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눈치를 보며 비동의 위치를 알아내려는 그때, 갑작스럽게 난입한 무림맹에 의해 분위기가 급변했다.
‘무림맹이 데려가 버리면 찾을 방법이 없다!’
무림맹이 어디인가.
서역에서의 오랑캐를 막아낸 공로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집단이 아니던가.
숙적이라는 마교도 패퇴시킨 만큼 현 무림에서 무림맹을 상대로 감히 싸움을 걸만한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즉, 무림맹이 끼어들면 전부 손가락을 빨며 돌아가야 할 처지.
결국 남은 세력들은 시선만으로 암묵의 합의를 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대들은 누구시오?”
무림맹 호남성지부에서 온 무인들은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무인들을 노려보았다.
‘뭐 이리 많아?’
명령을 따라 남하하길 이틀.
전서구를 통해 전해진 소식을 따라 이동하고 있던 그들은 의문의 색목인을 추적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건 너무 많아도 많지 않은가.
눈대중으로만 확인해도 쉰 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있다니.
‘골치 아프군.’
이 사람들을 어떻게 세 명이 함께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
작정하고 살인 멸구를 시도하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숫자 차이가 있는데.
‘생각보다 더 많네요.’
폭풍의 중심에 선 마들레르는 차분한 눈으로 무림맹과 벽력검제 비동 발굴 연합(임시)을 가라앉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말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
말이 있었다면 이렇게 귀찮은 상황에 처하지 않았으리라.
아무리 무림인들이 경공을 펼쳐도 무한정 펼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말의 속력을 따라잡으려면 경공에 조예가 있어야 했으니.
“벽력검제의 비동을 무림맹에서 독점하고자 하다니, 이건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오!”
“맞소! 권력을 남용해 이익을 취하려 하다니!”
“무림의 질서를 지키는 자가 이리 비겁한 짓을 하면 어찌 무림의 법도를 바로잡는단 말이오!”
머릿수가 많으면 생기면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머릿수를 활용한 압박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무림에는 절대고수라는 비대칭 병기가 있긴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어두운 산길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들은 마음껏 설득을 할 수 있었다.
상대방이 설득될 때까지!
“진정하시오. 우리들은 그저 무림맹의 명령받아 혈겁을 방지하기 위해 온 것이오!”
“이제 와서?”
“아시지 않소? 무림맹은 정보를 확인할 때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되오. 아무리 순찰대가 많아도 임무를 위한 정보 하달에는 시간이 걸리니…”
순찰대원이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보았다.
‘젠장! 어떻게든 사람을 더 불러왔어야 했는데!’
적당히 무림맹의 권위를 세워서 쫒아내려 했건만,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니 이미 글러 먹은 상황.
‘저쪽이 우리와 협조를 해줘야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겠군.’
당사자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으니.
순찰대 7조장 이영걸은 간절한 눈으로 송경을 쳐다보았다.
“부디 협조해주시지 않겠소? 그대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오.”
“저희야 그래 주시면 좋지요. 마침 무림맹으로 가던 터라…”
송경안 재빠르게 순찰조장의 말에 대답했다. 그로서도 저 무뢰배들 보다는 무림맹과 함께하는 것이 이득이었으니 당연한 일.
하지만 절대고수의 비급이 숨겨져 있는 비동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자들이 그리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었다.
“이미 저자는 비동의 위치를 발설했소!”
누군가가 외친 말.
7조장은 갑작스러운 외침에 깜짝 놀라 송경을 쳐다보았다. 송경은 등 뒤에서 들려온 말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저희는 비동에 관심이 없는데, 알려주면 알아서 떠나지 않을까 하여…”
“그걸 말해버리시면…되려 독한 놈들은 더 붙을 수밖에 없소.”
아무리 작은 산이라 한들, 산은 산이다.
그만한 높이와 넓이가 있기에 비로소 산이라 불릴진대, 고작 비동이 있는 산 위치 하나만을 가지고 발굴을 시작한다?
어지간한 대문파라도 엄두가 나지 않을 미친 짓이었다.
하물며 중소 문파들이라면 더더욱.
그런 상황에, 조금이라도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마들레르와 송경에게 한 글자라도 더 정보를 얻어내야만 했다.
다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하지만 저흰 그 물건이 그저 고인의 개인 물건을 숨겨놓은 자리라 생각해서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았습니다.”
“송경, 설명 좀 해봐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들레르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송경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옙, 그러니까…”
송경은 마들레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대부분은 대충 분위기로 짐작이 갈만한 부분이었지만, 마들레르는 묵묵히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기억하고 있어요.”
“예?”
마들레르의 말에 송경이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지도를 본 시간은 물 한 모금도 겨우 마실 정도의 시간. 그걸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전장에서 지형을 숙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전쟁의 성패를 가르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형은 그중에서도 손꼽히게 중요했다.
싸우는 곳이 평야냐, 산맥이냐, 협곡이냐, 해안이냐에 따라 기사단이 취해야 할 전략은 판이하게 달라지곤 했으니까.
이제는 전장을 떠나 한 명의 귀족 영애로 돌아간 그녀였지만, 전장이라는 강렬한 경험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는 없으니.
그녀는 지도를 훑어보는 순간 모든 내용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그, 그걸 기억하고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이보게, 무슨 뜻인가?”
“조, 조장님. 이분께서 지도의 내용을 기억하고 계신다고…”
송경은 제 딴에는 코앞이 아니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지만, 문제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무림인이었다.
내공을 사용해 청력을 강화하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의도치 않게 도화선에 불을 붙인 송경의 발언에, 무인들의 시선이 전부 마들레르에게 꽂혔다.
당연한 일이었다.
비동의 열쇠를 그녀가 쥐고 있었으니.
“젠장.”
‘좆됐다!’
7조장의 긴장한 얼굴 가죽 아래에서 혼돈이 몰아쳤다.
하필이면 개판인 상황에서 폭탄을 하나 더 터트리다니!
“어, 그, 그게…”
송경의 얼굴에도 식은땀이 비오듯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들레르는 어디까지나 게르만어로 말하고 있으니, 송경이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면 되지 않았을 터.
하지만 계속된 상황에 정신이 완전히 갈려버린 그는 검열에 실패하고 말았다.
“저 여인을 데려간다는 건 무림맹이 비동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소?”
“아니, 아니요! 우리는 그저 비동으로 인해 일어날 혈겁을 막고자 한 것뿐, 그럴 의도는 없었소!”
“그럼 알려주면 될 것 아니오? 우리끼리 알아서 합의를 볼 테니-”
“그건 아니 되오!”
혼란으로 치닫는 상황.
‘보물이 뭐길래 다들 저러는 거지?’
그녀라고 보물을 탐하는 도굴꾼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기사단의 업무 중에는 도굴꾼들을 처리하는 것도 있었으니.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찾아와서 난리를 치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보물이라 함은 보통 무덤에 있는 경우가 많았고, 무덤을 파헤치는 건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천인공노할 짓이었으니.
“송경, 그 지도가 가리키는 보물이 뭐길래 다들 이러는 거예요?”
“그게…저도 잘…”
“전전전대, 아니 전전대? 아무튼 옛 절대고수인 벽력검제의 비급이 적힌 비동입니다.”
“송경.”
“절대고수의 비급이랍니다.”
“비급?”
“무술이 적힌 서책을 말합니다.”
“절대고수는…”
“번역하면 그랜드 마스터, 라고 하면 될 듯 합니다.”
완벽히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이해시키는 데에는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대단한 물건이긴 하네요.”
“…무인이셔서 놀랄 줄 알았습니다.”
“굳이 새로운 걸 배울 필요는 못 느끼거든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것도 아니고.”
그녀에게 중요한 건 윌리엄을 어떻게 만나냐지, 비급 따위가 아니었다.
“송경, 저들에게 말하세요. 남곤산의 북쪽 산기슭의 가장 큰 나무, 산 중턱의 동굴, 산꼭대기, 곡괭이 같은 모양의 봉우리.”
“그, 그건…”
“어차피 우리는 저 일에 관심이 없어요.”
마들레르가 단호하게 말하자, 송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장을 쳐다보았다.
조장은 폭삭 늙은 얼굴로 송경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봤자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확정된 수순이었으니까.
“이보시오! 마들레르님께서 위치를 알려주셨소! 위치는-”
송경은 목청껏 남곤산의 특정 지점을 알려주고는 눈치를 살폈다.
무인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빛이었지만, 상당수는 길을 떠났다.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면, 당연히 먼저 선점하는 쪽이 유리했으니.
“그게 정말 사실인가? 저 여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보장은?”
“그래서 납치라도 하겠단 말이오?”
조장의 성난 목소리에 무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확연하게 줄어든 숫자.
무림맹 순찰 조장.
무림맹이 멍청이도 아니고, 순찰 조장이 사라지면 그걸 명분으로 더 강하게 개입을 해오리라.
순찰 조장을 살인 멸구 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이쯤하고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소?”
“…알았소.”
남은 무인들마저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마들레르와 송경을 향해 있었다.
???:그딴게 중요함? 지금 내 짝사랑이 무림맹에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