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37

       사실 NPC 마라톤이라는 것이 아제르나 전기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RPG 대부분은 그 ‘롤플레잉’, 즉 역할 놀이가 가장 중요한 거니까. 제작진들이 만들어둔 세계 안에서 내가 몰입한 캐릭터를 움직여 하나의 등장인물이 되는 것을 즐기는 게임이니, 어떻게 따지면 캐릭터의 전투력보다는 여러 등장인물과의 대화가 오히려 더 핵심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잘 만들어진 서양 RPG는 전투력이 아니라 설득 능력치로 전투 없이 스토리를 끝내버리는 것이 가능한 경우도 종종 있으니, 오히려 ‘대화’라는 콘텐츠의 중요성을 따지자면 대놓고 일자형 스토리인 아제르나 전기보다 서양 RPG들이 더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상하게 나는 서양 RPG를 하면서는 굳이 이런 마라톤을 돌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오타쿠라서 미소녀, 미소년 캐릭터가 더 많은 JRPG에 더 몰입했던 것일까? 아니면 대놓고 오픈 월드거나 필드가 넓은 서양 RPG는 구석구석을 다 돌기가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랬던 걸까?

        

       인제 와서 따져봐야 별 의미는 없다. 이 세계관에서 ‘비디오 게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려면 못해도 반세기는 기다려야 할 테니까. 거기에 내가 알고 있는 형태의 비디오 게임이라면 한 세기가 될 수도 있고, 이 세계의 ‘컴퓨터’를 생각해보면 영영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직접 보드게임이나 TRPG 룰을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하자고 권하기에는 좀…… 그런 것 같고.

        

       요즘 들어서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역시 최근에 이 세상의 게임 같은 장치를 몇 번이고 보아서 그런 거겠지.

        

       게다가 원작에서는 최종전을 앞두고 모든 주요 캐릭터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정통이기도 했다. 이건 세계관이 바뀌고 시리즈 후속작이 되어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하는 것도 그런 일이었고.

        

       기나긴 복도를 걸어 도착한 커다란 문을 손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미아, 안에 계십니까?”

        

       문이 두껍기는 했지만 내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건 아닌 모양이다. 아마 안에 혼자 있었을 테니.

        

       잠시 뒤에 문이 열리고, 미아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앞머리가 눈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원작에서나 이 세상에서나 처음에는 다소 음침해 보이는 머리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어려 보인다고 해야 하나.

        

       하긴, 원래 이런 느낌의 헤어스타일은 상대가 보이는 반응에 따라 그 이미지가 달라 보이는 법이니까. 애초에 현실에선 하려고 하면 엄청나게 용기가 필요한 머리 모양이기도 했다.

        

       원작이야 2D 일러스트를 기반으로 한 3D 모델링이니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머리’라고 퉁치고 넘어가도 아무도 태클을 걸지 않았지만, 이 헤어스타일은 현실에서 보면 말끔하게 잘린 앞머리에 잘 정돈되어 윤기 흐르는 생머리가 함께 있는 스타일이었다. 절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라고 넘어갈 수 없다. 누가 봐도 일부러 유지하는 헤어스타일이다.

        

       나중에 다른 스타일로 바꾸는 것을 권해볼까?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었던 것도, 미아의 ‘음침한 이미지’를 내가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아, 안녕하세요…….”

        

       잔뜩 긴장한 목소리였다.

        

       앞으로 있을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왔다고 생각한다면 긴장할 만도 했다.

        

       안 그래도 크로우필드라는 이름은 왕국에서 그리 긍정적인 이름으로 통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루테티아 지하로 들어갔던 인물 중 하나가 미아였고, 심지어 앞으로 있을 ‘왕국 입장에서는 예민한’ 문제에도 끼어들게 생겼으니 긴장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최소한의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면 언제 그 관계가 파탄 날지 알 수 없으니까.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무, 물론이죠. 부디.”

        

       미아는 조금 소심한 몸짓으로 옆으로 돌아서서 나를 방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미아가 묵고 있기는 했지만, 미아의 방은 아니었다. 왕국에서 우리가 잠깐 체류할 수 있도록 내어준 방이니까.

        

       루테티아 궁은 호텔이 아니다. 언제나 묵을 수 있는 손님용 방이 있기는 했지만, 호텔처럼 방이 모여 있지는 않았다. 해외에서 사절단이 왔을 때 묵을 별관이 있어서 나머지 학생들은 거의 다 그쪽에 있긴 했지만, 루테티아 지하에 들어갔다 나온 인물들은 모두 주의할 인물 취급인지 루테티아 왕궁 여기저기에 산개해서 묵게 하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들어가는 것을 막아두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샤를로트의 방 정도였을까.

        

       다만, 문 옆에서 말없이 대기 중인 ‘메이드’가 보통 메이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앨리스가 묵는 방과 마찬가지로, 이 안에도 감시자가 있지는 않았다. 뭐, 듣는다고 해도 별로 신경 쓰지는 않는다.

        

       미아와 나는 방에 있는 테이블 옆의 의자를 하나씩 잡고 앉았다.

        

       “굳이 뜸 들이지 않고 물어보겠습니다.”

        

       나는 미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이번에 우리가 법국을 향하게 된다면, 당신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

        

       미아는 아주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나를 슬쩍 올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따라갈게요.”

        

       “저를 따라온다고 해서 정치적인 이점이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왕국이나 황제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줄 가능성도 있죠.”

        

       사실 가능성뿐만이 아니라, 지금 시점에서 이미 찍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로우필드’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불편하고 귀찮은 일들이 잔뜩 생기리라. 그렇다고 왕국이 다짜고짜 제국을 쳐 크로우필드를 재점령하지는 않겠지만, 과거의 감정이야 그렇다 쳐도 크로우필드 영지는 왕국과의 교역로가 있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하, 하지만, 저는 가고 싶어요.”

        

       미아는 나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가고 싶다?”

        

       “네.”

        

       그러니까 실질적인 이득보다는 감정을 우선으로 생각한 선택이라는 소리다.

        

       “그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나 때문인가?

        

       원작에서는 미아도 공략할 수 있는 히로인이다. 미아는 자기 아버지가 황제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당연히 앨리스와 반목하는 사이였고, 앨리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레오도 그 사이에서 여러모로 치이게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앨리스와 미아가 화해하게 되는 것도 레오 덕분이었다.

        

       두 캐릭터가 동시에 레오에게 코가 꿰인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나라는 존재 때문에 그런 이벤트는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원작 시작 시점에서 이미 앨리스는 상당한 정신적 성장을 해버린 뒤였고, 미아에게도 앨리스라는 조금 먼 복수 대상보다는 나라는 실질적인 복수 대상이 있었다.

        

       문제의 해결도 당연히 나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었고.

        

       내가 의도해서 해결했다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쪽이 바람직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미아가 나를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도 없다.

        

       원작의 캐릭터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좋아하는 캐릭터들이었으니까. 사실 이미 게임상에서 회차를 여러 번 돌면서 미아와 레오가 이어지게 만들어보기도 했으니 정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건…….”

        

       하지만 미아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 이야기의 끝을, 보고 싶어서요.”

        

       뭔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거창한 대답을 내놓았다.

        

       “이야기의 끝?”

        

       나는 그렇게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으음…….”

        

       미아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듯 잠깐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 이제 와서 꺼내기에는 애매한 이야기이지만, 저는…… 실비아를 죽이려고 했었잖아요.”

        

       “그렇습니다.”

        

       정확히 언제부터 그런 마음이 사라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아는 언젠가부터 나에게 대놓고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시점을 내가 미아의 방에 멋대로 들어갔다가 나온 뒤라고 생각했다. 언제라도 미아를 찾아가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니 미아도 나를 그만큼 경계하고 있었다고. 물론 그 뒤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죽일 생각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겠지만.

        

       “사실…… 진실을 알고 난 뒤로도 몇 번 정도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엑.

        

       하지만 미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보다 충격적인 말이었다.

        

       “아, 아니요! 당연히 진짜로 죽일 생각을 한 건 아니고요! 그냥, 그, 어떻게 하면 실비아를 이길 수 있을지 고민해 본 정도니까요!”

        

       아니, 그렇게 말해도 이기는 거랑 죽이는 거랑은 좀 뉘앙스가 다른 거 아닌가?

        

       나도 필요하면 황제를 죽여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대상을 정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나를 대상으로 정하는 것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솔직히, 마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시는 분이 어떻게 그런 싸움을 할 수 있는지, 아무리 봐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미아는 차라리 얼른 설명하고 넘기는 것이 낫겠다는 듯 얼른 입을 움직였다.

       

    다음화 보기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