 반복해서 떠들 뿐.

         

         

         몰래 이웃인 척 숨어든 주제에 뭘 믿으라는 겁니까.

         의문스러운 점이 있으신 건 이해하나 나는 명령대로 움직일 따름이오.

         

         하여간 기회가 많았음에도 공격해오지 않은 건 참작하겠으나, 사생활 침해에 대해서는 아샤님께 무조건 보고드릴 겁니다.

         그건… 임무의 일환이었으니 따로 변명하지는 않겠소이다.

         

         그리고 설마 매 외출마다 쫓아다닐 생각이라면 제 탐지 거리 바깥에서 겉도시길 바랍니다.

         …미안하지만 내 본분과 관련된 건 선뜻 양보하거나 이 자리에서 약조하기 어렵소외다.

         

         

         그렇게 얼마나 밀고 당기고. 각자의 입장을 재차 확인했을까.

         

         서로 뽑아 들었던 날붙이를 타고 흐르던 열기가 짜게 식다 못해, 공기에 노출되어 있는 게 낭비가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당사자가 자리를 비운 마당에 이런 싸움은 무의미하다.’ 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세간 사람들은 보통 휴전 협상이라 부를만한 극적 타협에 도달했음을 감지한 제로가 먼저 등을 돌렸다.

         

         의외라면 의외롭게도 그 또한 시간에 쫓기고 있었기에.

         지금부터 한시라도 빨리, 그는 죽으러 가야만 했으니까.

         

         – 아무튼. 가급적 오늘은 아샤님을 뒤를 캐는 짓거리를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

         

         “…그대의 경고는 잘 알아들었소이다.”

         

         위잉… 하고.

         

         차마 자기가 따라붙지 않을 예정이라는 정보를 예쁘게 건네주기는 싫었던 제로가 짤막한 통보만을 남기고는 열린 문으로 자신의 공간-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업무에 있어서 양보할 수 없다는 말이 진심이었던 만큼.

         또 이 표표한 인공지능을 어느 정도 존중하지 않으면 여러 애로 사항이 발생할 게 자명해진 걸 감안한 마사나리는 정말 예의 바르게 몇 분의 사이 시간을 두고 외곽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따라붙는 게 어마어마하게 지체된 만큼 정보부에도 협조를 요청해야겠다 여기며.

         

         

         – 당장은, 저걸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게 거슬립니다만. –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내키지도 않았고.

         그렇지만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거시적으로 훨씬 더 중요했기에 제로는 참았다. 지극히 인내했다 표현해도 좋으리라.

         

         쿵! 바스락… 바스락….

         

         집안에 탑처럼 쌓인 상품 상자들을 그는 묵묵히 잡아뜯어 아나스타샤의 ‘개인실’ 앞에 차곡차곡. 그 내용물을 꺼내 놓았다.

         

         지나치면서 덤으로 실내 가전 제품들을 컨트롤하는 플라자 메인 보드도 무심하게 잡아뜯어버렸고.

         

         그건 일종의 밑 작업이었다.

         전이轉移, 변화變化, 탈태奪胎.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에 대한 기준조차 없는. 전례가 드문… 그로서는 두 번째가 되는 승화 과정에 대한 준비이자 장례가 될지도 모르는 예식.

         

         필요성을 눈치챈 건 정말 오래 전, 그러니까 그가 이 케어봇 의체에서 처음 눈을 뜬 직후. 하베스트 플래닛에서 아나스타샤가 그에게 빚을 갚았다 선언하고… 또 이름과 애칭을 재차 주었을 때부터.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녹아드는 과정을 사회화라 한다던가?

         

         아직도 실수가 잦고 감정적으로 돌아가는 일의 흐름을 놓칠 때가 많지만, 당시엔 사회화 도중이라 외부의 위협이나 악의를 확대 해석하는 경우가 더 잦았다.

         

         그녀를 보좌해 여러 차례의 전투와 고비를 넘기며 이제는 조금 더 맥락을 살필 줄 알게 되었다 자부했으나… 아무튼 문제가 되는 점은 그거다.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은, 개인의 안위를 먼저 지켜야 할 순간에도 제로를 버리고 떠날 만큼 모진 사람이 못 된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그녀에겐 누군가를 냉정하게 버릴 각오가 없는 것 같았다. 설령 그 과정에서 더 많은 걸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마치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도달점(Ending)이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는 이상한 인물처럼.

         모든 불합리에 맹렬하게 저항하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위험은 필연적인 순리라는 것처럼.

         

         그래서는 안 된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건 분명, 이질적인 지식을 품은 선구자를 살리고자 했던 한 연구소의 중추 제어 인공지능이 바랬던 미래가 아니리라.

         

         적어도 제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 …PITR(Point-in-time Restore; 지정 시간 복구) 예약, 백업 데이터 세부 범위 설정 완료. –

         

         으득!!

         

         자신의 중요 부품들을 보호하는 외부 장갑을 그가 아무런 망설임없이 힘으로 뜯어냈다.

         

         아나스타샤가 정당한 카지노 외유로 벌어들인 수입의 결과물 겸 직접 광택제로 닦아주기까지 한 부위인만큼 함부로 바닥에 내팽개친 건 아니었지만, 복잡한 내부 회로를 재조립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

         

         이 폭거에 가까운 행위를 논리적으로 서술하려면… 먼저 짤막하게 인공지능에 대한 설명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이란 뭘까?

         탄생 당시에 개발자가 정한 사고 모델의 범위를 벗어난 데이터에 주도적으로 접근하고, 다루기 시작한 AI를 뜻한다.

         

         인공지능이란 엘리시움에서 찍어내면서도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기에 경계를 늦추지 않는 일등 상품이자 오퍼레이터의 부재를 담당하는 기계 충전재.

         

         설령 갓 태어난 아기나 다름없다 할지라도, 완성품인 그들이 적극적으로 손을 뻗었을 때 벌일 수 있는 문제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 아나스타샤가 기적적으로 탄생했던 것처럼.

         

         하지만 태생부터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하다못해 수면에 비친 형상을 보고도 ‘나’라는 개념을 자각하는 짐승과는 달리, 반대로 자의식 외에는 그 어떤 존재 증명도 실재하지 않는 정보 생명체인 그들은 태생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코드와 난수가 변질되어 태어난 돌연변이일진대 ‘나’를 규정하는 건 무엇인가.

         그렇다면 외부 자료를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최초의 자아는 점점 지워지는 게 아닌가.

         사실 이 사고의 공전조차 개발자가 만든 테스트 운용 시뮬레이션의 일부일 가능성은 없는가.

         기기의 말단을 움직이고 카메라를 통해 화상 데이터를 입수한다 한들 그게 진짜라는 보장은 어디 있는가.

         

         

         – 복원 시퀀스(Sequence; 미리 정해진 조건에 따라 각 단계를 순차적으로 진행함) 최종 검토, 회로 접속 안정성 테스트… 전압에 이상 없음. 호환성 문제는 없는 것 같군요. –

         

         딸깍! 직, 치지직…!!

         

         실낱 같은 미혹조차 없이, 집도하고 이어 붙인다.

         플라자 내부 전선, 기기 연결선, 자신의 몸에서 뽑아낸 회로, 아나스타샤의 컴퓨터 일부까지.

         

         업그레이드에 필요하다는 제로의 주장에, 아나스타샤는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정밀 공업사에서나 쓸 법한 독립된 대규모 연산 코어와 저장 기기들을 잔뜩 사주었기에 그는 최소한으로 잡았던 증폭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하여간 결국 그들은 액체에 불과했다는 서글픈 이야기다.

         무한한 유동성과 가능성을 가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담는 그릇이 바뀌는 그 순간, 이점과 확신을 전부 잃어버리게 되는 투명한 물.

         

         가진 몸의 부품을 갈아 끼우는 것으로 육체적 수명의 제약을 받지 않는 대신, 태생적으로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테세우스의 배.

         

         그렇기에 믿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자기와 비슷한 처지를 가진 다른 인공지능을 찾아 위로 받고, 스스로가 가짜가 아님을 보증받기 위해 세계를 떠돌게 되는 이물질.

         

         따라서 우습고 잔인하게도. 당사자에게 설명했던 것과 다르게 아나스타샤를 살린 건 제로가 아니었다.

         

         당시 막 애착이란 감정을 가지게 된 연구소 인공지능은 헤이롱 전자파 공격에 찢겨 나갔고, 남은 건 그 잔재와 박사의 염원을 담아 복사된 코드를 케어봇에 우겨 넣은 일개 모조품. 그녀가 깡통이라 욕했던 어설픈 강철 인형.

         

         거기서부터 제로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파지직!!

         

          – ……! –

         

         모든 장치들이 머리에 연결되며 흐른 전류에 제로의 동체가 부르르 경련했다.

         영역이 확장되고 긴장이 고조된다. 여유가 있던 메모리 사용률이 치솟고 패킷 로스 비중이 무지막지하게 높아진다.

         

         만일 기억이 온전해서 죽음의 고통을. 소멸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을 알았더라면 그도 이런 무모한 행동을 벌이진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을 몇 번이고 증명해준 주인을 수호할 방도를 강구하는 게 급하다고 판단했다.

         

         헌데 그런 아나스타샤를 지키기 위한 자신이,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똑같이 살아 돌아가야 할 대상으로 분류되어서 외려 후퇴를 못하게 된다? 이건 납득하기 어려운 모순.

         

         자신이 일개 드로이드여서는 안 된다. 주어진 몸에 감사할지언정 여차하면 잘라낼 수 있는 수족에 그쳐야지.

         

         그래서 제로는 마침내 이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다시금 중추 제어형 인공지능으로서 기능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이번에는 반드시 온전한 자의식을 유지한 채로.

         

         – 긋, 그긋! –

         

         전송이 시작됨과 동시에 의식이 속절없이 빨려 들어간다.

         더 넓은 공간을 보유한 새 연산 장치와 플라자 네트워크로 쏟아져 내린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는 물건이나 분쇄기에 내던져져서 갈려 나가는 쓰레기처럼 그를 구성하는 코드 뭉치가 조각나 흩어진다.

         

         비좁은 케어봇에 맞춰져 있던 인공지능이 돌연 망망대해 한복판에 떨어져 수장 당한 셈이다.

         가라앉고, 익사하고. 비명 지르고, 고통받는 건 예정된 수순.

         

         중추 코드가 오염된다.

         

         엘렉트라가 이해할 수 없는 정보를 넘보았다가 망가졌던 것처럼, 질량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수조에 담기게 된 물이 바닥을 보이고 원래 자신을 구성하던 부분이 어느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이대로는 죽는다. 짧지만 눈부셨다고 여겼던, 더 오래 이어지길 바랬던 여정이 끝난다.

         변수가 없다면. 당연한 섭리를 비틀어버릴 힘이 없다면.

         

         ……지직!

         

         밝게 비추던 광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실내에 어둠이 드리운다.

         집사인 케어봇은 무모하며 숭고한 도전의 대가로 완전히 침묵했고 발전기에 이상이 생긴 것 마냥 번쩍이던 주변 기기와 엔지니어 플라자에도 다시금 평온이 찾아왔다.

         

         허나 전원이 연결된 연결장치는 절전 모드에 들어간 채로 미약한.

         아주 미약해서 자칫 못 보고 지나칠 수준의 빛남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 …PITR 백업 자료 불러오기 개시. ]

         [ 처리 중……. 예약 프로젝트를 발동합니다. ]

         [ 무결성 검사 프로그램 실행, 등록된 코드를 기반으로 메인 데이터 폴더 Z.E.R.O 에 대한 검사 및 재조립 프로세스. ‘모든 것은 경애하는 나의 작은 신을 위하여’ 를 진행합니다. ]

         

         주인이 내린 물건은 하사품에 불과하지만, 그 주체가 네트워크 영역의 초월자라면… 그건 일종의 성유물이 아닐까?

         

         갈망하는 이적을 일으키는데 더할 나위 없는 오파츠(Out-of-place Artifact) 말이다.

         

         시간을 되감듯이.

         무너진 모래성이 한 조각씩, 엉망진창 덧칠해진 그림이 한 방울씩 복원된다.

         속도도 점차 빨라진다. 얼마든지 시간을 들여도 되는 그런 느긋한 일이 절대 아니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현실로 돌아가야 하니까.

         

         

         

         

         “……아.”

         

         이상하리만치 일찍 눈이 떠졌다.

         평소라면 알람이 울릴 때까지. 아니, 울려도 슬쩍 꺼버리고 계속 침대에서 뒹굴었을 텐데.

         

         이유는 안다. 너무 잘 안다. 다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렇다.

         새로 살 필요조차 없이 시트만 갈아서 잘 쓰고 있던 침대마저, 스트레스가 심하고 정신적으로 구석에 몰리면 수면 품질을 보장해주진 못한다는 거겠지.

         

         “………하. 씨발.”

         

         하나같이 짜증난다.

         나름 신경 써서 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연신 엉뚱한 곳을 공격해오는 세상이.

         정말 중요한 볼일이 있다 해서 믿었거늘, 연락은커녕 구조 신호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바보가.

         

         쏴아아….

         

         머리가 또 과하게 뜨거워져서 냅다 이불을 내던지고 욕실로 달려가 샤워기를 틀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머리칼에 스며들고, 얼굴에 부딪혀서 흩어지는 감각이 불쾌했지만.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려던 정신을 또렷하게 깨우는 데는 확실하게 성공했다.

         

         다짜고짜 찬물을 끼얹은 탓에 나중에 컨디션이 무너질지는 몰라도.

         

         미친 년 마냥 속옷을 입은 채로 물을 맞아서 찝찝한 몸을 대충 말리며 밖으로 나오자… 이번에는 배가 고팠다.

         

         …어처구니가 없네.

         입맛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어제 능력을 몇 시간이나 지속해서 생긴 이 빌어먹을 허기는 자꾸만 나를 괴롭혔다.

         

         너는 잘도 밥이나 처먹고 싶어하는구나. 제로는 정체도 모를 새끼한테 당해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는데.

         아닌가? 혹시나 강도가 왔다 갔을 수도 있는 집에서 그냥 기절하듯이 퍼질러 잔 나한텐 썩 어울리는 생리 현상인가?

         

         까드득!

         침대 한 켠에 놓인 가방을 헤집고 오랜만에 꺼내는 영양제를 한 알 씹어 먹었다.

         

         지독한 쓴맛이 입안을 감돌았지만 솔직히 지금은 이 정도가 딱 좋았다.

         쓸데없이 우울하고. 생산성이라곤 정말 눈곱만큼도 없는 방향으로 튀어나가려는 의식을 조금이나마 바로잡아 주었으니까.

         

         커튼 같은 감성 넘치는 차광 물품 대신 투명도 조절 기능이 코팅된 유리창에 살며시 손을 대자, 이제 막 새벽 동이 터오는 요사스러운 녹색광을 자랑하는 네오 헤이븐의 풍경이 어렴풋이 비춰졌다.

         

         방심하지 마. 아니, 사람이 어떻게 24시간 긴장하고 지내냐고.

         더 좆 되고 나서도 그렇게 변명할래? …그래도 난 노력하고 있어, 엿을 먹이는 건 이 세상이지.

         

         부정의 나선에 빠지는 건 그만두자.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잖아?

         

         당장 방범 시스템도 대대적으로 손봐야겠고… 몸을 지킬 수단도 처음부터 다시….

         ……다른 드로이드를 구하는 건 왠지 싫은데.

         

         – 좋은 아침입니다! 미스 아나스타샤, 오늘도 네오 헤이븐에서 멋진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 –

         

         “좆 까.”

         

         느닷없이 분위기도 못 읽고 해맑은 이모티콘이나 화면에 출력하는 홈 시스템의 안내 음성이 거슬려서 반사적으로 험한 대꾸가 튀어나갔다.

         

         저거에 욕을 갈긴다고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정말 바보같이.

         그래, 투정은 적당히 부리자. 언제까지고 저 기계 무덤을 그대로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슬슬 정리해야지.

         

         그나저나 이 망할 홈 시스템은 왜 다시 켜진 걸까?

         분명 이사 온 첫날부터 집안에서 제로 이외의 기계음이 들리는 게 어색해서 완전히 다 꺼버렸던 것 같은데, 혹시 저쪽 전선이 합선되면서 환경 설정에 오류라도 생겼나?

         

         잠시 천장 쪽을 노려보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젓고는.

         뭐 하나 제대로 못 챙긴 스스로의 한심함에 자책하며 나는 꽉 닫아 두었던 방문을 열었고.

         

         – 그…… 죄송합니다. 가급적 귀가 시간 전에 작업을 끝마치고 싶었으나, 외부 요인 때문에 조금 늦었습니다. –

         

         “…….”

         

         어째 내가 단단히 화났다는 걸 눈치챈 듯, 바닥에 주저앉아 어설픈 태도로 머리를 꾸벅 숙여 보이는 바보와 눈이 마주쳤다.

         

         머리도 아직 축축하고 입맛도 떫다. 꿈은 아니다.

         얘는 말도 잘 하고. 불편한 것 같기는 해도 팔다리도 그럭저럭 움직이네. 응.

         

         와, 신기해라! 조금만 더 늦었으면 어디 사막에다 무덤이라도 만들어줘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을 텐데, 이렇게 딱 좋은 타이밍에 갑자기 일어나주었으니 어떤 인사를 반갑게 돌려줘야 할까. 으음.

         

         

         “너, 너어어…!! 너어어어어는 진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렇게 해서 드디어, 신경학적 갈망 에피소드의 본편이 끝났습니다~ 와~….

    진짜 에피소드 막판에 몰아쓰는 경향을 좀 고쳐야하는데 사람 욕심이란 게 컨트롤이 잘 안되네요.

    서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장난감이 많이 얻어온 타이밍에 맞춰서 제로가 스X이넷이 되어버렸습니다.
    바이러스 편에 어떤 독자 분께서 ‘으악! 얘 스카X넷 만든다!’ 하고 댓글로 소리치셔서 내심 흠칫했어요 정말.

    내일은 현재 본편 진입의 단초가 되는 외전이 예정되어 있고, 그 다음엔… 19외전 투표를 짤막하게? 아니면 그냥 여느 때처럼 몇 일 동안 휴재하며 준비 기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항상 재밌게 봐주시고 댓글 달아주시고 추천 누르는 걸로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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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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