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연안을 따라 이동하니 좀 낫네…”
마들레르는 난간에 등을 기댄 채로 저 멀리 보이는 중원의 풍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각오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루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윌리엄에게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윌리엄.
그녀는 멍하니 저 멀리 보이는 중원의 해안을 바라보며 그를 떠올렸다.
아주 잘생긴(콩깍지) 얼굴.
거대한 몸에 자리 잡은 근육.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박학다식한 지성.
기사 견습생에서 순식간에 차기 기사단장 후보로 오를 정도의 능력.
그가 무사히 유럽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면, 성공 가도를 달렸으리라.
짧은 시간 안에 경지를 쌓고, 전공을 세운 기사가 뭇 군주들의 러브콜을 받지 않을 리가 없으니.
‘…이제와서 그런 생각을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윌리엄은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결혼도 했으니 서역에 올 생각은 없을 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모든 걸 내팽개치고 충동적으로 중원에 왔지만, 딱히 뾰족한 수나 계획 같은 것을 생각해둔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생각에 닿는 것은 윌리엄에게 거절당할 경우.
‘…나는 좋아하지만, 윌리엄은 어떨까.’
같이 전장에서 뛰던 시절에도 그는 딱히 호감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그녀로서는 윌리엄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만약 거절당하면?
그에게는 누구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명분이 있지 않나?
아내들이 있는데 여인을 들일 수 없다고 하면 그녀로서는 따로 할 말이 없었다.
문전박대를 하지는 않겠지만, 아내들이 버젓이 있는데 대뜸 찾아가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테니까.
윌리엄 자체는 반가워할지 몰라도, 부인들이 문제였다.
‘으으.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패배한 히로인 마냥 속으로 외쳐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그녀는 양 손바닥으로 볼을 치고는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아 볼라. 일단 부딪혀. 내가 언제 생각했다고.”
예나 지금이나 머리를 쓰는 건 그녀의 일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지식을 쌓은 편이긴 해도 똑똑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으니.
그렇게 혼자서 궁상을 떨고 있으니, 갑판 위에 올라선 송경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배에서 시간 죽일 거리라곤 거의 없으니, 그녀와 잡담이라도 하려고 올라온 것이리라.
마들레르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굴려 그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바다에서 보는 중원의 풍경은 언제보아도 생경합니다.”
“평생 살아온 곳 아닌가요?”
“그렇다 하더라도 저 같은 사람이 배를 타는 일은 드문 일이라, 이렇게 해안을 바라보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게 두 번째에요. 중원에 올 때 한 번, 지금 한 번.”
시선을 굴려 수평선을 바라본다.
푸른색만이 가득한 바다는 언제나처럼 느긋하게 물을 밀어냈다.
보고 있기만 해도 모든 근심이 파도에 실려 사라지는 것 같은 상쾌한 경치. 하지만 마들레르는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고민이 많으신가 봅니다.”
“댁 말고는 말도 안 통하잖아요.”
“중원어는 배우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책하고는 거리가 먼 인생이라 될지 모르겠네요.”
그녀가 완독한 책이라고 해봤자 성경 정도가 전부.
그나마도 이 시대 귀족치고는 유식한 축에 드는 편이었으니, 그녀가 말하는 건 나름의 겸손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뭐든 배우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입니다.”
“그런가요…”
마들레르는 말꼬리를 흐리며 난간에서 몸을 뗐다. 풍경을 계속 바라보는 것도 질리니, 선실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들어가십니까?”
송경이 아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같이 시간을 죽일 동지가 사라진다는 건 자기 혼자서 넘쳐나는 시간을 힘껏 흘려보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네. 좀 쉬려고요.”
“들어가십시오.”
그녀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갑판 아래로 사라졌다.
——————–
“이곳이 광주…”
마들레르는 배 위에서 보이는 도시의 모습에 감탄했다.
‘님페온보다도 화려하군요.’
동로마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님페온보다도 화려한 도시.
말이 비슷하다지,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 머릿수만 세도 훨씬 숫자가 많아 보였으니, 그녀는 한 도시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처음 당도한 곳도 대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황제가 기거한다는 곳은 얼마나 크고 화려할지.’
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관광보다는 윌리엄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그녀는 짐을 챙기곤 배에서 내려 송경이 잘 안다는 객잔으로 이동했다.
다행스럽게도 객잔은 식사 시간이 아니었던 덕에 자리를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송경은 객잔에서 제일 잘 만드는 요리를 주문하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룻밤은 해풍객잔에서 보내고 내일부터 호남을 지나 호북으로 올라가면 될 것 같습니다.”
“호남? 호북?”
“아, 지명입니다. 그러니까 마들레르님께서 처음 내린 곳이 광동성이라는 곳이고, 그 위에 호남성, 그 위에 호북성이 있습니다. 저희 지금까지 배를 타고 이동한 거리를 이제 도보로 이동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중원은 정말 넓네요.”
“하하, 먼 옛날에는 십수개의 나라가 동시다발적으로 생겼을 정도로 넓은 곳이긴 합니다.”
송경은 분위기를 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며 마들레르와 잡담을 이어갔다.
대화의 대부분은 마들레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것으로 이어졌지만, 송경은 나름대로 만족한 얼굴로 갓 놓여진 요리를 바라보았다.
“광주의 해산물 요리는 아주 뛰어나기로 유명합니다.”
“자, 자, 잠깐만요. 이건…”
“아, 혹시 서역에서는 살지 않는 생물입니까?”
송경이 젓가락으로 문어 다리를 집어 들어 올렸다. 그것을 본 마들레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 어떻게 저런걸 요리에?!’
그녀가 아는 해산물은 기껏해야 생선에서 조개 따위가 전부.
오징어나 문어를 식용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는 당당하게 요리에 들어가 있는 문어를 보곤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문어를 보신 분들은 다들 놀라지만, 입에 한 번 넣으면 다시 입에 넣느라 말이 없어지곤 합니다.”
‘그, 그래도 문어라니…’
서양에서 문어가 악마의 물고기 취급받는다는 것을 모른 송경은 그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마들레르의 서툰 젓가락은 문어를 피해 갔다.
한평생 머릿속에 박힌 편견이 한순간에 사라지기는 쉽지 않은 탓.
마들레르는 애써 문어를 피해 가며 요리를 음미하고는, 식사가 끝나자 찻잔을 손끝으로 돌리며 시간을 죽였다.
“마들레르님. 무림맹 지부에 미리 연통을 넣어두러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뒤이어 식사를 끝낸 송경은 그 모습을 보고는 넌지시 제안을 건넸다.
“연통이요?”
“예. 미리 이야기를 해두는 게 위 대협께도 더 좋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그분이 워낙 인기가 많으셔서…”
“여기나 저기나 윌리엄은 인기가 많네요.”
기사단 시절을 떠올린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송경은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름답군.’
이목구비가 동양인과는 확연하게 달랐기에 인상은 달랐지만, 선명한 미모는 미의 기준이 다른 중원의 남성이라도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으니.
마들레르는 그의 그런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가도록 해요.”
“예.”
두 사람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객잔을 나섰다.
무림맹 광주지부와는 거리가 꽤 있으니, 빨리 다녀오는 것이 좋다는 송경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
“여기가 무림맹인가요?”
“정확히는 지부입니다.”
무림맹 광주지부를 지키고 있던 무사가 의아한 눈으로 마들레르와 송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이 드나드는 게 무림맹이라지만, 색목인이 무림맹에 방문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으니까.
“무슨 일로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일이 많아 바쁘니 다음에 다시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뭔가 변고라도 생긴 겁니까?”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렇군요. 수고하십시오.”
송경은 미련 없이 물러났다.
캐묻는다고 순순히 답해줄 것도 아닌데 굳이 미운털이 박힐 필요는 없었던 탓.
그렇게 송경이 물러나자, 말을 알아듣지 못한 마들레르가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일이 있어서 지금은 손님 응대를 받지 않는 모양입니다.”
“일?”
“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림맹에서 뭔가 하는 모양입니다.”
“그럼 객잔으로 돌아가야겠네요.”
어차피 연통을 넣지도 못한다면 더 이상 나와 있을 필요는 없으리라. 그녀는 곧장 객잔으로 이동해 다시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식사는 하셨는데, 올라가 보시는 게 낫지 않으십니까?”
“아직 못 먹어본 요리가 있어서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점소이를 불러 손짓으로 요리를 여러 개 시켰다.
조금 전 요리를 시켰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양. 송경이 우려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그녀는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람이 살려면 이 정도는 먹어야죠.”
‘보존식은 별로 안 먹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송경을 내버려 두고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귀족 아가씨라고 먹는 자세는 우아했지만, 음식이 사라지는 속도는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단한 먹성이시군요. 지금까지 어떻게 참으셨습니까?”
“보존식은 많이 먹을래야 먹을 수가 없죠.”
끔찍하게 맛없는 걸 입안에 계속 쑤셔 넣는 건 고문에 불과하다.
‘나는 잉글랜드 귀족이 아니니까.’
변태적으로 맛없는 걸 먹어대는 그쪽 귀족들과 비교하면 그녀는 미식 전문가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먹고 난 후에 오랜만에 검 좀 휘둘러 봐야겠어.’
먹은 걸 소화 시키는 데에는 훈련이 최고였으므로.
그렇게 그녀가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가며 요리를 거의 다 비웠을 즈음, 객잔 안에 소란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도망쳐! 저 망할 놈들이 싸운다!”
“젠장! 오늘은 좀 조용하나 싶었더니!”
“마들레르님. 아무래도…”
송경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전에 피하자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비싼 돈을 주고 주문한 요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구석이잖아요. 이쪽까지 피해는 안 올…”
그녀는 말을 멈추고 곧바로 손등으로 날아오던 술병을 쳐냈다. 하지만 술병이 깨져버린 탓에 그녀의 몸과 식탁에 유리 파편과 술이 한가득 뿌려졌다.
‘최악이야.’
“…어디 적당한데 숨어 있어요.”
송경은 참견하지 않는 편이 좋다며 말하려다, 그녀의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고 곧장 객잔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오냐, 다 죽어보자.”
난장판에 암사자가 끼어들었다.
뜌땨…뜌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