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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4

       “화, 황녀님을 뵙습니다.”

        

       클레어가 아까 앨리스에게 했던 자세 그대로, 나에게도 인사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어색한 순간이었다.

        

       물론 진짜로 정신이 아득해졌다는 소리는 아니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다.

        

       그렇다. 나는 클레어를 알고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의 클레어도 알고 있긴 했지만, 내가 정말로 알고 있던 클레어는 그 클레어가 아닌, 황제의 밑에서 악당이 되어버린 클레어였다.

        

       이미 몇 번이나 강조하긴 했지만 한 번 더 말하자면, 게임에서 클레어는 절대로 지금과 같은 순수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무슨 대사를 해도 한마디도 지지 않았고, 상대가 기분 나쁘면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냈다. 말을 더듬는다든가 하는 모습은 절대 보이지 않았다.

        

       클레어가 당황하거나 화를 내는 순간은, 오로지 자기를 귀여워해 준 다른 자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뿐이었다.

        

       본편 시작 시점에서는 이미 죽어버린.

        

       ……물론 지금 시점에선 살아있다. 대체 어쩌다가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나라는 존재가 아주 큰 영향을 미쳤겠지. 이 세상에서 바뀐 거라고는 정말로 나 하나뿐이었으니까.

        

       황제가 더 신중해진 걸까?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자매는 원작에서는 클레어가 쓰던 사복검의 원주인이라는 배경 설정으로만 존재하던 인물이니 나중에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끼어들기 시작하면 신경 써도 늦지 않을 거다. 나에게는 시간을 돌리는 능력이 있으니까.

        

       클레어 옆에 서서 딱딱하게 굳어있던 레오 그레이스도 우리 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원작 주인공, 레오 그레이스.

        

       이런 게임의 주인공답게 잘생겼고, 실력도 그럭저럭 좋다. 스토리적으로 봤을 때는 감정 표현 다양하고 쾌활한 소년만화 주인공에 하렘물 주인공 같은 면을 끼얹은 캐릭터였다.

        

       게임적으로는 초반에는 성능이 구더기지만 키우다 보면 뒤쪽으로 갈수록 성능이 점점 가파르게 오르는 대기만성형 캐릭터다. 사실 깡 성능이 좋다기보다는 리더답게 유틸기가 개사기였다. 회복 스킬만 없었지 ‘사기 진작’이라는 설정으로 캐릭터들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높여주는데, 상승 폭이 세팅에 따라 거의 70퍼센트까지도 육박하는 데다가 범위 스킬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 범위가 자기중심인 데다가 자버프까지 겸하므로, 주기적으로 스킬을 써주기만 하면 최고 난이도에서도 적을 녹여버릴 수 있다. 물론 나머지 캐릭터의 세팅도 제대로 되어있어야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본인 능력치가 마냥 나쁘지도 않다. 순수 능력치만 보면 최종전 기준으로 상위권이다.

        

       덕분에 초반에 이 갈아가며 키워야 하는 캐릭터로 악명이 높기도 했다. 그 중요한 버프 스킬들이 중반은 되어야 열리니까.

        

       그리고 그렇기에 이 캐릭터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사기 진작’이 실질적인 공격력 버프로 작용하는 것은 결국 게임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응원을 들어 힘을 짜낼 수는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낼 수 있는 힘의 최대치 이상을 내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게임에서야 그만큼 그 말이 힘이 된다는 설정을 표현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게임적인 허용일 뿐.

        

       마찬가지로 ‘세계 최강의 마법사’니, ‘사상 최악의 용병’이니 하면서 게임 밸런스 조절의 전투 시 성능이 묘하게 나쁘게 나오는 아군 게스트 캐릭터나 적 보스도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고. 성능이 우선일까, 설정이 우선일까?

        

       하긴, 그렇게 따지면 게임은 턴제인데다가 서양 RPG 같은 자유도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또 이야기가 엄청나게 달라지긴 하지만.

        

       “처음 뵙겠습니다. 실비아 팬그리폰이라고 합니다.”

        

       “실비……!”

        

       내 말에 클레어가 고개를 퍼뜩 들면서 나를 보았다가, 내 옆에 서 있는 앨리스와 눈이 마주치더니 얼른 고개를 다시 숙였다.

        

       원작에서랑 완전히 반대네.

        

       아니지, 원작보다 더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원작에서도 클레어가 앨리스보다 모든 면에서 잘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앨리스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지는 않았으니까. 따지자면 클레어가 일방적으로 앨리스를 동생 취급하는 사이 나쁜 자매 같은 분위기였다.

        

       그 사이가 나쁘다는 표현이 좀 많이 살벌하긴 했지만.

        

       “둘 다.”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던 앨리스가 입을 열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

        

       “아, 저, 그게……!”

        

       앨리스의 말에 클레어는 용감하게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그 눈빛에 조금 놀랐다. 압박받는 상황에서도 클레어가 나를 보는 눈빛은 강렬했다. 절대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은 게임에서 봤던 클레어의 눈빛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말은 좀 더듬긴 했지만. 뭐 어때.

        

       클레어는 훌륭하게 자랐다. 끔찍한 과거를 겪는 일 없이.

        

       “실비아…… 님!”

        

       “…….”

        

       뒤쪽에 ‘님’이 아닌 다른 단어가 튀어나올 뻔한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언니!’라고 부르지 않은 것이 어디겠는가.

        

       이렇게 무턱대고 달려오는 것을 보면 조금 열혈 끼가 있는 주인공 레오와 형제자매 수준으로 가깝게 지냈던 것을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는 레오보다 더 그렇게 자랐을지도 모른다. 레오는 그래도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지만 클레어는 아니었으니까.

        

       “예. 무슨 일이시죠.”

        

       반 박자 정도 늦게 클레어에게 대답했다.

        

       “혹시……?”

        

       클레어는 나에게 뭔가 물어보려다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녀’인 나에게 ‘고아원 출신이냐’고 물어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제야 떠올린 모양이었다.

        

       음.

        

       클레어는 신중함을 더 배워야겠다. 하긴, 원작에서의 클레어는 오만불손하면서도 눈치가 무척 빠른 것으로 나왔었는데, 생각해보면 눈치가 빠르지 않다면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 남작 부부는 정의롭고 친절하기로 이름 높다. 클레어가 고아 출신이라고 해서 레오와 구분하여 키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생 사랑받고 자란 아이.

        

       클레어는 그런 아이가 되었다.

        

       친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로 앨리스를 은연중에 질투하는 캐릭터가 될 일은 없었다.

        

       “혹시?”

        

       내가 따라서 물어보자, 클레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쩔쩔매더니,

        

       “호, 혹시, 제, 제 인사를 받아주실 수 있으신가요!?”

        

       “…….”

        

       다시 한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앨리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다 못 한 황당함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말을 거는 것을 보고, 그리고 나에게 인사하지 않은 것을 보고 뭔가 꿍꿍이속이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이번에는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인사라면, 이미 받았습니다만.”

        

       클레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클레어의 얼굴이 붉어진 만큼 레오의 안색은 파리해졌다. 여기서 더 파리해지면 얼굴색이 자기 머리 색깔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그보다, 자기소개를 먼저 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질문하자, 클레어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저는…… 클레어 그레이스라고 합니다. 그레이스 남작가의 여식입니다.”

        

       다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는 클레어의 목소리는 조금 전처럼 말을 더듬지는 않았다.

        

       “그렇습니까.”

        

       “그레이스 남작가라면, 황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곳이네.”

        

       앨리스가 머릿속을 뒤지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사실 그 둘러싸고 있는 사람의 벽 제일 앞에 있는 애들의 표정은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뒤쪽에 사람이 있어서 차마 물러나지 못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알아두도록 해. 우리가 이 아카데미에 다니는 이상, 우리도 너희와 같은 학생이야. 황녀라는 지위는 아카데미 바깥에서의 지위일 뿐, 이 안에서 우리는 귀족이나 평민이나, 서로 배우러 온 사람일 뿐이니까.”

        

       그렇다.

        

       사실 이건 학생들 간의 위치 문제뿐만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사이의 문제도 걸려있긴 했다.

        

       교장은 공작이지만, 교사 중에는 남작, 백작 출신도 있고, 아예 평민 출신도 있다. 여기에 신분제를 대입해버리면 교사가 학생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존댓말을 하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지게 된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교칙이 ‘아카데미 내에서는 신분제가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유명무실하기도 하지만, 또 이 규칙이 빛을 발하기도 한다. 실제로도 평민과 귀족이 친해지기도 했고, 졸업 후 능력 있는 이의 중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편견을 깨어버리는데도 한몫했었고.

        

       “그러니까, 여기서는 나한테 그런 식으로 예를 갖출 필요 없어. 뭐, 그렇다고 강제로 내 말을 따를 필요도 없어. 하지만 만약 나에게 그런 식으로 예를 갖춘다면, 나도 너희들을 황녀로서 아랫사람을 대하듯 대할 뿐이야. 그게 좋다면 그렇게 하던가.”

        

       “…….”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저 멀리서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는 들렸다.

        

       여기 1학년만 있는 것은 아닐 거다. 본관에서 1학년 교실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복도였으니 2학년에서 4학년까지도 와 있을 거다.

        

       그리고 이 말은 그 모든 학년에게 적용되는 말이기도 했다.

        

       앨리스는 주변을 둘러본 뒤, 다시 시선을 자기 앞에 있는 클레어와 레오에게 맞추고 말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할래?”

        

       음.

        

       교장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은 것은 아마 앨리스가 생각하는 ‘물러설 수 없는’ 이유였을 것이다. 아무리 교칙이 그래도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거겠지. 황제의 딸이니까.

        

       하지만, 그 외에는 관대하게 적용하겠다는 말이다.

        

       앨리스가 조금 전 자기한테 예를 갖췄던 클레어에게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앨리스를 ‘황녀로’ 대했으니, 자기도 클레어를 아랫사람으로 대한 것이리라.

        

       “아…….”

        

       클레어는 조금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금방 밝게 웃었다.

        

       살짝 숙이고 있던 허리를 쭉 편 클레어는 앨리스의 앞으로 곧장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척 내밀면서 말했다.

        

       “나는 클레어야. 클레어 그레이스.”

        

       주변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저 뒤쪽에 서 있는 레오도 같이 낸 소리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앨리스는 그런 클레어를 빤히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어 클레어의 손을 붙잡아 가볍게 악수했다. 딱히 웃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분이 나빠 보이는 표정도 아니었다.

        

       원작에서의 앨리스와는 다르게 몹시 차분한……

        

       …….

        

       잠깐, 저 표정 혹시 날 따라 한 건가?

        

       “나는 앨리스. 앨리스 팬그리폰.”

        

       “앨리스.”

        

       클레어는 그런 무표정의 앨리스에게 겁먹지도 않고 활짝 웃어 보인 뒤, 가볍게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앨리스도 미련 없이 그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클레어는 내 쪽으로 돌아섰다.

        

       조금 전의 그 당혹감은 어디로 날려버린 것인지, 클레어는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원작의 클레어가 마지막에 앨리스 대신 사망하며 짓던 그 웃음과 비슷했다.

        

       사실은 이쪽의 이 표정이 클레어의 본성에 가까운 표정이고, 게임에서 내내 보였던 그 꼬인 태도가 클레어가 망가지며 가졌던 태도였겠지.

        

       “나는, 클레어라고 해.”

        

       그리고, 나를 향해서도 한 번 더 자기소개를 했다.

        

       내 앞에 손을 척 내밀면서,

        

       “클레어 그레이스.”

        

       당당한 태도로 자기 이름을 밝혔다.

        

       “…….”

        

       나는 클레어의 손을 살짝 내려다보았다. 하얀 손에 굳은살이 조금 박여있었다. 열심히 검술 수련을 해서 그런 거겠지.

        

       나는 손을 뻗어 클레어의 손을 살짝 잡았다.

        

       “실비아 팬그리폰이라고 합니다.”

        

       여전히 딱딱한 표정 그대로 그렇게 말하자, 클레어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클레어는 빙긋 웃으며 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잘 부탁해.”

        

       “예. 잘 부탁드립니다.”

        

       맞잡은 클레어의 손은 조금 따뜻했다.

        

       원작에서도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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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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