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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44

     

    청혼했다.

     

    어느때와 같이, 황녀답게.

     

    자신만만하게 마음을 전했지만 아셀라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뛰었다.

     

    눈앞의 백발의 남자.

    그녀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고, 기댈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에게 라스 고트베르크 이외의 선택지는 없다.

     

    그 확신은 결코 틀리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부디.

     

    그가 자신을 품어주길 바라며, 미래를 함께해주길 소원하며.

     

    마음속에 담겨있는 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려면 그 어떤 단어를 쓰든 수많은 문장을 만들든 백만 분의 일도 채 보여주지 못하겠지만.

     

    우선은 그곳부터.

     

    둘이서 시작했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부터.

     

    혼약자라는 사이로 돌아가고 싶었다.

     

    ‘…거절당하면 어쩌지.’

     

    항상 불안했다.

    언제나 라스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꿔왔지만, 그간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것만 같아서.

     

    말을 마치자마자 후회와 걱정이 몰려온다. 조금 더 분위기를 만들면 좋았을걸.

    그와 재회했다는 기쁨에 너무 급하게 이야기를 꺼내버렸다.

     

    ‘…라스가 수락한다고 해도.’

     

    혹시나 자신이 처음 마음을 전했을 때처럼 그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인다면.

     

    앞으로 함께 보낼 시간 동안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면.

     

    평생 괴로울 게 틀림없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아셀라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짧은 순간 사이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래도 이게 맞다.

     

    전에 올렸던 둘의 약혼식에서 먼저 마음을 선언해줬던 건 라스였으니.

     

    이번엔 자신이 먼저.

     

    조금은 초라한 자리이긴 해도.

     

     

    그런 아셀라의 불안은 채 1초도 가지 않아 깨끗하게 사라졌다.

     

    아셀라는 순간 거울을 본 게 아닌가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이나 라스의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으며,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가 아셀라의 손을 잡으며 청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요, 황녀님. 결혼해요.”

     

    그제야 아셀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스의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이제야 전해진 그의 감정이 가슴 속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반지는 서로 이미 끼고 있네요. 교환식이라도 할까요.”

     

    라스가 자신의 손에 끼워진 약혼반지를 빼 아셀라의 손에 새로 끼워주었다.

     

    크기가 맞지 않아 그녀의 엄지손가락에 걸치듯 걸어버린다.

     

    “풋, 뭐 해.”

     

    “생각보다 어울리지 않아요?”

     

    “상인의 귀부인도 아니고. 마음에는 들었어.”

     

    아셀라는 자신의 반지를 빼 라스에게 끼워주었다. 그의 새끼손가락, 두 번째 마디에서 걸려버린다.

     

    “피가 안 통하는데요.”

     

    “결혼식까지만 참아.”

     

    “손가락 아홉 개인 신랑을 맞으시겠군요.”

     

    라스의 짓궂은 농담에 아셀라가 즐거워하며 그의 어깨를 쓸어내리고는 가볍게 몸을 붙였다.

     

    그의 귀에 속삭이듯 소원을 전하는 아셀라.

     

    “라스.”

     

    “예.”

     

    “행복해지자.”

     

    그의 뺨에 깃털 같은 키스를 보내고 몸을 떨어트린 아셀라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이야.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라스는 반지가 걸린 손가락을 그녀와 맞잡으며 대답했다.

     

    “네. 저도 약속할게요.”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는 두 사람.

     

    그저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몇 분이나 정신을 놓고 있었을까, 라스가 짝 손뼉을 쳤다.

     

    “자, 그래서 저희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려면 당장 황녀님의 수명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라스가 발동하던 주문진을 이어서 연결해나갔다. 아셀라도 조금은 진지해졌다.

     

    “내가 수명을 쓴 건 내 선택이야. 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 엘릭서는 네가 써야 해.”

     

    “황녀님 몸도 제 몸이에요. 당연히 고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

     

    라스의 어깨에 올린 아셀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여튼 주제를 돌리고 능글거리며 빠져나가는 건 일류다. 이대로는 그의 페이스에 말릴 게 뻔했다.

     

    “황녀님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으니까요. 이 선택은 합당해요. 말씀드렸지만 저는 사탕을 개발해도 되고, 의학으로 해결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요.”

     

    “거짓말.”

     

    아셀라는 곧장 라스의 속내를 꿰뚫어 봤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서로 비밀은 없기로 했죠. 예, 거짓말입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지 않을까 싶은데요. 적어도 3년은 시간이 있고.”

     

    “3년? 그것밖에 없다고?”

     

    식겁하는 아셀라의 반응을 보고 라스는 말실수를 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전부 밝히고 함께 머리를 굴리는 게 낫겠지.

     

    뭐니뭐니해도 아셀라의 두뇌는 대륙 최고가 아니던가.

     

    “뭐, 정확히는 원래 미래에서 세상이 멸망했던 시점 즈음 있잖아요.”

     

    “커다란 분기점. 응, 거기구나. 그때까지 방법을 못 찾으면 어떻게 돼?”

     

    라스가 대답 대신 애매하게 입꼬리를 일자로 늘렸다. 아셀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 수명은 적어도 3년보다는 더 남았어. 라스, 역시 네가 엘릭서를 쓰고 나를 고칠 방법을 찾아.”

     

    “아시겠지만 저는 마법에는 조예가 얕아요. 지난번에도 3년 넘게 걸렸죠. 특히나 고위계 마법의 부작용이라면…”

     

    “할 수 있잖아.”

     

    아셀라가 라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 주치의니까.”

     

    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우선 이걸 만들고 생각해 볼까요.”

     

    마저 진을 완성하는 라스. 시전에 들어간다.

     

    [연성]의 발동까지는 성공했다. 엘릭서의 조합식이 완성됐다. 그가 상태창에 떠오른 메시지들을 체크했다.

     

    “제작 시간은… 꼬박 하루가 걸리는군요. 그때까지 조금 쉴까요.”

     

    아셀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나가서 전황도 확인해보자. 마왕군은 와해되어 후퇴하고 있겠지만 잔당이 인간계 곳곳에 남긴 남았을 테니.”

     

    그때 라스의 상태창에 추가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

    · 두 개의 재능이 모두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 디버프가 A랭크로 상승했습니다.

     

    · A랭크 디버프 : [혼절]이 발생합니다.

    ―――――――――――

     

     

    “이런 젠장.”

     

    라스가 혀를 찼다. 아셀라가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라스, 무슨 일이야?”

     

    “잠깐 기절할 텐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깨어날…”

     

     

    ―――――――――――

    · A랭크 재능의 디버프로 1년간 혼절합니다.

    · A랭크 재능의 디버프로 1년간 혼절합니다.

    · 동일 디버프가 중복 발생했습니다. 효과가 강해집니다.

     

    · [혼절 (3년)]이 발동합니다.

    ―――――――――――

     

     

    그 숫자를 본 라스의 등에 식은땀이 차올랐다. 그가 급하게 아셀라의 팔을 잡았다.

     

    “아셀…!”

     

    ―쿠당탕!

     

    균형을 잃고 의자에서 쓰러지는 라스.

     

    아셀라는 무너지며 그의 몸을 간신히 받쳤다.

     

    “라스?”

     

    이름을 불러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파스스, 그가 시전하던 엘릭서의 연성진이 효력을 잃고 파기되어간다.

     

    “라스.”

     

    조용해진 방 안.

     

    아셀라는 헤이케가 찾아올 때까지, 한참이나 쓰러진 그를 껴안았다.

     

     

     

    ***

     

     

     

    한참, 한참 동안 라스는 깨어나지 못했다.

     

    연합군이 마왕군의 잔당을 토벌해 승전보가 울렸을 때도.

     

    용사 파티의 훈장 수여식 때도.

     

    인간계 전역에 한 달이나 축제가 열렸을 때도.

     

    내의원의 어떤 명의가 치료해도, 가족이 찾아와도.

     

    그저 월광궁에 마련된 치료실에서 미약한 숨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아셀라는 내내 그의 옆을 지켰다.

     

     

     

    전쟁이 끝나고 일상이 돌아왔을 때 즈음, 라스를 후국으로 옮겨 치료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실제로 제국보다 후국이 그를 보다 잘 케어할 것이었다.

     

    라스를 후국으로 보내기로 하고, 아셀라는 결단을 내렸다.

     

     

    월광궁의 궁원을 한 자리에 모으고, 아셀라는 마지막 연설을 시작했다.

     

    “금일 부로 본녀는 정식으로 승계권을 포기하노라. 차후 월광궁의 운영은 비서관에게 위임하겠다.”

     

    아셀라의 선언은 어느 정도 예정된 것이었기에 놀라는 이는 없었다. 다만 궁에는 아쉬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본녀의 선택에 실망한 이도 있을 테지. 차후 황제를 섬기기 위해 본녀를 선택한 이도 많을 것이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심심한 사과를 전하마.”

     

    아셀라는 자신 앞에 가득 들어찬 기사와 궁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명예를 원하는 자는 목휘궁으로 향하라. 재편성할 수 있도록 말은 맞춰두었노라.”

     

    아셀라의 앞에 월광궁 기사단장이 나섰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묵묵히 호위대와 친위대를 이끌었던 남자였다.

     

    그가 아셀라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전하께서 바친 고귀한 희생으로 인류의 미래가 이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이가 알고 있습니다.”

     

    기사단장의 눈동자는 확고했다.

     

    “전하께 바친 충성 덕에 저희 월광궁 기사단은 이미 하늘과도 같은 명예를 얻었습니다.”

     

    아셀라가 그를 향해 눈짓했다.

     

    “일어서거라.”

     

    척, 절도있게 자세를 취하는 기사단장.

     

    “그간 그대들이 표한 충의에 감사를 전하는 바이다.”

     

    단장이 경례를 올린다. 그를 따라 그 자리의 모든 기사들이 아셀라를 향해 손을 올렸다.

     

    그들의 마중을 뒤로하고, 아셀라는 월광궁을 나섰다.

     

     

     

    후국에 도착한 아셀라는 새로운 생활을 이어나갔다. 어린 나이에 가주 자리를 물려받은 그의 여동생이 아셀라를 환영해주었다.

     

     

    후작가 저택에 살며 매일같이 라스를 돌본다.

     

    동시에 그를 낫게 할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 탐구하고, 탐색하며, 연구를 계속했다.

     

    그가 먹던 사탕이 다 떨어지기 전에, 연금술을 배워 벼랑꽃으로 같은 성능의 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후국 수호대장인 야만용녀와 함께 라스를 위한 아티팩트를 찾으러 모험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를 위한 꽃밭을 관리하는 일은 필수였다. 봄이 될 때마다 샛노랗게 물드는 꽃밭을 보면 아셀라는 그와의 첫 만남이 다시 떠오르곤 했다.

     

    “라스.”

     

    밤마다 그가 누운 침대 옆에 앉아 머리를 쓸어넘긴다.

     

    잠깐이라고 했으면서, 참 오래 기다리게 한다.

     

    언제 일어나서 다시 나를 이 팔로 안아줄까.

     

    알고 싶어도 이제는 지불할 수명이 없어 천리안도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어느덧 라스와의 마지막 대화로부터 3년이 지나갔다.

     

    아셀라는 여전히 그 꽃밭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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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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