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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7

     

    ―부웅!

     

    리셰가 기세 좋게 성검을 휘둘렀으나 다시금 허공을 갈라버렸다.

     

    마왕은 우리와 전투 중이라는 기색조차 없다. 그는 자기 할 일에만 열중했다.

     

    어느새 방 중앙으로 이동한 그는 커다란 칠판을 꺼내 탁탁, 마기로 복잡한 수식을 적어대기 시작했다.

     

    “두 천리안 사용자가 미래를 관측하고 분기를 바꾸기 위해 행동했다. 재미있어, 재미있는 현상이야. 이 시간선은 처음부터 짐과 그대의 기나긴 마법 승부나 다름없었던 셈이지.”

     

    탁, 어느새 마기로 쓰인 글자가 빼곡하게 칠판을 채워냈다. 마족의 언어인데다 마법 관련 내용이라서 나도 제대로 알아볼 순 없었다.

     

    하지만 아셀라는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모양이었다. 어느 때보다도 표정이 험악해져 있었으니.

     

    “그대가 보지 못한 세상은 짐이 보았으며, 짐이 관측하지 못한 시간선은 그대가 관측했다. 마치 무수히 깔린 레일 위에서, 짐과 그대는 자신도 모르게 열차가 어디로 향할지 선로를 변경하고 있던 것이지.”

     

    “…대체 무슨 말이오? 파우스트 선생, 이해하시겠소?”

     

    앰브로시아가 머리에서 김을 뿜으며 동공에 지진을 일으켰다.

     

    나 역시 상황을 전부 파악한 건 아니었지만 반복된 공략에서 알아낸 사실은 있었다.

     

     

    마왕은 고위계 마법사다.

     

    초월자로 불리는 7위계, 현자 시모어나 리치보다도 한 단계 위의 존재.

     

    궁극의 경지에 도달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아셀라는 마왕이 리치처럼 마탄 같은 일반공격마법도 쓰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그가 다룰 줄 아는 계열은 ‘시간’ 하나뿐.

     

    오직 시간마법으로 정점에 도달한 존재가 바로 눈앞의 남자, 마왕 메피스트다.

     

    “황녀님도 시간 마법에 조예가 있으셨습니까?”

     

    내 질문에 아셀라가 꿀꺽 침을 삼켰다.

     

    “마왕, 메피스트가 상당히 관심을 보이는군요. 황녀님께서는 빙결과 공간 마법 전문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정확히는 시공간이야. 내 마법은 세계 자체를 다루거든.”

     

    아셀라의 대답은 상당히 의외였기에, 나는 확인해야만 했다.

     

    “시간 마법. 황녀님께서는 과거로 회귀 같은 게 가능하십니까?”

     

    “그런 건 아냐. 다만…”

     

    “천리안.”

     

    마왕이 톡톡,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

     

    “숨겨서 무엇 하겠나. 짐은 다가올 미래의 가능성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 실패를 피하고 최적의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 있지.”

     

    이건 처음 듣는 정보였다.

     

    마왕과 이렇게 길게 대담을 나눈 건 처음이었다. 그의 강력한 마법 특성상 전투가 장기전으로 가면 패배하는 일이 잦았고, 이길 땐 기습으로 단숨에 끝났기 때문이다.

     

    ‘아셀라가 있어서 그런가?’

     

    마법사끼리 통하는 거라도 있나.

     

    “그래서 몇 번이고 그렇게 인류가 패배했구나.”

     

    아셀라가 납득하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스에게는 비밀로 해, 파우스트. 나는 몇 가지 미래의 가능성을 알아.”

     

    “가능성, 말입니까.”

     

    “그래. 많은 경우의 수에서, 연합군은 마왕군에게 힘을 못 쓰고 패배했어. 과거의 역사를 찾아봐도 전례 없는 일방적인 싸움이었지. 이제 이유를 알겠어.”

     

    아셀라가 지팡이로 메피스트를 가리켰다.

     

    “그 미래는 마왕이 선택해 온 시간선 위에 있었어. 그러니 그렇게 무력하게 무너졌던 거지. 승리를 향한 최적의 선택지만 골랐을 테니.”

     

    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마왕에게 그런 스킬이 있었을뿐더러, 아셀라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다니?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이제 이해가 갔다.

     

    마왕군에게 패배하는 대부분의 배드엔딩이 발생하는 원인.

     

    초장부터 마왕군에 그렇게 열세로 인간계가 반 이상 침공당하고 있었던 이유.

     

    ‘아니, 사기스킬이잖아.’

     

    나는 그렇게 많이 죽어서야 겨우 확률만 보이는 엔딩리스트가 생겼는데, 메피스트는 처음부터 모든 선택지를 화면으로 보고 있었단 소리다.

     

    일개 마족 마법사인 그가 마왕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도 저 마법 덕분인가.

     

    젊을 때부터 오로지 성공가도를 달리며 마계를 휘어잡고, 몇 년 전에는 비로소 마신과 계약에 성공해 마왕이라는 타이틀까지 손에 넣었겠지.

     

    그리고 우리를 쓸어버리려 군대를 일으켰고.

     

    치사하잖아. 열 받네.

     

     

    잠깐, 그런데 대화의 흐름을 보면.

     

    ‘아셀라도 그 천리안을 쓸 수 있단 소린가?’

     

    내가 아는 황제는 적어도 시간 관련 마법은 쓸 줄 몰랐다.

     

    그것도 내가 과거를 바꾸면서 달라졌나.

     

    …내가 아셀라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마법 전공을 바꾸게 할 정도라니.

     

    그럼 설마.

     

    ‘아셀라도 배드엔딩을 봤다?’

     

    혹시 그녀의 행동이 이렇게나 달라진 게 그 이유 때문이라면.

     

    “황금의 마녀여.”

     

    마왕이 칠판에 빼곡히 수식을 채워나가며 아셀라를 불렀다.

     

    “그대도 경지에 오르며 경험했겠지만, 짐 역시 천리안을 통해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관측한 미래는 가능성일 뿐, 결코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지. 하지만 지식은 도움이 되었다. 천리안은 본래 그런 용도의 마법이다. 활용에는 굉장히 많은 노고가 들어간다.”

     

    아셀라는 공감이 간 듯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시간선이 복잡하게 분기할수록 미래 예지는 힘들어진다. 최근 들어 짐이 관측하지 못한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났지.”

     

    메피스트가 칠판을 뒤집어 수식을 계속해서 적어나갔다.

     

    “짐을 수호하며 간부가 되었어야 할 중요한 인물들이 계속해서 합류하지 못했지. 사룡은 죽었으며, 대악마는 강림하지 못했고, 진조와 리치는 임무를 달성하지도 못했다.”

     

    탁탁, 그의 수식이 이어진다.

     

    “찾아온 용사 파티의 멤버조차 관측과 모두 다른 인물이니,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마법이다. 하지만.”

     

    그가 환희에 차서는 아셀라를 돌아보았다.

     

    “그대도 미래를 바꿔오고 있었다면 모든 전제가 뒤바뀐다. 분기가 복잡했던 이유도 알겠다. 천리안은 그 어느 마법보다 위대하며, 강력함이 틀림없군. 한 가지 의문이 있다면.”

     

    메피스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지금 우리가 이 시간선 위에 서 있을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아셀라의 눈매가 짙어졌다. 생각이 많은 표정이다.

     

    메피스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나.

     

    뚜벅, 내가 대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네가 곧 절명할 확률이 꽤 높다는 데에는 돈을 걸겠다.”

     

    리셰도 성검을 쥐고 내 옆에 섰다.

     

    “맞아요. 지금은 그를 쓰러트리는 게 중요해요. 과정 같은 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죠.”

     

    메피스트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법사가 아닌 이는 잠시 빠져주겠나. 본래 짐은 경지에 오르지 못한 자와는 사담을 나누지 않는다. 짐이 황금의 마녀와 대면해서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이라 방해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더더욱 즉시 네놈의 목을 베어야겠군.”

     

    타냐의 싸늘한 태도에 마왕이 한숨을 쉬었다.

     

    “황금의 마녀여, 수식은 이해했겠지. 확률을 계산해보면 분명 어딘가 오류가 있다. 우리 둘이 천리안을 보고 미래를 바꿔왔다 한들 이 시간선 위에 도착할 가능성은 오차범위를 크게 벗어났다. 관측하지 못한 요소가 존재한다.”

     

    “거 드럽게 시끄럽네! 계속 못 알아들을 소리나 지껄이고!”

     

    참다 못해 폭발한 발렌이 활을 쏘았다. 콱! 쳐다보지도 않고 초신속의 화살을 잡아 부러트리는 마왕.

     

    칠판은 소중한가 보네.

     

    “야 이 자식아! 그렇게 책이 좋으면 방구석에 처박혀서 글자나 읽을 것이지 왜 전쟁을 일으키고 난리야!”

     

    마왕이 몸을 틀어 우리를 향해 섰다. 그의 육중한 몸이 위협적인 그림자를 드리운다.

     

    “지상의 지식은 이미 모두 탐독했다. 짐은 그 이상을 원한다.”

     

    하늘을 향해 팔을 뻗어 검지를 치켜세운다.

     

    “그대들은 밤이 되면 달이 뜨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메피스트가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말했다.

     

    “짐은 하늘의 지식을 탐독하러 가겠다.”

     

    그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나로서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아셀라가 그의 수식에 흥미를 보였듯, 마왕도 자신과 같은 계열에서 경지에 오른 마법사를 만난 건 처음일 테니 꽤 흥분했겠지.

     

    “파우스트군, 저게 무슨 소리요?”

     

    “인족을 몰살시켜 발생한 마기를 모아 대마법이라도 쓰려는 모양이군요.”

     

    달에 가고 싶어서, 랍신다.

     

    골 때리는 놈이었네.

     

    “…뭘 쓰려고?”

     

    아셀라가 그에게 물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7위계는 역사에 기록될 마법, 8위계는 종족의 삶을 변혁할 마법이라 하지. 신계의 마법이라 불리는 그 위는 무엇이라 불리는지 아는가?”

     

    메피스트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대륙을 바꿀 마법이다.”

     

    그리 선언하고 멋들어지게 양팔을 벌리는 메피스트.

     

    흠.

     

    뭐,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로켓을 만들겠단 소리 아닌가?

     

    별 거 아니네.

     

    내가 끼어들었다.

     

    “달 위에 네가 기대한 건 없어. 저건 맛 좋은 치즈가 아니라고.”

     

    메피스트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하나 충고하지. 지식을 탐구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지어다. 마법을 이해할 수 있음은 자체로 축복이며…”

     

    “의도를 알겠어. 시간을 끌고 있군. 여러분, 휘둘리지 마십시오.”

     

    내 조언에 아셀라가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내가 그렇게나 공략에 애를 먹었던 메피스트다. 지금까지의 대담도 분명 의도가 있을 터였다.

     

    전투태세를 취하는 파티원들.

     

    메피스트가 아쉽다는 듯 칠판을 톡톡 두드리고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마저 탐구하지 못해 아쉽군.”

     

    ―화악!!

     

    타냐가 서풍의 오러를 검을 통해 넓게 방출했다. 동시에 파티원을 보호하려 전방위에서 방어태세를 잡는다.

     

    본격적인 전투를 알리는 신호였다.

     

    “궁수님.”

     

    “이거였지!”

     

    머리 위로 화살을 쏘아내는 발렌. 하늘을 향해 날아가던 화살이 수십 발로 분열하며 방의 외곽을 두르며 박혔다.

     

    그 화살 꼬리에서 눈에 잘 띄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타냐의 오러와 섞여 전장을 탁하게 물들인다.

     

    “흠.”

     

    메피스트가 우리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에게 대처할 틈을 주지 않고 리셰가 측면으로 돌며 빠른 스텝과 함께 찔러낸다.

     

    다시 마술처럼 사라지는 메피스트.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그가 사라진 순간 궤적이 남았다.

    방에 가득 찬 연기가 부자연스럽게 비틀어져,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좌측이다.

     

    “거긴가!”

     

    ―콰쾅!

     

    시선이 닿는 것보다도 빠르게 발렌의 폭발 화살과 아셀라의 얼음창이 작렬한다. 흐르는 연기가 가리키는 왼쪽으로.

     

    아니나다를까, 공격이 적중한 곳에는 메피스트가 정확하게 서 있었다.

     

    비록 눈에 띄는 피해는 주지 못했지만 적어도 팔을 올려 방어하게 만드는 건 성공했다.

     

    “이런.”

     

    그가 얼음창에 찢겨 엉망이 된 책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말했다.

     

    “아직 다 못 읽었거늘.”

     

    다음 순간, 메피스트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흐트러진 연기만이 남는다. 궤적이 향하는 곳. 앰브로시아의 등 뒤였다.

     

    “자매님!”

     

    나는 즉시 보호주문을 시전했다. 쿠우웅! 신성력이 번쩍이며 만들어진 보호막이 메피스트의 정권을 막아내고는 곧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챙!

     

    어느새 그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달려온 리셰가 합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성검을 팔로 막아내는 메피스트. 그의 정장이 튿어지며 성검에 닿은 붉은 피부가 치직, 화상을 입은 듯 타오른다.

     

    그러기도 잠시, 다시 순간이동하여 방의 중앙으로 사라진 메피스트.

     

    “정신없는 자로군! 내 평생 저렇게 움직이는 이형은 처음 봤소이다!”

     

    “시간 마법. 말로 들을 땐 감이 잘 안 왔는데 까다롭네요.”

     

    리셰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목 뒤에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시간 정지’. 마왕만이 쓸 수 있는 고유 마법입니다.”

     

    그게 메피스트가 지금껏 보인 순간이동의 비밀이다.

    그는 시간을 멈추며 그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마법진도 안 보이는 걸 보면 즉시시전이야. 짜증 나네.”

     

    아셀라가 말했다.

     

    “시간의 결계석과는 다른 원리요?”

     

    “마왕이 시전하는 마법이라 그 혼자만이 영향을 받습니다. 다만 그동안 저희의 목숨이 붙어있는 걸 보면 몇 가지 제약은 있겠지요.”

     

    “제약이라면.”

     

    “멈춘 시간 속에서 우리랑 접촉할 수 없는 게 분명해. 지속시간도 길지 않을 테고. 지금까지 봤을 땐 5초를 안 넘었어.”

     

    아셀라는 금방 메피스트의 약점을 파악해냈다.

     

    뭐, 그걸 알아낸들 곧장 토벌할 수 없는 게 문제지만.

     

    “정말 작전대로 하면 쓰러트릴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저를 믿으시죠.”

     

    나는 당당하게 앰브로시아에게 대답한 후 아이템박스를 열어 몇 개의 포션을 준비했다.

     

    “용사님, 성검은?”

     

    “아직 공명은 아끼고 있어요.”

     

    “좋습니다. 공명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고 계시죠.”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워지니까.”

     

    리셰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피스트가 눈치 못 챈 지금,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네.”

     

     

    [No. 100 : 9위계 50%]

     

     

    승리로 향하는 길을 고를 권리는 저쪽에도 있다는 뜻인가.

     

    그러니 반반일 수밖에.

     

    “갑니다.”

     

    나는 리셰의 등을 치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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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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