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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4

     

    “…이에 라스 고트베르크를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의 주치의로 임명한다.”

     

    주치의 임명식은 빠르게 끝났다.

     

    귀족 작위 수여식처럼 대단한 절차가 있거나, 기사처럼 충의를 증명하는 일도 아니다.

     

    내가 아셀라에게 선서를 하고 내의원의 치유사 몇이 참관하며 기도를 읊는 것이 전부였다.

     

    “앞으로는 내의원에서 함께하시겠군. 협력이 필요할 땐 얼마든지 이야기하시오, 고트베르크 치유사.”

     

    팔켄하인이 청하는 악수를 받으며 나는 한 가지 정정사항을 전달했다.

     

    “함께 황가의 옥체를 관장하게 되어 더없이 반가운 말씀입니다.”

     

    “하하, 좋소. 직함과 호칭은 어떻게 정하시겠소이까?”

     

    “직함과 호칭 말이군요. 팔켄하인 경께서는 내의원에서 ‘성호’라는 직함을 가지고 계시지요.”

     

    “그렇소이다. 일반 치유사보다 한참 높은 직책이니 직함은 필수요.”

     

    “어떤 것도 가능합니까?”

     

    “어….”

     

    팔켄하인이 조금 당황했다.

     

    같은 주치의이기에 직급상으로 나와 그의 품계는 같다.

     

    때문에 내가 가령 ‘치유왕’ 같은 직함을 요구해도 대놓고 싫다고는 못 할 터다.

     

    물론 진짜 그랬다가는 황제의 아래에서 왕을 자처한 반역죄로 바로 목이 썰려 나가겠지만은.

     

    “직함은 의사, 호칭은 선생님으로 하겠습니다.”

     

    “의사라. 어떤 뜻이오?”

     

    “의학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군. 고트베르크 치유사께서는 의학이라는 학문에 능통하다고 하셨지. 이해했소이다. 내의원에는 전파해놓겠소.”

     

    뭐, 이제 나름 의사 라이센스는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임명식을 마치고는 내의원에 있는 내 사무실을 확인하기로 했다.

     

    주치의는 실제로 24시간 담당 황족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일과 외 시간에는 내의원 사무실에서 업무를 본다.

     

    비상시 대비해야 하는 수면 시간에는 근처에 있어야 하고, 궁 밖으로 외출할 때 등은 동행하게 된다.

     

    내의원은 황궁 부지 제일 남쪽, 제도 광장과 연결된 성벽 바로 앞에 위치했다.

     

    타냐와 브루노의 호위를 받으며 내의원에 들어선다.

     

    “확실히 후작령과는 다르네.”

     

    내의원 건물에서는 종교적 색채를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화려한 장식이 잔뜩 붙었으면서도 크고 각지게 지어진 것이, 비교하자면 교회보다 대학병원에 가까운 스타일이었다.

     

    혹은 아카데미 건물 중 하나라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위용이랄까.

     

    황궁 부지는 어디를 가도 적색 염료가 잔뜩 쓰여서 눈이 따가울 정도다.

    현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사무실은 4층입니다.”

     

    “왜 그렇게 높은 곳에 있대? 엘리베이터는 없어?”

     

    “엘리베이터가 뭡니까?”

     

    “미치겠군. 그럼 나더러 매일 몇 번이고 4층 층계를 오르내리라는 소리야? 브루노, 공중부양 쓸 수 있는 마법사를 한 명 수배해둬.”

     

    “알겠습니다.”

     

    내 말에 즉시 고개를 숙인 브루노를 보며 타냐가 한숨을 쉬었다.

     

    “브루노, 진짜로 데려올 생각은 말아라. 선생님께선 체력을 기르실 필요가 있어.”

     

    “맞는 말씀입니다.”

     

    타냐에게도 즉답하는 브루노.

     

    얜 또 뭐야.

     

    “네가 황희 정승이냐? 긍정밖에 모르는 예스맨이야? 네 직속 상사가 누군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황희 정승? 그분입니까?”

     

    브루노는 마물도 쏘아죽일 강렬한 눈빛을 하고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보리스를 믿은 내가 바보였다.

    그럼 그렇지, 골때리는 놈을 추천해줬다.

     

    두 기사와 바보 같은 만담을 떨고 있으니 지나가던 치유사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봐, 주치의 휘장이야.”

    “소문의 제3 황녀파로군.”

    “흰 머리… 신성력을 타고난 핏줄인가.”

     

    업무가 끝난 저녁 시간이지만 내의원은 밤낮 구분 없이 바쁜 곳이라 돌아다니는 치유사가 많다.

     

    그러고 보면 내의원은 제도 광장 쪽으로도 연결되어 있어서, 그곳에서 일반 시민 환자를 보기도 한다.

     

    황제의 은덕에 감사하라는 명목이다.

    일종의 지지율 상승 정책이랄까.

     

    내의원 소속 치유사들의 실력을 기르는 역할도 한다.

    주치의인 나는 나갈 일이 없기는 하다.

     

    “직급은 선생님이 위일 텐데 인사하는 치유사가 한 명도 없군요.”

     

    “파벌이 다르니까 그렇겠지. 내의원에 제3 황녀 파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내의원의 치유사는 모두 어느 주치의의 산하에 소속되어있다.

     

    그리고 주치의는 그 황가 구성원의 파벌이기 마련.

     

    다른 파벌의 치유사끼리 말을 섞었다가 배신이라고 낙인찍힐 수도 있으니 조심할 수밖에 없겠지.

     

    참 이리저리 눈치 보기 복잡한 곳이다.

     

    하지만 내게 승계권자들의 정치 싸움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다.

     

    당장은 아셀라만 신경 쓰기도 벅차다.

     

    어차피 아셀라가 차기 황제가 될 테고.

     

    뭐, 그걸 저지하는 게 내 목적이지만.

     

     

     

    사무실은 깔끔했다.

     

    마법공학 재료도 꽤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는데, 아셀라가 미리 준비해놓은 모양이었다.

     

    ‘내 요구사항을 듣자마자 준비시켰나?’

     

    재료뿐만 아니라 작업용 테이블이나 도구도 구비되어 있었는데, 발주 후 도착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물건들이다.

     

    내가 시험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준비시키지 않으면 이게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그때부터 어떻게든 나를 주치의로 뽑으려던 생각이었나보다.

     

    오싹해.

    팔에 난 털이 거꾸로 섰다.

     

    “기대에 부응해드려야지.”

     

    밤을 새면 준비된 재료로 내일 쓸 도구는 충분히 만들 수 있으리라 예상됐다.

     

     

     

    ***

     

     

     

    다음 날 새벽.

     

    주치의 업무가 시작했다.

     

    상쾌한 기분으로 기상하자마자 사탕을 하나 빼물었다.

     

    음, 두뇌를 위한 소중한 당분과 체력회복.

     

    이제는 빼먹을 수 없는 일과다.

     

    도구를 챙겨 방을 나서니 시녀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분명 루시라는 이름의 누님이었나?

     

    “고트베르크 선생님. 다음부터는 20분 더 일찍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황녀님께서 준비되셨어요?”

     

    “아뇨. 앞으로 30분 더 필요하실 예정입니다.”

     

    그럼 충분히 일찍 나왔잖아.

    거 참 귀찮게 하네.

     

    “황녀님께서 일과 시작하십니다.”

     

    조금 후에 시녀 한 명이 아셀라의 방에서 나와 보고했다.

     

    이제 내 차례군.

     

    나는 왕진가방을 들고 아셀라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셀라의 방은 어지간한 저택 거실만큼이나 넓었다.

     

    침대 자리는 커튼이 쳐져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테이블에 앉아 나를 향해 긴 속눈썹을 흘겼다.

     

    “일광이 호청한 아침입니다. 어젯밤 수면은 편안하셨는지요.”

     

    그녀의 앞에 앉으며 물으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어. 공자, 내게 매일 아침 그런 재미없는 질문을 할 예정이니?”

     

    “황녀님은 제 담당이니 매일 컨디션을 확인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제 호칭은 선생님입니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요.”

     

    아셀라가 나를 재릿 노려보는 눈빛에 뭐라 더 반박하지도 못했다.

     

    “내가 스승 취급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밖에 없어. 앞으로도 공자라고 부를 테니 그렇게 알아.”

     

    “물론 황녀님 마음대로 하셔야죠.”

     

    “공자는 내 주치의지만 혼약자기도 하잖아? 그러니 이 호칭이 잘못되진 않았지?”

     

    “흠.”

     

    듣고 보면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얄밉네.

     

    이 황녀님은 마법도 잘 쓰고 정치도 잘 하고 머리까지 좋다.

     

    아니, 머리가 좋아서 다 잘 하는 건가.

     

    ‘좀 혼내주고 싶은데.’

     

    이 불경한 속마음을 들키면 안 되겠지.

     

    해야 할 일이나 빨리 끝내기로 했다.

     

    왕진가방에서 필요한 도구를 꺼내며 그녀에게 잡담 주제를 꺼냈다.

     

    “황녀님의 스승님이라면, 궁정 대마법사인 현자님을 의미하시나요?”

     

    “잘 알고 있구나. 유명한 마법사니까.”

     

    그녀에게는 마법 스승이 한 명 있다.

     

    워낙 괴팍한 노인이라 황실에서도 거의 건드리지 않는 마법사다.

     

    나는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환자의 긴장을 풀기 위한 간단한 회화였다.

     

    “먼저 혈압을 측정하겠습니다.”

     

    그녀의 팔에 패드를 두르고 펌프를 눌러 공기를 가압했다.

     

    혈압 측정기는 만들기 어렵지 않았다. 원리를 알고 있기에 금방 제작할 수 있었다.

     

    “의학 도구야?”

     

    “네. 체내에서 피가 흐르는 속도는 중요합니다. 건강상태를 측정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근거가 됩니다.”

     

    “흐응.”

     

    아셀라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얇았기에 바로 혈압을 측정해도 문제없었다.

     

    “피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진 모든 병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난 아프지 않아.”

     

    “모를 일이죠. 아무 전조 없이 갑자기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통증 없는 병도 있거든요. 하물며 황녀님께선 재능이 있으시죠.”

     

    “그게 왜?”

     

    “대가로 병에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주치의가 된 이상 황녀님의 상태는 완벽히 파악할 생각입니다.”

     

    아셀라가 턱을 치켜올리고는 싸늘하게 나를 바라본다.

     

    어쩐지 기분이 조금 상해 보인다.

     

    “공자, 재능과 대가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지식을 기반으로 추측했을 뿐입니다.”

     

    아셀라는 혈압을 재는 내내 나를 계속 노려보았다.

     

    마치 내 생각을 읽으려고 머릿속까지 꿰뚫으려는 눈빛 같았다.

     

    “혹시 공자도….”

     

    “다 됐습니다. 평균치보다는 꽤 낮군요. 기립성 저혈압… 평소 누워있다가 일어날 때 어지럼증은 없으신가요?”

     

    “음… 살짝.”

     

    “기록해두겠습니다. 말씀드렸듯 혈액을 분석하는 건 병을 파악하는 데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그래서?”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아셀라.

     

    나는 가방에서 다음 도구를 꺼냈다.

     

    “황녀님의 혈액을 소량 채취하려 합니다.”

     

    주사기다.

     

    CBC 검사용이다. 바늘 부분, 별개로 결합할 수 있는 유리관 튜브 두 개를 준비했다.

     

    바늘은 지름을 줄이기 위해 직접 철을 갈아 만들었지만 연금술로 특성을 강화했다. 위생상의 문제는 없다.

     

    튜브는 유리 재질이지만 역시 연금술로 깨지지 않게 강화했다.

    안의 기압을 최대한 낮춰, 결합하기만 해도 혈액을 뽑아낼 수 있게 만들었다.

     

    “…뭐야, 그거?”

     

    주사기를 본 아셀라의 반응이 이상했다.

     

    무슨 신화급 마물이라도 목격한 마냥, 목을 꼿꼿하게 고정하고는 동공만 파르르 흔들고 있다.

     

    새파랗게 질린 시선은 내 손을 향한 채 어쩔 줄을 모른다.

     

    안 어울리게 왜 이러셔, 황녀님.

     

    설마 겨우 주삿바늘에 겁을 먹으셨을 리는 없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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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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