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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9

       아주 오랜 옛날. 여신 르퀴네스는 자신이 아끼던 엘프족을 위하여 씨앗을 하나 선물했다.

       

       [브릴뤼움 폭포로 떨어지는 물길에 섬이 있다. 그곳에 이 씨앗을 심고 두 계절이 지날 때까지 버티어라. 그렇게 되면 너희와 너희의 후손은 대대손손 정령의 비호를 받으며 풍요를 영위할 것이다.]

       

       당시 엘프족 족장은 감읍하며 여신의 말을 따랐다.

       

       엘프들은 씨앗을 심고, 새싹이 나는 것을 직접 지켜보았다. 날마다 물을 주고 볕을 들게 하여 비료가 없던 시절부터 영양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 지극정성이 있기 때문에, 세계수는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느티나무 수준으로 성장했다.

       

       그 이후로도 수백 년간 커지고 커졌다. 그러더니 현대에 이르러서는 수도 메르헤름의 어느 곳에서도 나무의 줄기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크다. 웅대하다. 어느 곳에서나 잘 보인다.

       

       국목(國木)이 주는 장엄함이 수많은 엘프를 안심시켰다. 여신님께선 어느 곳에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구나.

       

       그만큼 엘프족은 세계수를 잘 관리해 왔다. 마왕군에게 딱 한 번 공격받은 적은 있어도 시든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큰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레너윌은 허허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곳은 필리우트 제국에 위치한 카우렐리아 대사관. 수많은 외교적 회합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현재 제국과 엘프국은 면밀히 협조하고 있었다.

       

       두 나라 모두 절멸급 마수에게 큰 피해를 입은 직후다. 외교전이라는 걸 벌일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두 나라는 가족처럼, 또한 원래는 한 나라였던 것처럼 지내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마왕이 부활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러니 진심을 터놓고 이리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입니다. 신록의 세계수는 조만간 마왕군의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공작께서는 말씀에 확신을 담아 하시는군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말입니다.”

       

       외교대사는 헛기침했다.

       

       “마지막 남은 로드스톤이 국목의 옹이구멍에 있다는 건 온 세상이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엄중한 경비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현재 배치된 병력으로는 부족하실 겁니다.”

       “어느 정도로 경계를 강화해야 하는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대사의 질문에 레너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얼마 전 받았던 서신이 떠올랐다.

       

       버멜 호르데. 그 친구가 보낸 편지였다.

       

       참 학생 하나가 여러모로 귀찮게 한다 싶었다. 

       

       그래도 그 유학생 덕분에 틸레트가 완전히 파괴되는 건 막았다. 게다가 에테르와도 접점이 있었던 것 같으니.

       

       ‘저 보증 좀 서주십쇼.’

       

       레너윌이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화염 정령왕의 맹공을 버티고도 남을 수준이라면 괜찮을 겁니다.”

       “그 정도나 되어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예.”

       

       그러자 대사가 입매를 샐쭉 비틀었다.

       

       “그만한 거물이 있었더라면 세상은 이미 망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역사상 정령왕을 사살하고 그 자리를 찬탈했던 건 마왕뿐이었다.

       

       그런 마왕조차도 수많은 대정령의 공격을 받고 여신이 내린 신성석에 봉인되었으니. 여전히 그 아래에 있는 마수들은 마왕보다 약하다는 것이 세상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마왕보다 더 강력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개체가 현존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게 가능하기나 하덥니까?”

       “그때부터 1천 년이 흘렀습니다. 마왕군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그러니 한순간도 방심해선 안 될 것이다.

       

       “대사님께서도 아실 겁니다. 현재 제국에서 힘을 잃어버린 절멸급 마수를 보호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네, 압니다.”

       “그 마수를 심문하다가 무얼 알아냈는지 아십니까?”

       

       이어지는 레너윌의 말에 외교대사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 세상에.”

       “거짓 정보일지도 모르지만, 대비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필요하면 제국의 손도 빌리도록 하시죠. 마왕의 부활 앞에선 국익을 가릴 때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레너윌은 세계수를 보호하기 위한 몇 가지 책략을 알려주었다. 이에 대사는 감탄하면서 해당 메시지를 본국에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이 비공개회담이 효력을 발휘하기까지는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

       

       

       [카우렐리아 본국은 필리우트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제부턴 두 나라가 함께 신록의 세계수를 보호할 것이다.]

       

       [제국에선 기술단을 파견하여 대공 마법진 구축 작업에 착수했다. 해당 시공에는 하스펠트 공작과 토츠펠 공작 가문이 참여한다. 두 가문은 과거 스크롤 마도의 시초를 연 것으로 유명하다.]

       

       [경비 인력도 추가 배치된다. 기존 3천 명 규모에서 2만 명 규모까지 증강한다. 이에 따라 기존에 낙후되었던 설비도 최신식으로 교체한다.]

       

       [또한 오늘부로 관계자 외에는 세계수 근처의 출입에 엄격한 통제가 시행될 것이라고 카우렐리아 행정부는 전하였다.]

       

       “…빌어먹을 새끼들.”

       

       에테르는 읽던 신문을 내팽개치고는 발로 꾹꾹 짓밟았다. 곁에서 아침 커피를 홀짝이던 아카샤가 물었다.

       

       “무슨 일이래.”

       “그 요호족 꼬맹이가 기어코 발설한 모양이다.”

       

       엘프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족속들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틀림없이 요호족 계집이 신고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보안을 철저히 할 이유가 없었다.

       

       “요호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인간 놈들 한 말이 빈말이 아니었군.”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너무 평온한데?”

       “조만간 검찰이 쳐들어오겠지. 그러니까 내가 뭐랬나? 얼른 짐이나 싸라.”

       

       당장 튀어야 한다.

       

       안 그래도 교수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던 참이었다.

       

       동료 교수라는 작자들은 틈만 나면 내리갈굼질이었고, 총장은 말로만 미안하다면서 온갖 짬처리는 다 시켰다. 학생들은 공부할 의지도 별로 없는 것들이 조금 익숙해졌다고 남의 연애사만 캐묻고 앉아있다. 정말이지, 죄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연구 시간이 부족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학생으로 들어올 걸 그랬다. 

       

       에테르는 아카샤가 입고 있는 교복을 흘겨보았다.

       

       “…….”

       

       아니다. 저 옷은 죽어도 못 입어.

       

       “그런데 짐 싸서 어디로 숨어있게?”

       “동족이 있는 1차 도련선까지 후퇴한다.”

       “바다를 가로질러 가겠다고?”

       “그것 말고는 정령의 눈을 피할 방법이 없다.”

       

       에테르는 학생 출석부를 내던지고는 남은 서류를 전부 긁어모았다.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최단루트로 도망칠 수 있을까, 연구자료를 챙기는 와중에도 머리를 굴렸다.

       

       “뭐 해? 빨리 안 움직이고.”

       “흐음.”

       

       그 와중에도 아카샤는 콧소리를 내며 뭉그적거렸다. 어째 동생은 날이 갈수록 태연해지는 것 같았다.

       

       똑똑.

       

       문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왔군.”

       

       검경이 벌써 들이닥친 모양이다.

       

       에테르는 마력초를 물고 슬그머니 불길을 댕겼다. 스태프를 꽉 쥐고는 문고리를 천천히 잡아 돌렸다.

       

       끼익, 탁.

       

       “자, 잠깐……!”

       

       높고 다급한 목소리.

       

       예상과는 다른 새된 소리에, 에테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검찰도, 경찰도 아니었다.

       

       프레이였다.

       

       “잠깐 진정하고 내 얘기 좀 들어 봐…!”

       

       프레이는 귀와 꼬리를 파닥거리며 손을 앞으로 내뺐다. 제발 때리지 말라며 애처롭게 탄원하는 자세였다.

       

       에테르는 마지못해 스태프를 내려놓았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해라.”

       “저, 그게….”

       

       머뭇거리던 프레이의 입에서 몇 마디가 흘러나온다.

       

       “우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뭐?”

       

       에테르가 허, 하며 헛웃음을 피웠다.

       

       “갑자기 나타나서 뭐냐. 혹시 거꾸로 협박하는 건가?”

       “협박이라니…?”

       “오늘 신문을 봤다. 널 신고했으니까 그만 단념하고 자수하라, 뭐 그런 소리잖아.”

       “…….”

       

       그래, 너흰 그런 종족이니까.

       

       인간, 엘프, 수인족까지. 모든 종족의 행동 패턴을 전부 이해한 지 오래다. 다음은 안 봐도 비디오겠지.

       

       과연 언제 본색을 드러낼까, 시간을 재고 있을 때였다.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내려다본 소녀의 눈망울이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신고 안 했어. 안 했단 말이야.”

       “거짓말이군.”

       “야─!!”

       

       프레이는 빽 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해! 흐윽,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냐고!!”

       

       슬픔과 좌절, 분노와 회한이 서린 표정.

       

       프레이는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드러나는 성격이다. 또 다른 자신이 머릿속에 각인시킨 지식이었다.

       

       그랬기에 에테르는 봇물 터지듯이 나오는 프레이의 울분에 입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캘리퍼스를 꽉 쥐었던 손에 힘이 점차 빠졌다. 프레이는 옷소매로 눈물 콧물을 닦아내며 씩씩거렸다. 왜 갑자기 여기 와서 이러는 건지, 기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한테 사과하러 왔단 말이야! 그때 아무 말도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다시 나랑 친구들 곁으로 돌아오라고오!!”

       “늦었다.”

       “안 늦었어!”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리 지껄이지?”

       “내 친구잖아!!”

       

       떽떽거리는 소리에 귀딱지가 내려앉을 지경이다. 에테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아쳤다.

       

       “…나는 마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마왕군과 나머지 종족은 함께할 수 없어.”

       “그러면 마왕군에서 얼른 나오란 말이야!”

       

       기가 막혔다.

       

       “으음, 그래. 그렇게 된 거란 말이지.”

       

       다음 대화를 받아준 건 에테르가 아닌 아카샤였다.

       

       “꼬맹아, 울지 말고 교실로 돌아가 있어. 발설 안 했으면 말고. 어차피 마왕님께서는 너희를 몽땅 죽이려는 생각은 안 하고 계시니까.”

       

       듣기에 섬뜩한 말을 내뱉으며 프레이를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돌려보낸 아카샤. 그녀가 곧바로 문을 닫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에테르는 등받이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로 픽픽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와, 언니 방금 좀 쩔었어.”

       “…또 뭐.”

       “저 애한테 한 말, 옛날에 하스펠트 교수가 내뱉던 화법이랑 똑같았던 거 알아?”

       

       그 말에 에테르가 눈을 부라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 말조심해.”

       “조심하긴 뭘 조심해. 소통 안 하고, 걸핏하면 밀어붙이고, 남의 감정 헤아릴 줄 모르고. 이거 완전…….”

       “입 닥쳐, 아카샤.”

       “언니나 아가리 해.”

       

       에테르는 아카샤를 노려보았다.

       

       아카샤도 에테르를 노려보았다.

       

       “너 요즘 변했구나.”

       “변한 건 그쪽이고요.”

       “그래 놓고 구천지대계 2석이라고 할 수 있겠어?”

       “타락했다고 다 같은 타락이 아니거든.”

       

       에테르가 언성을 높일수록 아카샤도 말의 수위를 높였다. 에테르는 아카샤까지 왜 이러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래서야 자기 몰래 무언가 꿍꿍이를 숨겨두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아무튼 난 먼저 교실로 가 있을게. 아무래도 신고한 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동안 잘 생각해서 오라고.”

       “…….”

       

       그렇게 아카샤까지 가고 혼자 연구실에 남은 에테르.

       

       뭔가 찝찝하다고 느꼈을 무렵,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자아가 이전에 했던 ‘계약’에 관해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네가 마수인 걸 안 뒤로도 널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진정한 신뢰도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날이 온다면, 그땐 몸의 주도권을 다시 넘겨라.]

       

       흔쾌히 수락할 수 있었던 제안이었다.

       

       그만큼 마수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좋지 않았다. 반드시 박멸해야 할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요호족 꼬맹이도 결국에는 모두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실험을 했다. 일종의 도박수였는데, 어디까지나 자신의 결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오히려 그 결의에 금이 가 버리고 말았다.

       

       “허어.”

       

       에테르는 어느 때보다도 깊이 신음했다. 머릿속이 비 오는 날의 땅바닥처럼 질퍽거렸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나?”

       

       문득 그런 말을 내뱉었다.

       

       또 다른 자신에게 주도권을 내어 주고, 현재 자신은 쥐도 새도 모르게 이 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계약의 대가.

       

       본인과 나눈 약속을 헛되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자신을 배반하면, 그것만큼 추악한 일이 없었기에.

       

       하지만 두려웠다.

       

       버림받고 배신당하던 삶만 이어오다가, 막상 이렇게 떠날지도 몰라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리 고민하던 에테르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룰을 하나 추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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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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