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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40

     새벽에 가까운 시각.

     별장으로 돌아온 나는 저택의 2층 연회실에서 하나둘 사라지는 마차들을 기록한 뒤, 연회실 한 켠에 마련되어 있는 찬장에서 와인잔 두 개를 꺼냈다.

     크기는 같다.

     와인잔도 종류라는 게 있어 서로 모양이 다르지만, 노스트럼의 장인들이 고집하여 만들어진 와인잔이라 형태는 거의 99% 똑같았다.

     대신, 들어가는 건 다르다.

     나의 잔에는 미리 준비해둔 솜누스 농축액에 탄산수를 부워낸 논알코올을.

     그리고 빈 잔에는-

     “안 가고 뭐 하시는 겁니까?”

     “개인적으로 궁금한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스스로 자신이 마시던 와인을 가져온 이의 푸른빛이 감도는 와인이.

     “술 취한 사람 주정 부리는 거 받아주는 건 아스타시아말고는 없는데.”

     흑발흑안이 아닌, 온통 푸른색으로 물든 남자.

     “제복까지 갖춰입고 오신 걸 보면, 어디 새벽부터 공식 행사 나가시는 모양입니다?”

     “출근해야지.”

     “클레이돌 후작가에?”

     “누가 들으면 클레이돌 후작이 실질적 황제인 줄 알겠어.”

     황제,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이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왜 오셨습니까? 저, 이제 여기 정리하고 아스타시아 보러 가야합니다.”

     “안 그래도 그 아스타시아 관련해서 몇 가지 물어보려고 온 거라서 말이야.”

     “…….”

     

     황제가, 갑자기 아스타시아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한다?

     “…뭘 물어보려고 하시는 겁니까?”

     “긴장하기는. 걱정할 필요 없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있을 일들 몇 가지만 정리하고 갈 거니까.”

     황제는 와인병을 움켜쥔 채 히죽거렸다.

     “약혼, 언제 할 건가?”

     “이미 아스타시아와는….”

     “약혼식 말이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약혼하는 거.”

     “공식적인 절차를 이야기하시는 거라면, 현재 아카데미측과 조율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로솔?”

     “예.”

     나는 빈 와인잔에 솜누스 차를 가득 채웠다.

     “왕국 아카데미 모든 곳에서는 졸업 전에 ‘축제’를 엽니다. 졸업하기 전에 함께 성대한 연회를 즐기자는 의미죠.”

     “오로솔 아카데미, 지금까지 그런 연회를 종종 하고 그러지 않았나?”

     “소규모 연회는 했지만, 오로솔 아카데미 전체를 개방하여 아카데미 전체가 축제를 즐기는 경우는 없었죠.”

     “으음….”

     

     황제가 침음성을 흘린다.

     “왜 나는 그 때 또 사고가 날 것 같지.”

     “축제가 사고를 동반하는 건 자명한 이치입니다.”

     “거기에서 약혼식을 하려고?”

     “예. 이유가 있거든요.”

     약혼식을 지금까지 미뤄왔던 이유.

     “제 아버지, 크림슨 지브롤터가 어머니 샤를로트 렘부르 군터를 상대로 ‘공식적인 프로포즈’를 했던 게 졸업 전 연회였습니다.”

     “흠. 공식적?”

     “예. 이미 이전에도 결혼하자는 말이 오갔지만, ‘어느 스토커’를 떼어내기 위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만천하에 공개해버렸던 일이 있었죠.”

     “과연. 그야말로, 공언이로군. 세계를 향해 내가 이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공언.”

     “그런 겁니다.”

     상징적이다.

     학생들은 당대의 로맨스에 선망하게 될 것이며, 연회에 참석한 외부인들은 기억을 더듬으며 ‘그 때도 이랬지’라고 추억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은 왕국의 여인이 아닌 제국의 황녀.

     

     참가하는 남자 쪽은 학생이 아닌, 백작이자 총독.

     “아스타시아에게는 이미 허락을 다 구해뒀습니다. 그리고 약혼식이니, 굳이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레이와 아스타시아의 약혼인데, 제국 황제가 축하해주러 가는 것이 가장 의미있지 않겠나?”

     “주연이 바뀌어버리는 건 그다지 원하지 않아서요.”

     “흐음….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예, 그런 겁니다.”

     황제가 와버리면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황제에게 쏠리게 된다.

     혹은 황후라거나, 다른 이에게.

     연회의 주인공은 아스타시아가 되어야 하지, 다른 이에게 주인공 자리를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군. 그렇다면…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면 바로 신혼인가? 바르셀 총독부에 신혼집을 차리려고?”

     “그건 아직 고민 중입니다.”

     “왜?”

     “바르셀 총독부는 아직 방마다 샤워실도 제대로 갖춰져있지 않았으니까요. 차라리 지브롤터로 들어간 다음, 구 백작성에서 지내는 게 낫지요.”

     “흐음…. 그렇다면.”

     황제가 숲 아래를 손으로 가리켰다.

     “경제특구를 만들지.”

     “경제특구?”

     “제국의 도시 하나와 자매결연을 맺은 다음, 바르셀의 땅에 제국식 도시를 짓는 거야.”

     “마스터 크베르스가 시장으로 있는 도시라도 된답니까?”

     “황제와 가까운 이의 도시 중 하나지. 자네는 그냥 도장만 찍으면 돼.”

     “땅 파고 개발하고 기반 다지는 건 어디 조상님이 해주신답니까?”

     “노스트럼의 조상님들도 후손들이 제국식이든 뭐든 편하고 좋은 환경에서 지내기를 바라고 계실 걸? 안심하게. 자네가 내야 할 예산은 하나도 없어. 애초에….”

     황제가 저 아래로 떠나가는 마차들을 눈으로 가리켰다.

     “저들이 나중에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을 갈아엎으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 아닌가?”

     “…….”

     “도로든 호텔이든 뭐든, 생활에 편리를 가져오는 인프라의 위치를 정하는 건 모두 자네의 몫이지. 그리고 그런 인프라는 전부 땅의 가치를 높이는 길이고.”

     “저는 그저 총독부의 행정관들과 면밀한 검토를 통해 이런저런 부지를 정할 뿐입니다. 왕국에는 없지만 제국에는 있는, 그러한 것들.”

     “재미있군. 아스타시아를 위한 놀이공원이라도 하나 만들 생각인가?”

     “경룡장보다는 경륜장이 좋겠군요. 제국의 경주용 마도자동차들이 비룡보다 빠른 속도로 트랙을 달리는 걸로. 1등에게는 바르셀 총독부에서 직접 채광한 순금 트로피를 주고 그러면 되겠습니다.”

     “흐흐흐. 그러다가 트랙에 또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난입하고 그럴텐데?”

     순간, 나는 황제의 목소리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

     “아아, 그래. 알고 있겠지. 솔직하게 이야기하마.”

     황제는 분명히 짜증을 내고 있었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은 현재에 충실하지 않아. 모든 인간은 일방향으로 살아가지만, 오직 그 인간만이 화살표를 크게 돌려서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처럼 살아가지.”

     “인생을 막 살고 있는 인간이지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있는 그대로 한 번 이야기를 해볼까?”

     황제가 품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노스트럼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시간을 되감는다’라는 거다.”

     아마도 페넬로페가 들고 다니던 회중시계가 아닐까 싶었는데, 황제는 시침과 분침을 ‘거꾸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노스트럼의 핏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또한 되돌릴 수 있는 힘이 있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렇군요.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에게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그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개판으로 인생을 살 수는 없는 거거든. 인간은 미래를 지향하며 살아간다고 하지만, 과거의 흔적을 바탕으로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준비하는 이들이니.”

     “저는 딱히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제 곁에는 아스타시아가 있으니까.”

     “흐음….”

     황제가 나를 바라보며 표정으로 떠보고 있지만,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그레이 지브롤터가 없는 세상도 살아갈 수 있을 거지만, 저는 아스타시아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감았나?”

     “제가 감은 건 아니라서.”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모릅니다.”

     “몰라?”

     “예. 눈 뜨니까 식탁에 앉아있더군요.”

     “…….”

     거짓은 또다른 거짓을 낳는 법.

     그렇다면 진실이라는 껍질로 두른 나를 한 겹 한 겹, 필요할 때만 걷어내면 되는 일이다.

     “꿈에 취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시 기회가 생겼다는 것을 부정하며,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

     “하지만 이렇게 돌아온 이상, 현재도 미래도 충실해야죠.”

     나는 솜누스가 든 잔을 들었다.

     “이것이 꿈이든 아니든, 혹은 누군가에게는 되감기 전이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없던 것이 되든, 혹은 다시 또 강제로 되감아지든, 저는 지금에 충실할 겁니다.”

     “…….”

     “그리고 제 곁에는 항상 아스타시아가 있을 겁니다.”

     “재미있군. 다른 여자를 품는다는 건 생각도 해본 적이 없나?”

     “그럴 바에는 죽어버리고 말겠죠.”

     “…….”

     황제가 어딘가 생각에 잠긴 것 같지만, 나는 그저 옅게 웃기만 하며 잔을 기울였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일이라….”

     “예. 가령….”

     짜ㅡ안.

     “갑작스럽게-”

     잔을 부딪친 순간.

     펄럭.

     망토가 펄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내 시야가 차단되었다.

     그것이 황제가 두르고 있던 로브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그 로브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마력에 절로 잔에 힘이 들어갔다.

     “죽어라ㅡㅡㅡㅡ!”

     비명과 함께, 어딘가 붕괴할 것 같은 마력으로 이쪽을 향해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언가.

     “매국노, 그레이ㅡㅡㅡㅡ!!”

     그것은, 유성이었다.

     입고 있는 것은 하얀색의 원피스 뿐이며, 타고 있는 것은 흑장미가 새겨진 마도갑옷을 두른 비룡이었으며, 비룡의 눈은 붉게 물들어 강제로 조종당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익스플로젼 마법을…?”

     

     인간으로 빚어져, ‘에르트랑 바르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마법의 핵을 자신으로 삼은 존재가 전신의 핏줄에서 마나의 빛이 뿜어져나오는 채로 이쪽을 향해 빛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두 눈에는 희열과 광기를 가득 머금은 채.

     두 손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거대한 구체를 움켜쥔 채.

     전신에는, 백은의 빛이 반짝이고 있는 채로.

     “쯧.”

     황제가 혀를 찼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에, 무언가 대응할 시간은 없었다.

     “그레이.”

     황제는 망토를 펼친 채.

     “나오지 말-”

     콰ㅡㅡㅡㅡㅡ앙!!

     유성과도 같은 검은 질량이 유리창을 깨고 떨어짐과 함께, 그대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 * *

     “화려하군.”

     

     별장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금발의 남자가 제국산 망원경을 손에 든 채 휘파람을 불며 키득거렸다.

     “남의 별장을 가지고 장난질을 쳤으면, 당연히 뭔가 당할 거라고 생각은 했겠지. 흐흐. 죽었으려나?”

     “상급마법사의 마법을 걸어뒀다고 해도, 쉽게 죽지는 않을 겁니다.”

     “제로스. 자네는 너무 비관적이야.”

     “…직접 상대해봐서 알고 있어서 그런 겁니다. 소드 마스터가 상급마법으로 다 죽는다면, 당장 지브롤터 후작성부터 폭파시키셨을 거 아닙니까.”

     “흐흐….”

     금발적안의 남자,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은 망원경을 품에 넣으며 몸을 돌렸다.

     “제로스. 제국력 100년이 될 때까지,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지?”

     “…황금이 무르익어 세상이 금빛으로 물드는 시작을 알리는 여명이 찾아올 때까지 이제 달이 한 번 차오르고-”

     “그냥 1년 1개월 정도 남았다고 하면 될 것을. 쯧쯧. 내가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그 거지같은 역법은 언급하기도 싫군.”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은 빈정거리며 옆에 놓여있던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됐네. 아. 나리아는 안전한가?”

     “예. 안전합니다.”

     “그래. 그 날이 올 때까지, 안전하게 잘 지켜보고 있으라고.”

     황금으로 된 창과도 같은 지팡이를 어깨에 걸치며,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은 품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냈다.

     “나리아만 안전하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그레이 지브롤터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안 있으면? 또 전쟁이라도 일으키려고?”

     세인트 지오는 하얀 종이봉투를 코에 대고 크게 숨을 들이킨 뒤, 나른한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테러를 일으킨 건 모르가니아를 탈출하여 비룡을 훔친 뒤, 자폭마법을 스스로에게 걸고 그레이 지브롤터에게 돌격한 에르트랑일 뿐이야.”

     바스락.

     “누가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하겠나?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

     “어차피.”

     키득.

     “설령 그레이 지브롤터 단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한들,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던 걸로 될 것을.”

     

     * * *

     제국력, 98년 11월 22일.

     클레이돌 후작가에서 휴양을 마치고 돌아가는 황제의 눈가에 칼로 베인 것 같은 작은 생채기가 있어 잠시 논란이 되었으나.

     “그저, 약간의 소란이 있었을 뿐이네. 하하.”

     아무런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8권 끄으으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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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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