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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8

       ​

        “그래도 연안을 따라 이동하니 좀 낫네…”

        ​

        마들레르는 난간에 등을 기댄 채로 저 멀리 보이는 중원의 풍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

        각오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루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래도 윌리엄에게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

        윌리엄.

        ​

        그녀는 멍하니 저 멀리 보이는 중원의 해안을 바라보며 그를 떠올렸다.

        ​

        아주 잘생긴(콩깍지) 얼굴.

        ​

        거대한 몸에 자리 잡은 근육.

        ​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박학다식한 지성.

        ​

        기사 견습생에서 순식간에 차기 기사단장 후보로 오를 정도의 능력.

        ​

        그가 무사히 유럽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면, 성공 가도를 달렸으리라.

        ​

        짧은 시간 안에 경지를 쌓고, 전공을 세운 기사가 뭇 군주들의 러브콜을 받지 않을 리가 없으니.

        ​

        ‘…이제와서 그런 생각을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

        윌리엄은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결혼도 했으니 서역에 올 생각은 없을 터.

        ​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모든 걸 내팽개치고 충동적으로 중원에 왔지만, 딱히 뾰족한 수나 계획 같은 것을 생각해둔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

        가장 먼저 생각에 닿는 것은 윌리엄에게 거절당할 경우.

        ​

        ‘…나는 좋아하지만, 윌리엄은 어떨까.’

        ​

        같이 전장에서 뛰던 시절에도 그는 딱히 호감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그녀로서는 윌리엄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

        만약 거절당하면?

        ​

        그에게는 누구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명분이 있지 않나?

        ​

        아내들이 있는데 여인을 들일 수 없다고 하면 그녀로서는 따로 할 말이 없었다. 

        ​

        문전박대를 하지는 않겠지만, 아내들이 버젓이 있는데 대뜸 찾아가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테니까. 

        ​

        윌리엄 자체는 반가워할지 몰라도, 부인들이 문제였다.

        ​

        ‘으으.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

        패배한 히로인 마냥 속으로 외쳐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

        그녀는 양 손바닥으로 볼을 치고는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

        “아 볼라. 일단 부딪혀. 내가 언제 생각했다고.”

        ​

        예나 지금이나 머리를 쓰는 건 그녀의 일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지식을 쌓은 편이긴 해도 똑똑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으니.

        ​

        그렇게 혼자서 궁상을 떨고 있으니, 갑판 위에 올라선 송경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배에서 시간 죽일 거리라곤 거의 없으니, 그녀와 잡담이라도 하려고 올라온 것이리라.

        ​

        마들레르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굴려 그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

        “바다에서 보는 중원의 풍경은 언제보아도 생경합니다.”

        ​

        “평생 살아온 곳 아닌가요?”

        ​

        “그렇다 하더라도 저 같은 사람이 배를 타는 일은 드문 일이라, 이렇게 해안을 바라보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

        “…저는 이게 두 번째에요. 중원에 올 때 한 번, 지금 한 번.”

        ​

        시선을 굴려 수평선을 바라본다.

        ​

        푸른색만이 가득한 바다는 언제나처럼 느긋하게 물을 밀어냈다. 

        ​

        보고 있기만 해도 모든 근심이 파도에 실려 사라지는 것 같은 상쾌한 경치. 하지만 마들레르는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

        “고민이 많으신가 봅니다.”

        ​

        “댁 말고는 말도 안 통하잖아요.”

        ​

        “중원어는 배우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

        “책하고는 거리가 먼 인생이라 될지 모르겠네요.”

        ​

        그녀가 완독한 책이라고 해봤자 성경 정도가 전부. 

        ​

        그나마도 이 시대 귀족치고는 유식한 축에 드는 편이었으니, 그녀가 말하는 건 나름의 겸손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

        “뭐든 배우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입니다.”

        ​

        “그런가요…”

        ​

        마들레르는 말꼬리를 흐리며 난간에서 몸을 뗐다. 풍경을 계속 바라보는 것도 질리니, 선실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

        “들어가십니까?”

        ​

        송경이 아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

        같이 시간을 죽일 동지가 사라진다는 건 자기 혼자서 넘쳐나는 시간을 힘껏 흘려보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

        “네. 좀 쉬려고요.”

        ​

        “들어가십시오.”

        ​

        그녀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갑판 아래로 사라졌다.

        ​

        ——————–

        ​

        “이곳이 광주…”

        ​

        마들레르는 배 위에서 보이는 도시의 모습에 감탄했다.

        ​

        ‘님페온보다도 화려하군요.’

        ​

        동로마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님페온보다도 화려한 도시.

        ​

        말이 비슷하다지,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 머릿수만 세도 훨씬 숫자가 많아 보였으니, 그녀는 한 도시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감탄했다.

        ​

        ‘처음 당도한 곳도 대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황제가 기거한다는 곳은 얼마나 크고 화려할지.’

        ​

        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관광보다는 윌리엄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그녀는 짐을 챙기곤 배에서 내려 송경이 잘 안다는 객잔으로 이동했다.

        ​

        다행스럽게도 객잔은 식사 시간이 아니었던 덕에 자리를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송경은 객잔에서 제일 잘 만드는 요리를 주문하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

        “오늘 하룻밤은 해풍객잔에서 보내고 내일부터 호남을 지나 호북으로 올라가면 될 것 같습니다.”

        ​

        “호남? 호북?”

        ​

        “아, 지명입니다. 그러니까 마들레르님께서 처음 내린 곳이 광동성이라는 곳이고, 그 위에 호남성, 그 위에 호북성이 있습니다. 저희 지금까지 배를 타고 이동한 거리를 이제 도보로 이동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중원은 정말 넓네요.”

        ​

        “하하, 먼 옛날에는 십수개의 나라가 동시다발적으로 생겼을 정도로 넓은 곳이긴 합니다.”

        ​

        송경은 분위기를 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며 마들레르와 잡담을 이어갔다.

        ​

        대화의 대부분은 마들레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것으로 이어졌지만, 송경은 나름대로 만족한 얼굴로 갓 놓여진 요리를 바라보았다.

        ​

        “광주의 해산물 요리는 아주 뛰어나기로 유명합니다.”

        ​

        “자, 자, 잠깐만요. 이건…”

        ​

        “아, 혹시 서역에서는 살지 않는 생물입니까?”

        ​

        송경이 젓가락으로 문어 다리를 집어 들어 올렸다. 그것을 본 마들레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어, 어떻게 저런걸 요리에?!’

        ​

        그녀가 아는 해산물은 기껏해야 생선에서 조개 따위가 전부. 

        ​

        오징어나 문어를 식용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는 당당하게 요리에 들어가 있는 문어를 보곤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

        “처음 문어를 보신 분들은 다들 놀라지만, 입에 한 번 넣으면 다시 입에 넣느라 말이 없어지곤 합니다.”

        ​

        ‘그, 그래도 문어라니…’

        ​

        서양에서 문어가 악마의 물고기 취급받는다는 것을 모른 송경은 그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마들레르의 서툰 젓가락은 문어를 피해 갔다.

        ​

        한평생 머릿속에 박힌 편견이 한순간에 사라지기는 쉽지 않은 탓.

        ​

        마들레르는 애써 문어를 피해 가며 요리를 음미하고는, 식사가 끝나자 찻잔을 손끝으로 돌리며 시간을 죽였다. 

        ​

        “마들레르님. 무림맹 지부에 미리 연통을 넣어두러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

        뒤이어 식사를 끝낸 송경은 그 모습을 보고는 넌지시 제안을 건넸다.

        ​

        “연통이요?”

        ​

        “예. 미리 이야기를 해두는 게 위 대협께도 더 좋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그분이 워낙 인기가 많으셔서…”

        ​

        “여기나 저기나 윌리엄은 인기가 많네요.”

        ​

        기사단 시절을 떠올린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송경은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

        ‘아름답군.’

        ​

        이목구비가 동양인과는 확연하게 달랐기에 인상은 달랐지만, 선명한 미모는 미의 기준이 다른 중원의 남성이라도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으니.

        ​

        마들레르는 그의 그런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바로 가도록 해요.”

        ​

        “예.”

        ​

        두 사람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객잔을 나섰다.

        ​

        무림맹 광주지부와는 거리가 꽤 있으니, 빨리 다녀오는 것이 좋다는 송경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

        ​

        “여기가 무림맹인가요?”

        ​

        “정확히는 지부입니다.”

        ​

        무림맹 광주지부를 지키고 있던 무사가 의아한 눈으로 마들레르와 송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이 드나드는 게 무림맹이라지만, 색목인이 무림맹에 방문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으니까.

        ​

        “무슨 일로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일이 많아 바쁘니 다음에 다시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

        “뭔가 변고라도 생긴 겁니까?”

        ​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

        “그렇군요. 수고하십시오.”

        ​

        송경은 미련 없이 물러났다. 

        ​

        캐묻는다고 순순히 답해줄 것도 아닌데 굳이 미운털이 박힐 필요는 없었던 탓.

        ​

        그렇게 송경이 물러나자, 말을 알아듣지 못한 마들레르가 그를 쳐다보았다.

        ​

        “무슨 일이에요?”

        ​

        “일이 있어서 지금은 손님 응대를 받지 않는 모양입니다.”

       

        “일?”

        ​

        “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림맹에서 뭔가 하는 모양입니다.”

        ​

        “그럼 객잔으로 돌아가야겠네요.”

        ​

        어차피 연통을 넣지도 못한다면 더 이상 나와 있을 필요는 없으리라. 그녀는 곧장 객잔으로 이동해 다시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

        “식사는 하셨는데, 올라가 보시는 게 낫지 않으십니까?”

        ​

        “아직 못 먹어본 요리가 있어서요.”

        ​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점소이를 불러 손짓으로 요리를 여러 개 시켰다.

        ​

        조금 전 요리를 시켰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양. 송경이 우려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그녀는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

        “사람이 살려면 이 정도는 먹어야죠.”

        ​

        ‘보존식은 별로 안 먹었던 것 같은데…’

        ​

        그녀는 송경을 내버려 두고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귀족 아가씨라고 먹는 자세는 우아했지만, 음식이 사라지는 속도는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

        “대단한 먹성이시군요. 지금까지 어떻게 참으셨습니까?”

        ​

        “보존식은 많이 먹을래야 먹을 수가 없죠.”

        ​

        끔찍하게 맛없는 걸 입안에 계속 쑤셔 넣는 건 고문에 불과하다.

        ​

        ‘나는 잉글랜드 귀족이 아니니까.’

        ​

        변태적으로 맛없는 걸 먹어대는 그쪽 귀족들과 비교하면 그녀는 미식 전문가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

        ‘먹고 난 후에 오랜만에 검 좀 휘둘러 봐야겠어.’

        ​

        먹은 걸 소화 시키는 데에는 훈련이 최고였으므로.

        ​

        그렇게 그녀가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가며 요리를 거의 다 비웠을 즈음, 객잔 안에 소란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야?”

        ​

        “도망쳐! 저 망할 놈들이 싸운다!”

        ​

        “젠장! 오늘은 좀 조용하나 싶었더니!”

        ​

        “마들레르님. 아무래도…”

        ​

        송경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전에 피하자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

        하지만 그녀는 비싼 돈을 주고 주문한 요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

        “어차피 구석이잖아요. 이쪽까지 피해는 안 올…”

        ​

        그녀는 말을 멈추고 곧바로 손등으로 날아오던 술병을 쳐냈다. 하지만 술병이 깨져버린 탓에 그녀의 몸과 식탁에 유리 파편과 술이 한가득 뿌려졌다.

        ​

        ‘최악이야.’

        ​

        “…어디 적당한데 숨어 있어요.”

        ​

        송경은 참견하지 않는 편이 좋다며 말하려다, 그녀의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고 곧장 객잔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

        “오냐, 다 죽어보자.”

        ​

        난장판에 암사자가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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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eval Knight in a Martial Arts Novel

Medieval Knight in a Martial Arts Novel

무협소설 속 중세기사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fter two years of being reincarnated as a medieval knight, he finally realizes that he's been reincarnated into a martial arts 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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