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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44

       “그리고, 절 볼 때마다 손자며느리 취급하시는 것도 그만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식사가 끝나고 그 할배가 그 방에서 나갈 때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굳이 그쪽을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렇게 보아줄 필요가 없는 인간이었으므로.

        

       “저는 당신 손자와 결혼하기 싫으니까요. 과거에 제 모친께서 저를 그 아이와 약혼시킨 것은 제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관계를 끊는 건 쉽겠죠? 어차피 법적인 장애물도 없을 테니까.”

        

       “네 곁에 있는 그 아이들 때문인가?”

        

       “아뇨, 제가 그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추측이 좀 틀리셨네요. 제 주변에 누가 있건 없건 간에, 저는 그 아이와는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반대로 물어보지.”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마 내 쪽으로 돌아서기라도 한 모양이다.

        

       “역으로 그 아이들이 있어서 내 손자와 결혼해야 할 수도 있지.”

        

       “제가 결혼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을 어떻게든 해치려는 생각이신가요?”

        

       아마 그런 의미로 말한 거겠지. 내가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그 의미가 너무 명백해서 그런지, 그는 나의 말에 굳이 따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할 거로 생각하면— ”

        

       “제 주변에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씀이시겠죠. 네, 알아들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결국에는 돈과 돈이 부딪히는 모양새가 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사실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다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주식 싸움보다는 그렇게 직접 돈과 돈으로 부딪히는 쪽이 저로서는 더 편하게 느껴지는데요.”

        

       “그런가.”

        

       “그렇죠.”

        

       나는 몸을 돌려 그 노인 쪽을 바라보았다.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고 다소 불량한 자세로 앉아 나는 그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굴에 분노가 서려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굴이 조금 붉게 변한 것 같았다. 내 말에 아무런 위력도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뭐, 그냥 내 생각뿐일지도 모르지만.

        

       “절 때릴 수 없다고 손자한테 화풀이하는 건 그만둬줬으면 좋겠네요. 제가 윤다호 걔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제가 걔한테 반하지 않은 게 걔 잘못은 아니잖아요? 걜 그렇게 낳고 키워놓은 다른 사람의 잘못이지.”

        

       아, 이렇게까지 말을 듣고 나서야 전 회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제가 아직 회장 자리에 앉아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전 회장님도 마찬가지잖아요. ‘전’ 회장님. 뭐, 시간이 지나면 서로 자리가 더 명확해지겠죠. 그때까지 건강하게 계실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사라의 인생이 꼬여버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 중 하나다. 내가 좋게 볼 이유가 없었다. 그나마 윤다호는 자기 의지가 아니었으니 어느 정도 참작이 가능하긴 하지만, 저 사람은 자기 욕심 하나 때문에 자기 손자나, 아무 상관도 없던 사라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인간이었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최나경이 제일 나쁜 사람이긴 했지만.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 모양이구나.”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겠죠. 평생 학대당하면서 살았는데. 정신이 불안정해지지 않으면 그건 그거대로 비정상 아닐까요? 당신 손자도 상담이 절실한 것 같은데, 언제 한 번 손잡고 정신과에 한 번 다녀오시죠.”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말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전 회장님도 상담이 절실해 보이네요. 그렇게 뒷방으로 물러난 뒤에도 권력이나 돈을 잊지 못하고 계속 욕심을 부리는 것도 병이잖아요. 사람이 극도로 불안하면 그게 폭력으로 표출되는 경우도 있다는데, 손자님 팔에 멍든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도 있겠네요.”

        

       참 놀랍게도, 그런 폭언을 듣고도 노인은 추가적인 정보를 내놓지는 않았다. 의외로 절제력이 대단한 모양이다. 아니면 윤다호를 패면서 스트레스를 발산하는 성격이거나.

        

       윤다호가 성격이 그렇게 모나게 된 이유도 좀 알 것 같다.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스트레스 표출하는 대상이 그렇게 가까이 있으니 자기도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표출하는 거겠지.

        

       걔 아버지는 뭘 하나 몰라.

        

       하긴, 뭐, 전 회장이 저렇게까지 나대는 것을 보면 그것도 결국 바지사장이나 다름없는 처지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바지 회장인가.

        

       어느새 얼굴에 평정을 되찾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노인은, 나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나는 굳이 배웅하지는 않았다.

        

       너무 자극한 거 아닐까?

        

       자극한다고 갑자기 움직일 사람은 아닐 거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냥 자기 할 일 하겠지.

        

       그런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나에게 마구 소리를 질렀을 테니까. 윤다호가 비교적 그런 성격이었다. 요즘에는 어떤 이유로 그 성격이 좀 죽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도중에 한 번 동요해서 다행이다. 덕분에 나는 저 인간과 최나경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대충 윤곽은 볼 수 있었으니까.

        

       뭐, 별 건 없고.

        

       나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으니까.

        

       ……괜찮을까?

        

       아마도.

        

       나는 그 가능성을 알아차린 다음에 이것저것 찾아봤으니까.

        

       어떤 사람을 강제 입원 시키려면 보호의무자 2명의 동의와 정신과 의사 한 명 이상의 입원 권고가 있어야 한다.

        

       보호의무자야 뭐 사라의 친척이건 사라 친어머니 친척이건 돈으로 구워삶아서 구한다고 치더라도, 이 정신과 의사 한 명 이상의 입원 권고가 꽤 까다롭다.

        

       한국은 대리진료의 범위가 꽤 까다로운 편이니까. 정신에 온갖 해악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약물을 사용하는 정신과는 특히 더 그렇다. 거기에 ‘희귀 정신병을 앓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다중인격, 즉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전 세계에 400명이 채 되지 않는 초 희소병이다. 이걸 병으로 보는 것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의사가 있을 정도로 희귀해서, 아예 그 증례를 임상에서 직접 보지 못한 의사가 훨씬 더 많은 병이다.

        

       게다가 진단하기 위해서는 진짜 나와 사라의 정신을 오랜 시간 동안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증상을 분류해야 하는데, 고작 그걸 돈 좀 받은 의사 하나가 떠드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유진 그룹 측에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가능성이 ‘0’은 아니다. 대체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진짜로 그렇게 분류되는 증례를 가진 인간으로서, 어떻게든 걸릴 수는 있으니까.

        

       어쩌면 그걸 바탕으로 이전까지의 학대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최나경의 학대 방식은 그냥 봐서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비정상이었으니까. 그 목적도 한참 뒤에야 깨달았을 정도였고.

        

       그러니까, 미리 대비해야지.

        

       어떻게?

        

       생각은 있어.

        

       나는 불안해하는 사라를 도닥이며 대답했다.

        

       *

        

       “나는 반대야.”

        

       내 의견에, 하늘이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왜?”

        

       내가 되묻자 하늘이는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정말 만에 하나라도 너에게 심각한 위해가 가해질 수 있으니까.”

        

       “위해라니. 만약 정말로 정신병이었으면 치료되는 쪽이 더 건강한 거 아닐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하늘이는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헛웃음 소리를 내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다. 그냥 흘겨보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로 노려보았다.

        

       “그걸 말이라고 해?”

        

       이크, 진짜로 화가 난 모양이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다른 애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사라’와 ‘너’를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다고. 만약 네가 ‘치료하겠다’라고 하면 그게 절대로 ‘사라’를 뜻하지 않는 거라는 것도 알고 있고. 뭐야, 혼자 희생해서 사라지려는 거야? 그럼 나는 어쩌라고?”

        

       “…….”

        

       ……음, 내가 아무래도 말을 잘못한 것 같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하늘이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긴 했지만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무섭다기보다는 안쓰러웠다.

        

       진짜로 내가 사라질까 봐 두렵다는 듯 외치고 있었으니까.

        

       “나도 반대야.”

        

       내가 하늘이에게 뭐라고 변명을 하기도 전에 소희가 입을 열었다. 팔짱을 끼고 우리 둘의 대화를 보고 있던 그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너랑 ‘사라’ 둘 다 좋아하거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라도 사라지는 건 원하지 않아.”

        

       “참 당당하게도 말하네.”

        

       이번에는 딴지를 참지 못했다. 나와 사라 둘 다 가지겠다는 소리잖아, 저거.

        

       이쯤 되면, 나머지 한 사람의 의견도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반대야.”

        

       수아가 말했다. 의외로 수아는 평소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주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와의 추억을 처음으로 만들었던 사람이 너였으니까. 그리고…….”

        

       수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너한테 가장 의지하는 게 ‘사라’잖아. 너는 이미 그 아이의 일부야. 이제 와서 사라지면 그 아이가 너무 큰 상처를 입을 거야.”

        

       …….

        

       그 말에는 나도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사라, 너는 어떻게 생각해?

        

       …….

        

       사라는 아까부터 대답이 없다. 분명 거기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느껴지는데.

        

       그만큼 토라졌다는 의미겠지.

        

       사라와는 다시 밤에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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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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