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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44

       루미는 눈을 뜨자마자 아르노의 환상으로 자신을 덮었다. 지난 20년간 버릇처럼 해오던 일이라 발동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녀가 아르노로서의 행색을 갖추자마자 누군가 조명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카렌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뻗어 있는 그를 보고는 복도를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아르노 단장님 찾았어!”

         

       그들은 이제 막 주변을 수색해 사람들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원더랜드와 지상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르기 때문에 앞선 일행들과 그녀가 돌아온 시간의 차이는 30초도 채 되지 않았다.

         

       루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원더스타인은 바로 뒤따라온다고 했다. 그곳과 이곳의 시간 차이를 생각하면 그도 지금쯤 지상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아찔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녀의 몸은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펄펄 끓었다. 사신의 저주 때문에 몸 전체가 한 번 얼어붙기까지 했으니 몸에 이 정도 부하가 걸려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단장님, 왜 그러세요?”

         

       카렌이 놀라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아래층에서 엘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어! 우리 단장!”

       “어, 정말? 아, 아르노 단장님?”

         

       루미는 자신을 부축하려는 카렌의 손길을 뿌리치고 계단으로 향했다.

         

       “비켜라. 내려가 봐야겠다.”

         

       당장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드러누워서 쉬고 싶었다. 그러나 원더스타인, 그 남자가 무사히 돌아왔는지 확인하는 게 그녀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무대 뒤 대기실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원더스타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아르노가 다급하게 질문했다. 그의 맥박과 호흡을 살피던 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몸은 멀쩡한 것 같은데……. 아무리 불러도 꿈쩍도 안 하는데요?”

         

       루미는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자신이 올라온 지 벌써 1분이 흘렀다. 저곳에서는 2시간 가까이 흘렀다는 말이 됐다.

       그럼 그는 이미 돌아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혼이 비어버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2분, 3분이 지났다.

       루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감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실패했구나.

       그의 마지막 미소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위에 가서 기다리세요. 바로 뒤따라갈게요.

         

       나쁜 새끼.

       루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같이 살아서 돌아가자는 말은 역시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개자식. 네가 이렇게 가버리면 나는 마음이 편할 줄 알았냐!’

         

       그 무시무시한 사신의 앞을 막아서며 자신을 지켜주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루미는 울음을 참기 위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다들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라는 둥 서로 미소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은 원더스타인이 깨어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겉보기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라 무슨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천진하고 무지한 평화로움이 그녀를 더 서럽게 만들었다.

       더 이상 울음을 참기 힘들겠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그가 눈을 떴다.

         

       “어, 깨어났다!”

       “단장님!”

         

       원더스타인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살폈다. 그는 그중에 아르노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바로 연기에 들어갔다.

         

       “끄응, 머리가……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갑자기 무대가 흔들리더니…….”

         

       루미는 그 뻔뻔스러운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녀는 볼에 흐르는 눈물을 마구 닦고는 그를 노려봤다.

       사람을 이렇게 걱정시키다니.

       그녀는 렌티큘러 메시지를 그의 눈앞에 띄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리 오래 걸렸어?

       -오래요? 무슨…….

       -현실 시간으로 5분 가까이 흘렀단 말이야!!!

         

       그는 무려 느낌표를 3개나 찍은 것을 보고는 그녀가 어지간히 놀랐구나 싶었다.

         

       -아, 그거요. 자카누바 군단이 패퇴하는 과정에서 시간 결계 전체가 무너졌어요. 그래서 중간에 시간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뭐?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그에게 화낼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금방 다시 굳어버렸다.

         

       “단장님, 정말 괜찮으세요?”

         

       마야의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제외하면요?”

       “단장님의 마법이라면 충분히 고칠 수 있지 않나요?”

         

       레이나는 자신의 상처도 단번에 고쳤던 그의 솜씨를 떠올리며 말했다.

         

       “글쎄요. 이건 영혼에 타격이 간 것 같아서 말이죠. 나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군요.”

       “그럼 누가 단장님 수발을 들어야겠네!”

         

       클라라가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카렌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떠먹여 드리고, 옷도 갈아입혀 드리고, 씻겨도 드리고…….”

       “씨, 씻겨주다뇨……. 이상해요…….”

         

       루엘로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어른들은 다 슬라그보르트 공작의 상태를 살피러 갔는데, 여자애들은 죄다 원더스타인을 보려 내려왔다.

         

       루미는 계집애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생사고락을 같이 한 이 몸이 여기 있는데…….

         

       그에게 장문의 항의 메시지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저렇게 다들 가까이 붙어 있는 상황에서 렌티큘러를 쓰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그가 몸을 못 쓴다는 걸 알자 다들 그의 옆에 달라붙어 조잘거렸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3명의 단장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공작이 무사히 깨어났다고 알려왔다. 공작은 다행히 자신이 저혈압으로 기절한 줄 알고 있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는 것이다.

         

       로드 판타스틱은 재치 있게 공작이 기절한 줄 모르고 자신들끼리 공연을 진행해버렸다고 말을 꾸며냈다.

         

       그건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공작은 늘 눈을 감고 다녔기에,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어두운 객석에 몸을 파묻고 있는 그가 기절한 건지 공연을 감상하고 있는 건지 알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공백의 1시간 30분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허허, 관객이 잠든 채로 진행된 크리스티앙의 초연이라. 이거 기자들에게 알려지면 우스갯거리가 되겠군. 미안하지만 다시 해줄 수 없겠나? 이번에 한 것은 연습으로 하고 말일세.”

         

       <다섯 곡예사>의 공연을 다시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주일이나 지났지만, 자신의 분량을 까먹은 사람은 없었다. 거기다 이것은 1인극에 가까운 공연이라 뒤에서 돌아가며 대본을 다시 숙지할 수 있었다.

         

       “설마 다시 원더랜드로 날아가진 않겠지?”

         

       겁먹은 카렌을 마야가 침착한 목소리로 안심시켰다.

         

       “그런 우연은 평생 가도 다시 접하기 힘들 거야.”

       “그래?”

         

       엘라가 어딘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배우들이 다시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원더스타인은 대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루미는 아르노의 환상을 움직여 일하는 척하면서, 그녀 본인은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그녀가 떠나고 일어났던 일을 말해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마무리를 해야죠. 손을 내밀어 주세요.”

       “손? 아…….”

         

       그녀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기괴하게도 새하얀 치아를 드러낸 입이 혓바닥을 내밀고 있었다.

         

       “그런 흉한 건 제거해야죠. 징그럽지 않나요?”

       “요르문간드에는 훨씬 기괴한 게 넘쳐. 엉덩이 모양으로 생긴 방귀 뀌는 나팔꽃도 있다고.”

       “……냄새도 나나요?”

       “나다마다. 똥 가루도 날린다니까.”

       “허, 정말인가요?”

         

       그녀는 그의 순진한 반문에 볼을 부풀리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그걸 믿어?”

         

       원더스타인은 못 말리겠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페어리답군요.”

       “흠, 그러게. 오랜만인걸, 이런 기분도. 다 네 덕분이야.”

       “제가요?”

       “그래. 네가 그때, 날 발견해주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환상 속에 콕 박혀 살았겠지.”

         

       루미는 오베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20년 동안 환상 속에 숨어 사는 페어리가 어디 있어? 방구석 폐인도 아니고.

         

       그의 지적은 정확했다. 실연의 고통 때문에 날개가 떨어져 나가고,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고, 세상과는 벽을 세우고 홀로 지냈다.

         

       그 세월이 무려 20년이었다.

       페어리 특유의 유치함과 고집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만약 끌어내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녀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지냈을 것이다.

         

       “고마워. 원더랜드에서 보낸 1주일은 오랜만에 나로 돌아간 기분이었어.”

       “계속 그렇게 지내도 좋을 것 같은데요? ‘루미’ 씨?”

         

       그의 간지러운 속삭임에 루미는 얼굴을 붉혔다.

       하여간 여자 홀리는 데는 도사라니까, 이 종자들.

         

       “시, 시끄러워! ‘아르노 단장님’이다! 너는 하려던 일이나 어서 해!”

       “후후, 알겠습니다.”

       “웃지 마!”

       “저는 항상 웃는데요?”

       “거짓말! 키르쿠스 앞에서는…….”

       “자자, 그럼 제 몸에 손을 대주세요.”

       “흥. 자기 부끄러운 얘기는 또 듣기 싫다는 거지? 여기!”

         

       그녀는 손을 그의 입에 가져다 댔다.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다. 그가 능력을 쓰기 위해서는 신체를 접촉해야 한다고 했기에 살이 드러나 있는 얼굴을 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손바닥에 무엇이 달려있는지 간과하고 말았다.

       그것이 보인 움직임은 과연 우연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무의식이 작용한 결과일까.

         

       그녀가 손바닥을 그의 입에 댄 순간, 거기에 달린 입술이 그의 입술을 틀어막고 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빨로 그의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손바닥에서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 입과 혀에서 나는 것과 같은 걸 알고는 펄쩍 뛰었다.

         

       “어어? 아, 아아악! 야, 이, 이거 어떻게 된……너, 너…….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제가 더 놀랐습니다. 이거 기분 되게 이상하네요. 설마 ‘손바닥 입’에게 키스를 당할 줄이야. ”

       “누, 누가 키스를 했다는 거야! 소, 손이 멋대로! 잊어버려! 키스라는 건 나중에 제대로…….”

       “나중에요?”

       “아, 아냐! 그건 그, 그러니까……! 야, 웃지 말라니까! 아니라고!”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얼굴을 붉히는 루미를 보며 원더스타인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무대 쪽에서 종이 울렸다.

       극 준비가 완료된 모양이었다.

         

       시골 광대와 다섯 곡예사가 무대 위에 올랐다.

       세 명의 단장도 각자 맡은 역할을 하기 위해 섰다.

         

       그렇게 <다섯 곡예사>의 공연이 다시 시작되려는데, 홀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공작의 비서가 뛰어 들어왔다.

         

       ”각하!“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의 표정 역시 떨떠름했다.

         

       곡예사들은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초연에 들어가기에 앞서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공작이 극본의 진위를 감정하기 위해 대학에서 초청한 고서, 유물 전문가들이었다.

         

       ”내가 허락 없이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각하……그, 그게 급한 사안이라서……. 아, 아무래도 저녁의 만찬, 그리고 기자 회견은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비서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그게……말입니다……. 저, 가, 감정 결과, 극본은……가짜로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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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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