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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41

     

    쿠웅, 쿠웅.

     

    위층에서 전해지는 전투의 여파가 두 사람에게 전해져온다.

     

    긴박해지는 진동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려주고 있었으나.

     

    두근, 두근.

     

    울리는 심장 소리가 경고를 묻어버린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지금 이 순간을 1초라도 더 만끽하고 싶어서, 아셀라는 껴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더듬더듬 그의 등을 찾는 손이 이리저리 헤매인다.

     

    라스는 그런 아셀라의 뜻을 잘 알겠다는 듯, 온몸으로 그녀의 무게를 지탱하며 가볍게 정수리에 코를 올려놓았다.

     

    “황녀님.”

     

    천천히 아셀라의 귓불을 어루만지는 라스의 손가락.

     

    아셀라는 그 짜릿한 감촉이 너무 좋아서 그만 어깨를 움츠려버렸다.

     

    눈앞의 라스가 의심할 여지 없는 진짜라고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라스, 나는…”

     

    그를 올려다본 아셀라는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다.

     

    황실을 떠났을 때보다 한층 어른스러워진 라스의 얼굴.

     

    얼마 전 잠결에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진짜라고 인지하니 더욱 똑똑히 눈에 들어온다.

     

    분명 너에게 할 말이 많았는데.

     

    이야기보따리를 그렇게 한가득 쟁여놨는데.

     

    감사도, 사과도, 후회도, 회한도.

     

    성대가 멎는다.

     

    이유는 명확했다.

     

    지금은 훨씬 중요한 일이 남았다.

     

    그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마저 미소가 깃들 수 있으려면.

     

    마냥 기뻐할 여유는 없다고, 아셀라는 금방 현실을 자각했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그와 자신의 관계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파혼한 전 혼약자, 전 주치의. 스쳐 지나간 인연이 있었던 남남일 뿐.

     

    자신은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그가 큰 원한을 품어온 증오스러운 원수였다.

     

    직접 저지른 일이 아니니, 굳이 따지자면 자신이 용서를 빌 이유야 없겠지만.

     

    라스의 입장에서는 다른 이야기.

     

    그가 언제까지고 자신에게서 그 미친 폭군의 그림자를 볼지도 모른다.

     

    본능에 각인된 트라우마는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니다.

     

    카밀라를 떠올리면, 아셀라도 그가 지금 어떤 복잡한 기분일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애증이겠지.

     

    수도 없이 자신을 죽였던 여자에 대한 증오.

     

    그럼에도.

     

    수도 없이 죽었던 장소에, 두 번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을 마계에.

     

    자신을 위해 찾아와 줄 정도의 애정.

     

    계속 옆에서 함께해주며, 다칠 때마다 치료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마치 주치의처럼.

     

    라스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그의 애정이 피와 마나 대신 몸속을 흘러 곳곳을 가득 채워간다.

     

    어떤 마법보다도 기분이 좋아서 평생 이대로 있고 싶은 기분이다.

     

     

    그런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기에.

     

    나중에 원망을 받으면 참아낼 자신이 없기에.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남았다.

     

    사랑받을 자격을 손에 넣으려면, 우선 라스가 봐왔던 수많은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을 수습하는 일부터.

     

    마왕을 쓰러트리고 라스를 그 미래로 데려다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증명이 되리라.

     

     

    “라스.”

     

    “네, 황녀님.”

     

    참아왔던 애정표현은 조금 미루도록 하자.

     

    대신 그가 가장 원하는 걸 주자.

     

    “마나를 보충해 줘. 큰 걸로. 공략법도 알려주고. 저렇게 마기가 증폭된 마왕, 쓰러트려 본 적 있어?”

     

    아셀라의 말을 들은 라스가 확신했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황녀님, 마왕이 말했던 천리안이라는 마법은 혹시… 무엇을 보셨습니까?”

     

    슥.

     

    라스의 입술 위에 아셀라의 검지가 올라갔다.

     

    “사담은 나중으로 미루자. 지금은 이기는 것만 생각해.”

     

    라스로서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그도 아셀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쿠구궁! 위층에서 들려오는 진동이 더욱 심해지자 그다지 여유가 없다고 라스도 동의했다.

     

    “나중에 다 알려주셔야 해요. 원, 무슨 비밀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계시는지.”

     

    “네가 할 말이니? 파우스트.”

     

    굳이 힘을 주어 놀리는 듯한 파우스트라는 이름에, 라스는 꼼짝없이 납득했다.

     

    “그건 설명하자면 긴데… 아무튼, 알겠습니다.”

     

    마나 포션을 꺼내 아셀라에게 주사하는 라스.

     

    “부작용이 있으니 주의하세요. 30분 후에 근육 경련이 수반됩니다. 그만큼 성능도 좋지요.”

     

    아셀라의 몸에 생기가 들이찼다. 그녀의 커다란 마나 탱크가 가득 차서 넘실댄다. 넘쳐 흐른 마나가 피부를 타고 넘실대며 반짝일 지경이었다.

     

    “마음에 들어.”

     

    “마왕의 저 형태는 저도 처음 봤어요. 블루문은 특수한 현상이니까요. 타이밍이 안 좋았네요. 하지만 시간 마법은 봉인했습니다. 저 괴물 같은 물리력만 돌파하면 이길 수 있을 텐데.”

     

    “요컨대 무식하게 힘으로 부딪치면 된다는 말이구나.”

     

    아셀라가 떨어져 있던 지팡이를 주웠다.

     

    “오히려 알기 쉽네.”

     

    “황녀님.”

     

    아셀라가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의 입술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새하얀 작은 새가 잠깐 몸을 쉬이고 간 시간은 불과 2초나 됐을까.

     

    라스의 입술이 떨어지고, 아셀라는 물끄러미 속눈썹을 떨어트리며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훑었다.

     

    “몸조심하시고요.”

     

    “지면 네 탓이야.”

     

    “예? 왜요?”

     

    아셀라는 대꾸하지 않고 그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

     

     

     

    “흡.”

     

    타냐가 마왕의 정권을 검으로 받아냈다. 오러로 정제한 검이 부들부들 떨렸다. 피로도가 쌓여 깨지기 직전이었다. 축을 맡은 발도 버티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무슨 힘이….’

     

    그야말로 압도적. 강인한 무력 그 자체였다. 타냐는 오러도 없는 상대에게 근접전으로 이렇게까지 애를 먹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빈틈!”

     

    합류한 리셰가 미궁 벽을 타고 뛴다. 도움닫기는 세 걸음. 연격을 쏘아내나 그마저도 강화된 표피에 얇은 기스를 낼 뿐이다.

     

    “괴물 자식!”

     

    발렌이 쏘아낸 화살도 우습게 튕겨내는 메피스트. 앰브로시아가 신성주문을 머리 위에 떨어트리며 외쳤다.

     

    “그의 마기는 무한정이 아니오! 처음보다는 약해지고 있소이다. 조금만 버티시오!”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자매님.”

     

    라스가 그녀의 옆에 합류하며 함께 빛의 십자가를 떨어트렸다.

     

    “고트베르크 선생! 돌아오셨군! 황녀님은 찾으셨소?!”

     

    라스가 대답 대신 고개를 까닥였다.

     

    미궁의 한쪽 통로, 부서진 외벽 파편이 가득한 사이에서 황금의 마법진이 대량으로 빛난다.

     

    “비켜.”

     

    거리를 벌리는 타냐와 리셰. 콰콰쾅! 메피스트를 향해 얼음창이 연발로 작렬했다.

     

    그가 대처할 틈도 주지 않고 다음 마법 시전에 들어가는 아셀라.

     

    “빙옥.”

     

    쿠쿵! 초저온의 얼음이 떨어져 마치 감옥처럼 메피스트의 몸을 구속했다. 창살에 닿은 그의 육체가 파스스 얼어붙어 깨져간다.

     

    “흥미로운 술식이군.”

     

    메피스트가 몸을 휘둘렀다. 쨍그랑! 단숨에 감옥이 깨져나간다.

     

    “내구도는 약하지만.”

     

    얼음 감옥은 대가도 지불해서 발동한 6위계였다. 결코 단순한 힘으로는 부서지지 않을 터였건만.

     

    그래도 저 반응은 반쯤 허세다. 마왕은 분명 마기를 소모하며 점점 궁지에 몰려가고 있었다. 아셀라는 파악했다.

     

    넘쳐나는 마나로 다시 한 번 얼음을 쏘아낸다. 동시에 걸음을 옮기며 미궁의 벽면을 마법진으로 가득 채운다.

     

    “호오.”

     

    그 술식을 알아본 메피스트가 감탄했다.

     

    “어디 이것도 흥미로운가 지켜보거라.”

     

    촤르륵! 메피스트를 향해 황금의 사슬이 쏘아지며 그의 몸을 구속한다.

     

    아까 리셰를 붙잡아 감속시켰던 바로 그 감속 마법이었다. 메피스트가 자신의 술식을 빼앗겼다고 깨닫기도 잠시, 그의 목을 향해 리셰의 날카로운 성검이 쏘아졌다.

     

    ―파앗!

     

    아슬아슬하게 그의 경동맥을 스쳐가는 검날.

    슬로우모션으로 마왕의 붉은 피가 튄다.

     

    “이제는 마기가 부족한 모양이지. 자신의 마법을 빼앗긴 기분은 어떠하더냐?”

     

    아셀라가 메피스트를 도발했다. 여태 아무리 침착한 척했던 그라도 결국은 마법사.

     

    마법사의 자존심을 긁으면 도발에 응할 것이란 계산이었다. 전투에 있어 상대의 정신을 흔들어놓는 건 본격적인 싸움만큼이나 중요하니.

     

    하지만 메피스트는 여전히 덤덤한 반응이었다.

     

    “수식이 비효율적이다. 마지막 문장. 감속도 설정은 굳이 전문을 적을 필요가 없지.”

     

    지식을 탐구하는 학자를 뛰어넘어 오로지 그에 매몰된 기계 같은 대답이었다.

     

    아셀라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심리전을 차단하려는 기색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인간의 감정과 상식을 기반으로 접근해서는 안 됐다고 깨달았다.

     

    분명 그는 인족에게 전쟁을 일으킨 일도, 그로 인해 어마무시한 생명이 죽어 나가는 결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리라.

     

    그게 마족이라는 존재라고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 어디 끝까지 고집부려 봐.”

     

    아셀라가 시전 속도를 올렸다. 그에 비례해 메피스트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이걸로 끝이야!”

     

    마침내 승기를 잡은 리셰가 호기롭게 성검을 찔러넣으려는 순간.

     

    ―콰아앙!!

     

    메피스트가 남은 마기를 모두 분출해 폭발을 일으켰다.

     

    리셰는 그것이 최후의 발악이라고 여겼다. 성검의 가호와 라스의 보호막으로 그 정도 공격은 버텨낼 수 있었다. 마기를 다 써버린 마왕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일 터.

     

    하지만.

     

    “방심했군, 용사여.”

     

    ―파앗!

    주변이 밝아졌다.

    그들을 비추는 푸른 빛. 하늘에 뜬 커다란 달이다.

     

    메피스트가 공격한 건 용사 파티가 아니었다. 그들이 싸우던 미궁이라는 전장이었다.

     

    맨 위까지 수십 층은 되는 마왕성 건물을 모두 날려버린 메피스트. 다시금 블루문의 마기가 그에게 쏟아진다.

     

    “용사님!”

     

    타냐가 긴박하게 외쳤다. 그간 입힌 메피스트의 상처가 수복되며 상체가 한층 흉악하게 두터워진다.

     

    이 미궁으로 전장을 옮긴 것.

    지금까지 이뤄지던 합.

    모두 이 일격을 위한 함정이었다.

     

    “바늘에는 가장 좋은 미끼를 꿰어야 하는 법이지.”

     

    메피스트가 위협적인 팔을 치켜들었다. 흘러넘치는 마기가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나온다.

     

    “그대들도 이 기회에 깨닫게나. 탐구하지 못한 미지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망설임 없이 리셰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메피스트.

     

    ―콰과광!!

     

    유례없는 폭음이 일고, 충격파가 터졌다.

     

     

     

    “…하.”

     

    아셀라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궁지에 다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나 참, 내가 천리안을 쓰려고 마법을 얼마나 연습했는데.

     

    얼마나 많은 대가를 바쳤는데.

     

    쟤는 거기에 저만한 힘도 가지고 있다니, 치사해서 분통이 터진다.

     

    라스가 그렇게나 애를 먹을 만도 했다.

     

    전례 없는 강적이다.

     

     

    주변을 둘러본다.

     

    용사는 쓰러졌다. 성검은 간신히 붙잡고 있지만 일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애초에 이미 부상이 심했다.

     

    전위와 궁수, 성녀도 마찬가지. 방금 충격으로 무릎을 꿇었다.

     

    ‘라스, 라스는.’

     

    그 역시 마기의 폭풍 속에서 더없이 지쳐 보인다. 간신히 다리를 붙잡고 버틸 뿐.

     

    하지만 눈동자에는 조금도 포기한 기색이 없다.

     

    늘 그런 남자였다.

     

     

    그럼 나도 응답해야지.

     

    아셀라가 진을 그렸다.

     

    개수는 일곱.

     

    ―화아아악!!

     

    차원을 찢고 마기 폭풍 속에서 빛과 함께 신창이 소환된다.

     

    쐐애액! 마왕을 향해 쏘아지는 신창. 콰악! 그의 옆구리를 관통하며 빛의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마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무한대에 가까운 마기가, 아셀라의 필살을 비웃듯 상쇄한다.

     

    “…하.”

     

    사르르, 아셀라의 머리가 새하얗게 새어갔다.

     

    이만큼이나 수명을 바쳤는데 조금도 소용이 없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마왕은 7위계보다도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자다. 그가 블루문을 통해 무한이나 다름없는 마기를 공급받고 있다.

     

    한 발의 7위계로 쓰러트릴 수 없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7위계 마법은 앞으로 한 번.’

     

    하지만 신창조차 통하지 않는 적을 어떻게 쓰러트릴 수 있을까.

     

    방도가 있기나 한 걸까.

     

    차라리 자신이 용사처럼 세상의 신비였다면, 운명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좀 더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을 텐데.

     

    지팡이를 꽉 쥔 손에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탁.

     

    그런 그녀의 손등 위에 올라오는 다른 손.

     

    “황녀님.”

     

    아셀라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주치의가 곁에 서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리콜, 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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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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