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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8

        

         네오 헤이븐에는.

         그러니까 현실은 당연하고 원래 게임이던 그곳이나, 누군가의 존재 덕분에 조금 매운맛이 순화된 네오 헤이븐 프라임에도 ‘회상 방’이나 ‘갤러리’같은 기능-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왜? 그야… 아무리 호감도 시스템을 비롯해 그렇고 그런 내용이나 장면이 존재한다 해도 오직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이용되는 지름길을 개발사가 굳이 뚫어줄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었으니.

         

         오픈월드와 슈팅 게임 쪽을 강하게 지향한다면 꽤 지당한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당연하다. 암 그렇고 말고. 여타 사용자들의 불만이 있긴 했어도 굳이 그런 짓을 하는 걸로 한국에서 유사 야겜 소리를 들을 일도 방지했으니 다행이기도 하고.

         

         ……하지만 유저들은 언제나 방법을 찾아내는 법.

         

         기괴할 정도의 오버테크놀로지 수준을 자랑하며 파일 변조를 기가 막히게 잡아내는 카오스 포인트도 씬 직전에 전용 세이브를 만들고 ‘발렌타인자매특별이벤트퍄퍄퍞’ 처럼 머리 아파지는 이름을 붙이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다는 것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일부 고이고… 2회차, 3회차까지 뉴 게임 플러스를 돌리던 유저들은 일일이 저장 목록을 만들어서 수집하는 것보다 훨씬 재밌는 이스터에그를 발견했으니.

         

         시나리오와 퀘스트를 따라 흐르고 흐르다 보면 일부 골 때리는 사건들의 진상 조사나, 경찰 수사에도 사용하는 엘리시움의 빅 데이터 기반 현장 재구성 시뮬레이션을 주인공이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아, 물론 플레이어가 거기 취직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고 건너 건너 인맥을 이용해서 도움을 받는 형식인데… 어쨌든.

         

         여기서 우리의 주인공은 엘리시움 직원에게 입력할 데이터로 해당하는 날짜, 시간, 등장인물들의 신원, 간략한 성격과 관련된 기억, 장소, 상황 등을 정확하게 제공해야 맞지만.

         

         이상한 부분에서 자유도를 챙겨주는 게임답게 현재 퀘스트나 형편과는 전혀 관계없는 시뮬레이션을 부탁할 수도 있었고, 무려 변수가 딱딱 맞아떨어지면 굉장히 엉뚱한 장면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은 유저들이 궁금해하던 몇몇 비하인드 씬과 더불어, 실제와는 엄청나게 괴리하더라도 불특정 다수의 충분한 흥미…를 돋울만한 물건들이 가끔씩 말이다.

         

         따라서 시스템적으로 선택지가 제한되지 않을 경우, 현실에서 무수한 시행착오와 관측을 반복하다 보면 만약(if)의 가능성도 얼마든지.

         

         하마터면 놓치고 넘어갔을 편의주의적 미래도 한 번쯤은 그려볼 수 있지 않냐는. 그런 허황되고 막연한 이야기의 일부이다.

         

         

         

         “……이게 진짜 잘하는 짓인가 모르겠네.”

         

         소녀, 현재는 마카로비치 쪽 신원을 토대로 에나마 코퍼레이션에 취직-억류- 중인 아나스타샤가.

         전동 칫솔을 한 손에 든 채로 입을 헹구다 말고 화장실 거울을 향해 중얼거렸다.

         

         당연히 그런다고 유리 안의 자신이 색다른 반응을 돌려주는 것도 아니기에, 정답 없는 문제에 갑자기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스스로의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반복해서 설득하는 작업에 가까웠다.

         

         “하아….”

         

         사이버웨어의 시계가 가리킨 날짜는 초여름.

         정확히는 카사네 아마기가 만인 앞에서 머리를 짓밟히고 실각한 바로 그날 밤, 거기에 장소는 여전히 에나마 본사에 딸린 개인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확고했던. 외출과 막중한 개인 임무로 인해 감시의 눈길도 적어진 틈을 타 이 곳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원대한 결심은 최후의 최후. 마지막에 덧없이 꺾여버렸…… 아니, 그녀 스스로 굽혔다.

         

         이유? 이유야 간단했다.

         

         카이쥰 새끼가 존나 꼴 보기 싫다거나, 여기서 더 뭉개고 있다간 큰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보다도.

         

         사교회장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 그런 열렬한 고해성사-프로포즈-같은 대사를 쇼우로부터 들어 놓고 대답도 없이 도망치면… 대체 무슨 난리가 날까 차마 상상하기가 무서웠기에.

         

         아니, 그야 넘치는 카리스마와 이성을 자랑하는 아마기 가문의 혈족답게 TPO(Time, Place, Occasion의 약자;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상황에 맞게’라는 뜻)를 따져서 내가 홀연히 증발해버리면 알아서 무언의 거절을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도 있겠지만.

         

         만일 그 과정에서 안 그래도 영 불안해 보이던 감정의 균형이 무너지거나 폭주하기라도 하면?

         애가 갑자기 회까닥! 해가지고 ‘그 도망친 년 당장 내 앞에 잡아 와!!’를 시전하기라도 하면?

         

         아론의 경우처럼 상호존중 협정이라도 체결한다면 모를까, 등뒤를 바짝 쫓아오는 메가코프 간부를 달고 몇 년씩 숨어 지낼 자신이 그녀는 도저히 없었으리라.

         

         그랬다간 자칫 피곤해서 정신적으로 죽어버릴뿐더러, 내년이면 프롤로그가 시작될 텐데 이제 와서 행동에 제약이 걸리는 건 조금… 곤란했다. 여러모로.

         

         음, 아무튼지간에 결론은 그거다. 조만간 며칠 내로 진솔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잡아 어떻게든 해결을 보고 나가자는 것. 그걸 위해서 아나스타샤는 적진으로 돌아온 셈이다.

         

         최초부터 괜히 생각보다 허접하고, 정작 총책임자인 쇼우에게는 찍소리도 못하는 카이쥰 놈한테 의존하려 했던 게 잘못일지도 몰랐고. …망할 간신배 같은 녀석.

         

         하지만 아무리 예의가 아니고 걱정이 된다 한들, 직감이 보내오는 쎄한 느낌과 적신호를 무시하고 억지로 돌아올 필요가 있었냐…? 글쎄올시다.

         

         “제로, 너도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라 생산적인 의견을 좀……. 아, 맞다.”

         

         세안도, 양치질도 모두 깔끔하게 끝마쳤겠다.

         

         물이 튄 머리 끝자락을 수건으로 톡톡 말리면서 침대로 돌아가는 와중, 무심코 자리에 없는 사람을 찾아 떠들던 입이 닫혀버렸다.

         

         원래 엑사테크 드로이드는 반입 금지 품목이지만.

         

         체류가 더 길어질 수도 있는 만큼 작전이 끝나자마자 ‘품위 유지용 장식품’으로 정식 등록한 제로는 지금 인근 수리 센터로 보내진 터라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는데 무슨 착각을 한거람.

         

         뭐, 그나마 이런 얼빠진 모습을 본 사람이 없으니 상관은 없겠….

         

         “그 드로이드를 많이 아끼시나 보군요. 혹시… 가족 대신으로 여기시는 겁니까?”

         

         “힉!?”

         

         어느새 방 주인의 허락은커녕, 소리소문조차 없이 방에 들어와 침대에 앉아있던 쇼우의 대답에 아나스타샤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어… 만화적 과장을 좀 보탠다면 머리카락이 위로 솟구칠 정도로.

         

         그리고는 시선이, 양측의 눈빛이 순식간에 교차한다.

         한 쪽은 짙은 당황과 곤혹을, 반대편은 어딘가 기묘한 열기를 담은 두 눈빛이.

         

         “무, 뭐…? 뭔데!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는데?!”

         

         직전까지 목덜미에 얹어 놨던 수건을 무슨 무기라도 되는 것 마냥 양손으로 꼬옥 쥔 채 빳빳하게 잡아당긴 그녀의 모습에 그가 일렁이는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라는 질문은 피차 정말 의미가 없으니 생략했다.

         엄밀히 따져봐야 본인의 관할 부서 내에서 그가 가지 못할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폭론에 가까운 대답만 돌아올 것 같았으니.

         

         “…그렇게 딱딱한 말씀 마시지요. 당신과 제 사이가 아닙니까? 위험한 전투에 휘말리셨다는 말을 들었기에, 정말 괜찮으신 건지 걱정되어서 왔습니다.”

         

         “어…… 그으래?”

         

         애매하게 흐린 말꼬리.

         

         뭐, 일단 용건 자체는 일리가 있었다. 직접 챙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높으신 분이 명목상 내세울 이유 정도는 됐으니까.

         

         다만 그걸로 다가 아니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한 다음, 따로 할 말이 있어서 왔겠거니… 하고 아나스타샤는 납득했을 따름이다.

         

         ……그건 정말 아직도 위기감이 부족했다고 밖엔 설명할 방법이 없는 행동이었고.

         

         “…흐음.”

         

         폭신, 하는 살짝 들떠 있던 이불에서 바람이 새는 소리와 함께.

         미심쩍음을 삼킨 그녀가 침대에, 쇼우와 같은 쪽 면에 살며시 자리를 정돈하고는 앉았다.

         

         그래도 설마 개인실에 자기 침대인데 허락없이 동석한다고 뭐라 하겠냐는 안일함의 발로이자, 거기 사교 파티 뒷방에서는 무슨 온기가 그립답시고 무릎 베개 비슷한 것도 부탁했었으니 이번에도 비슷한 경우라 생각하며.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한 방에 몸을 잠시 숨긴 것과 사적인 공간에서의 거리감이 정말 그렇게 똑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

         

         

         

         ★ ☆ ★ ☆ ★

         

         

         

         “그래서, 멀쩡한 걸 확인했으니 이제 얌전히 돌아가려는 건 아닌 것 같고. 하고 싶은 말이라도…?”

         

         “….”

         

         이상하다.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음을 바보라도 느낄 수 있으리만치 공기가 끈적해졌다.

         

         점점 깊어지는 웃음을 감출 흉내도 내지 않으면서, 대답도 없이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쇼우의 태도에 내가 실수한 게 있나 거꾸로 되짚어보게 될 지경이다.

         

         미소가 실은 꽤 공격적인 표정이라는 건 어느 유명인사가 남긴 말이었더라.

         유사 과학이니, 만화에나 나올 법한 과장이라는 지적은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실제로 뭔가를 결심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기색에 슬슬 피부가 찌릿찌릿했으니까.

         

         “…….”

         “저, 저기요…?”

         

         움츠러드는 목소리를 억지로 밖으로 끄집어내 의문문의 형태로 던졌다.

         

         특별히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지그시 눈총을 받으니 점차 확신이 사라지는 와중이었는데.

         이대로 다물고 있어봐야 이 기묘한 대치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보장이 없어서 불만이 있으면 우선 말을 해보라는 의미를 담은 액션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반항 아닌 반항을 저지른 결과.

         마침내 그 속마음을 털어놓을 기분이 들었는지, 쇼우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참았던 말을 꺼낸다고 곧장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아샤, 혹여나 저를 미치게 하려고 작정하신 겁니까? 아니면 남자라는 생물을 너무 이성적으로 바라보시는 게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설마… 저 이외의 다른 놈들에게도 이런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있는 건 아니리라 믿고 싶군요.”

         

         “엥? 어? 그게 무슨??”

         

         아마 이 지구에서 생물학적 여성 딱지를 단 인간 중에 가장 남심을 잘 파악하고 있을 나에게 감히 훈수하는듯한 건방진 태도는 둘째 치고.

         

         놀라서 움츠러드는 반응도 아랑곳 않은 채, 돌연 몸을 반쯤 일으킨 그가 내게 상반신을 숙이고는 목덜미를 향해 팔을 뻗어왔다.

         

         “고독과 외로움의 발로라 해도.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신분으로 에나마에… 그것도 저를 먼저 찾아 주신 건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거기서 쇼우의 팔이 세상 섬세하게, 느끼하게 움직였으며.

         피부에 다가오는 기척과 끈끈한 의도가 농후한 온기에 모든 감각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동작이 얼어붙은 사이에 팔, 어깨를 지나 목을 비롯한 피부를 스윽 훑고 귓가에 가라앉은 머리칼을 무슨 커튼 자락을 어루만지듯이 손가락으로 사라락.

         

         “마치 제가 올 거를 알고 계셨던 것처럼 문단속을 느슨히 하신 걸로도 모자라, 샤워 가운에 수건 차림새로 눈도 코도 아찔하게 만들며 이렇게 다가오시다니… 암묵적인 허락으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뜻입니까?”

         

         “으…? 아? 아니, 아니지. 잠깐잠깐! 내가 미쳤다고 그런 의도로 행동했을 리가…!”

         

         “그런 관대한 거리감이. 남자를 미치게 만든다고 저는 경고해드리고 있는 겁니다. 아니, 이게 저에게만 보여주시는 태도라면 말마따나 지적할 거리가 되진 않는군요.”

         

         한층 더 그윽해진 그의 눈길에 뇌내에서 거센 경종이 울렸다.

         

         문이 제대로 안 닫혔다니? 그거야 스마트 락이 달려있어서 대충 밀기도 했고, 평소엔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제로가 항상 대신 닫아줬으니까.

         

         헐거운 복장으로 다가왔다고? 방금 막 씻고 나왔는데 방에 들어와 있던 놈이 할 말이냐!? 자각없이 다가간 건 실수일 수 있지만….

         

         이 노곤한 몸으로 정승처럼 멀뚱히 서있기엔 오늘 너무 격렬한 전투에 휘말려서 더럽게 피곤했는데? 나보고 대체 어쩌라고!

         

         뇌가 미처 주어진 정보를 다 이해하기도 전에 속사포처럼 저 할 말만 쏟아낸 쇼우였지만.

         상황은 단순히 말로 표현 가능한 그것보다 더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읏…!”

         

         간신히 들어올린 손으로 쇼우의 접근을 붙잡아 제지하기도 전에.

         머릿결 사이를 흐트러트리던 손가락이 돌연 더 깊이, 아니… 내 어깨를 붙잡고선 아예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가까이오는 쇼우의 얼굴, 안 그래도 쓸데없이 미형이라 괜히 직시하면 착잡한 기분이 들던 그가 이만하면 충분히 예고했다는 것처럼 선뜻 다가온다.

         

         면전에 어린 지독한 갈증이 향하는 곳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서 턱 부근을 감추듯 고개를 팩 돌려버리자, 그래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자연스레 목적지를 바꾼 쇼우의 입술이….

         

         …츄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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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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