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4

       *

        

        

        이반은 천천히 링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저벅, 저벅. 평범한 발걸음이었지만 그 고요함은 시선을 잡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처음 학생들의 감상은 단순했다. 분위기 잡을 줄 아는 아저씨네.

        

        이반이 허릿춤에서 도끼를 꺼내 들었을 때에도 학생들은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야, 기사학부였으므로.

        

        대부분의 경우 학생들은 만병지왕 = 검이라는 공식에 빠져 있다. 대개의 경우엔 맞는 말이다.

        

        패용이 쉽고 범용성이 넓은데다 섬세한 기교에도 잘 어울리는 무기니까.

        

        하지만 도끼는 단순하다. 도끼머리에 몰려있는 무게중심 탓이다. 따라서 도끼의 공격 방향은 반드시 단방향으로 향한다.

        

        즉, 궤적을 읽고 끊기 쉽다는 의미다. 따라서 학생들 대부분은 도끼를 우습게 여겼다.

        

        

        “엔리케.”

        

        

        이반은 링 위에 가만히 서서 말했다. 묵직한 발성이었다.

        

        

        “응?”

        “어디까지 허용되지?”

        “죽이지만 마. 어차피 성녀가 있잖니, 여긴.”

        

        

        용사파티의 성녀 파트리시아는 지금 이 대학의 신학부 학과장을 역임하고 있다. 그 말은 즉, 힐링 포션보다 뛰어난 외상 전문의가 상시 대기중이란 의미와 같았다.

        

        좋군.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손.”

        “역시, 이 거리에서 보니 확실하군. 그 때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어.”

        “내가 이기면 봉사활동을 해라.”

        “…뭐?”

        

        

        이 녀석은 드로안 왕국의 정보요원이다. 표면적으로는 기사학부 신입생이고, 외적으로는 에시디스의 개인 경호원이지만. 그 본질은 에이나르 대왕이 심어둔 첩보원 노릇을 할 수 있는 작자란 뜻이다.

        

        즉, 이 녀석은 언제든 ‘비공식 외교관’이라는 입장으로 왕녀파, 또는 왕세자파와 손을 잡을 수 있다. 이 녀석은 변수다.

        

        따라서 에시디스의 행보가 확정되기 전까지 발을 묶어 둘 필요가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곁에 두는 것이다.

        

        하교 이후 남는 시간, 에시디스의 곁을 지켜야 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고아원에서 빨래를 시켜주마.”

        

        

        봉사활동은 인성 교육에 좋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고아들을 돌보는 것은 인격 함양에 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이 드로안 광전사 허스칼에게도 ‘문명’을 가르쳐줄 기회다.

        

        

        “개소리를.”

        “오라.”

        

        

        이반은 도끼를 들어 올렸다. 이제 두 전사(평균나이 40대, 대학 1학년 실습 수업)에겐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

        

        

        처음 두 사람이 격돌했을 때, 신입생들은 다소 당황했다. 뭐지? 왜 잘 싸우지?

        

        

       -콰아앙—!!

        

        

        그 다음. 두 자루의 도끼가 서로 불똥을 튀겨댈 때, 신입생들은 경악했다. 뭐야. 저기서 어떻게 저렇게 움직여? 방금 본 사람? 아무도 없어?

        

        

       -카아아아앙! 콰드드드득!!

        

        

        마침내 신입생 최강자(40대)가 무릎을 꿇고 헐떡일 때, 학생들은 그제야 꼿꼿하게 서 있는 사내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새파랗게 빛나는 두 눈과 무표정한 얼굴.

        

        그리 격렬하게 움직이고도 잔떨림조차 없는, 침착하기 그지없는 호흡.

        

        

        “후욱… 페트로비치… 과연… 작은 이반. 후욱…! 대체 네가 여기서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안전 관리.”

        

        

        이반은 걸레짝이 된 모르드를 지나쳤다.

        

        안전…? 관리…? 학생들의 머릿속엔 다시금 커다란 물음표가 찍혔다. 내가 지금까지 알아왔던 안전은 대체…?

        

        

        “다음.”

        “어… 교수님, 시험 범위가 너무 넓은데요. 오늘 첫 시간인데…?”

        

        

        이반의 말에 움찔 떨었던 한 청년이 손을 들고 말했다. 처음 이반을 비웃었던 그 귀족 청년이었다.

        

        엔리케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서 정해졌네. 자자, 시간 없어. 빨리빨리 가자고.”

        “어… 어어….”

        

        

        누구도 링 위에 올라가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절한 학우들의 도움을 받아 링 위로 끌려온 청년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춤 물러섰다.

        

        

        “오라.”

        

        

        이반은 도끼를 들어 올렸다.

        

        

       *

        

        

        “자, 우리 조교 몸에 칼침 한 번만 박아 넣으면 바로 A+ 찍어줄게. 어때? 응? 아니면 그래… 기분이다! 용사 파티 현역 미녀 강사에게 1대1 강습까지!”

        

        

        이반은 굳이 엔리케의 마지막 문장에 있는 오류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는 상식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도끼를 들었다. 그는 훈련병 교육에 진심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다섯 구의 시체(아니다.)를 치우고 난 뒤엔 링 위에 올라가는 사람이 없어졌다.

        

        

        “에이잇! 너희 이대로 다 포기하면 단체로 과락이야! 응? 이건 어때. 다들 F 맞고 재수강하면, 내년 수업도 이렇게 시작할 거야.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겠지?”

        

        

        싱글벙글 웃는 엔리케를 보며 학생들은 이를 아득, 깨물었다.

        

        좋아. 확신할 순 없어도… 어쨌건 죽을 일은 없고.

        

        한 번만 공격을 성공하면 높은 성적이 보장된다.

        

        3학점짜리 전공필수 수업이다. 평균 학점 관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 뻔한 데다, 기사학부는 기본적으로 호승심이 강했다.

        

        저마다 제 동네에선 무예의 신동, 검술의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난 병아리들인 탓이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렇게 30구의 시체(아니다.)를 치울 때까지도 신입생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

        

        

        그리고 마침내 유리의 차례가 왔다.

        

        유리는 덜덜 떨며 검을 들었다. 그녀가 칼을 쥐고 지금까지의 시간 동안 이토록 검날이 무겁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진득한 살기가 휘몰아치는 링 위로, 스산하게 부는 바람과 바닥에 질척이는 핏자국 위로.

        

        용기를 가지고 한 발자국 내딛었다가도, 눈 앞의 사내를 바라보자 다시 움츠러들고 만다.

        

        저 후줄근한 작업복과 목에 걸친 낡은 수건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 프란크.”

        “네헥! 넷! 넵?!”

        

        

        이반은 가만히 유리의 눈을 바라봤다. 정신을 헤집는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유리의 동공이 좌우로 마구 흔들렸다. 머리가 아찔해지고 자꾸만 손에 힘이 풀렸다.

        

        

        “기사학부 수석.”

        “넵!!”

        “이유리?”

        “…히끅?!”

        “김유리인가? 박유리? 최유리?”

        “그, 그으? 그게 무슨 말? 말씀이신지 잘…?”

        “크라실로프에서 유리는 남자 이름이다.”

        “네에에… 그으게요? 제가 사정이 있어서 그게….”

        “오라.”

        

        

        이반은 도끼를 들었다.

        

        

        “사정은 천천히 들어보지.”

        “아뇨아뇨아뇨. 저, 저 기권하고 싶은데? 괜, 괜찮나요? 과락! 과락 할게요 그냥! 꺄아아악!!”

        

        

        유리가 칼을 놓기 전에 이반의 몸이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도끼날을 튕겨내며, 유리는 터져나오는 비명을 애써 삼켰다.

        

        휘감겨 온다. 뱀처럼…! 도끼날이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 뜯을 듯이, 칼날을 타고 올라온다!

        

        

       -카앙!

        

        

        이미 앞선 학생들이 넝마가 될 때까지 봐왔던 공격 방식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공세였다.

        

        이반의 도끼는 어떤 종류의 경지에 올라서 있는 듯했다.

        

        한 번 한 번이 무겁지 않다. 그건 차라리 모르드 에릭손이 더 강렬했으니까. 하지만 빠르다. 아차하는 순간 이미 검격에 휘감겨 있었다.

        

        도끼를 활용하는 방법에 정통하다. 단순히 휘둘러지는 것뿐만이 아닌, 칼날을 타격하고 원심력을 이용해 다시 붙고, 내려 찍고, 그 직후 사선으로 몰아친다.

       

       

       -카드드드득!!

       

        

        도끼머리의 굴곡을 이용해 칼을 끌어당기고 손잡이를 비틀어 칼날을 뽑아낸다. 그 충격에 검을 놓치면 그대로 끝이다.

        

        

        이반은 무릎 꿇은 유리를 내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싸우는군.”

        “감사… 합니다….”

        “지켜보겠다. 다음.”

        

        

        유리는 힘 풀린 다리로 비척비척 링 아래로 내려갔다. 기적적인 결과로 몸에 상처가 남진 않았지만, 그건 그저 저 괴인이 자신을 봐줬다는 느낌만 줄 뿐이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이반을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

        

        

        ‘뭐야, 김이박최라니 대체 뭔데! 하, 한국인? 한국인이라고…?’

        

        

        이유리는 일러스트레이터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했던 작업은, 한 능욕물 아카데미 야겜의 외주 작업이었다.

        

        [희작3]이라고 불리는.

        

        학생들의 약점을 잡아 그런… 엄한… 굉장히 굉장한 짓을 해버리는 정원사에게서 도망치는 종류의.

        

        그 정원사는 목에 수건을 두르고 낡은 작업복을 입은 중년 아저씨였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 빌어먹을 세상에 똑 떨어져 있다. 밤을 새서 외주 작업물 1차 러프안을 보낸 직후에.

        

        도끼를 든 수염 난 정원사가 눈깔을 부라리며 여학생들을(오해다.) 탐욕스럽게 노려보는 세상에.

        

        

        ‘들키면…. 굉장히… 굉장한 걸 당할 거야…!’

        

        

        그녀는 약점을 잡혔던 ‘학생’들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떠올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정원사’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동향사람, 같은 빙의자인 것 까지 알면 모종의 수단을 통해 협박물로 장르가 바뀔지도 모른다.

        

        그녀는… 주인공인 것이다…. 하긴 고아인데 전액장학생에 검술 천재라니. 평생 그림만 그려왔던 일러스트레이터가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당연히 주인공이었겠지….

        

        그녀는 집에 돌아가고 싶다.

        

        

       *

        

        

        이자벨은 세 수를 버텼고, 오스칼은 두 합을 버텼다.

        

        순위를 보자면 모르드, 유리, 이자벨, 오스칼 순인가. 모르드는 애초에 학생이 아니니까 그렇다 치고. 딱 그가 생각한 선에서 우열이 가려졌다 하겠다.

        

        아직 눈이 둔해지지 않았군. 그렇게 생각하며 이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웃어요?”

        “오해다.”

        “웃은 것 같은데?”

        “난 원래 웃는 상이다.”

        “큽…! 미친놈…!”

        

        

        정면에서 들려온 소리에 이반은 다시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그의 곁엔 두 손을 들고 있는 엔리케가 있었다. 엔리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억누르며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이반은 상식적인 사람이었으므로 나이 많은 스승의 주책에 반응하지 않았다.

        

        

        유리가 겁에 질려 있을 때, 그 시점에 이반과 엔리케는 성녀에게 혼나고 있었다.

       

       

        신학부 학과장실에 환자 50명을 집어 넣은 대가였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열두안즈 님! KAREN34kr 님! 후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TMI) 이반은 웃는 상이다.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