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45

        

         “……휴우.”

         “뭐, 저장 경로를 까먹기라도 했나?”

         

         뜬금없이 식은땀을 흘리다 한숨까지 내쉬는 날 보고 설마 진짜 잃어버린 거냐며 재촉하는 헤멧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를 담아 손을 내저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정말 아무 일도 안 일어났고, 사고를 치기는커녕 이제 막 초능력을 발휘할 예정이지만.

         

         원래 발을 헛디딜 뻔해서 가슴이 철렁한 감각은 완전히 가시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법이니까.

         

         ‘자승자박自繩自縛’, 혹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가다’.

         

         흔하지만 꽤나 자주 쓰이는 소재라 생각한다.

         

         왕도적 판타지나 용사 마왕물이라면 막강한 마력을 가진 마족 간부가 마법을 반사 당한다던가.

         현대물이라면 악의 조직 과학자 씨가 만든 비밀 병기가 결사를 붕괴시키는 단초가 된다거나.

         이능력 배틀물이라면 악몽과도 같은 초상 능력을 발휘하던 상대가 스스로의 공격에 내성이 없어서 자멸하는 모습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것.

         

         승부가 결정된 후에 마무리로 ‘네놈의 패인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결정 대사까지 날려주면 극적인 느낌이 배가 되겠지.

         

         ……그렇지만 그걸 겪는 측 입장이라면 어떨까? 세상 억울하고~ 짜증나고~ 비참하고… 직전까지 죽일 듯 싸우던 적에게 티배깅마저 당한다면 고혈압으로 쓰러지지 않겠나?

         

         필시 미리미리 전략 분석을 해 놓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 고문 마법사는 마왕성 천장에 거꾸로 매달릴 게 분명하며, 과학자 씨는 이후의 구직 활동에서 서류 면접조차 못 통과하여 생계 유지가 어려워질 것이고, 멋들어지게 자멸한 바보 초능력자는 갈려 나간 멘탈로 인해 약체화해서 엑스트라가 될 게 뻔하다.

         

         그럼 어디 해당 템플릿에 현재 내 경우를 대입해보자.

         스스로가 만든 악성 코드의 추가적 확산을 막기 위해 더 강력한 방어 프로그램을 시중에 풀어버린다?

         

         이거 딱 봐도 나중에 더 큰 문제로 돌아오거나, 아니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새로 뽑아낸 바이러스까지 내 백신에 막혀서 망하는 그림 아니야!

         

         끝내주는 경력과 그와 비례하게 그다지 평탄하지 못한 경험들을 단시간 내로 압축해서 겪은 내 직감을 무시하지 말라. 이럴 때 써먹으려고 여러 도박장에 출입금지를 당하면서도 확실하게 검증해둔 거니까.

         

         “쯧….”

         

         가볍게 혀를 차고는 엄지와 검지를 슬쩍 문질렀다.

         찌릿찌릿. 어정쩡하게 심층 구조를 형성하려다 만 전류가 손끝을 감돌며, 후딱 마음을 정하라고 시건방지게 주인을 다그쳐온다.

         

         기다려 봐 욘석아, 적어도 구체적인 이미지는 정하고 힘을 줘야 할 거 아니야.

         

         ‘수집 가능한 영역에서 평가 가능한 백신은 전부 긁어모아. 못해도 그것보단 우수하게 만들어야 기업들이 달려들 테니까.’

         

         – 확인했습니다. 연산 장치 오버클럭 개시, 가용 메모리도 최대로 부스트하겠습니다. –

         

         헤멧에겐 들리지 않게, 제로의 업그레이드로 한층 더 견고하고 정밀해진 전용 통신 회선으로 보조를 부탁했다.

         

         크게 움직이는 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여파가 있을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구더기 무섭다고 장을 못 담그는 건 역시 안 될 말씀이다.

         

         넓어도 너무 넓은 네오 헤이븐을 직접 헤집고 다니는 건 여전히 기각. 시간과 기회 비용의 낭비가 너무 심하다 판단되고.

         

         가뜩이나 이제 몇 달만 있으면 프롤로그를 알리는 거대 신호탄이 슬슬 그 모습을 드러낼 텐데, 우리 귀여운 불가사리가 어디 처박혀서 몸집을 불리다가 진짜 폐쇄 구역 지정이라도 당하면… 그 나비 효과가 얼마나 크게 번질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또한 내버려둠으로 인해 생기는 악영향이 내가 이 백신을 뿌렸을 때의 반작용보다 클 것 같다면 무조건 시도하는 게 맞다.

         

         세상만사 아직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역효과만을 너무 걱정하면 아무 일도, 어떤 변화도 시작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지직, 파지직!!

         

         손바닥 안의 자그마한 공간이 순식간에 이계異界로 변모한다.

         전기 폭풍이 휘몰아치는… 한 개인의 변덕에 따라 날씨와 사물이 뒤바뀌는 가혹한 아공간(Subspace).

         

         내 능력의 결과물이 공식적으로 선보여지는 최초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의식이 빨려 들어간다.

         

         절대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말씀이다. 단순히 기념비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중 삼중으로 분석 당하지 않게 심혈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이라는 소리지.

         

         영원히 숨어 살 생각도 아니었으니까, 극소수만이 추적할 수 있는 흔적을 남기면서 크레딧 벌이까지 챙기기엔 이만한 기회나 여건이 없기도 하고.

         

         – 신뢰성에 문제가 있는 하위 분포는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은 약 4.7만여 종의 정보 바이러스와 거기서 파생된 아류작을 검열할 수 있는 탐지 엔진을 보유했다 사료됩니다. –

         

         ‘…그럼 어디.’

         

         프로그램이란 것도 결국엔 명령문 집합체.

         자기들끼리 유기적으로 결속하는 건 어떻게 되어 먹었는지 모를 머리가 알아서 해주니, 나는 속을 채워 넣는 재료를 엄선하는 데에만 집중하면 된다.

         

         으으음… 대충 두 배 해서 십만 개쯤 걸러낼 수 있게 짜면 되나?

         

         왜, 그 원래 21세기에서도 지나치게 강력한 성능으로 온갖 잡다한 실행 파일을 다 막아버려서 일반 유저들은 외면하던 타입의 백신이 있으니까.

         

         설계도의 초안은 견고한 요새. 마침 탐지와 검열이라 하면 딱 연상되는 기억을 되새긴지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참고하기도 쉬웠다.

         

         음, 맞다. 하베스트 플래닛 외곽 전체를 빙 둘러 감싸고 있던 파라다이스의 대형 장벽과 관문들이다.

         

         대신 안에 배치된 병사는 어쭙잖은 전투력을 가진 경찰이나 기동대가 아니라 고지식함 Max를 자랑하던 FM 헬레나를 가득 채운다는 느낌으로다가.

         

         이 타이쿤에는 예산 제한도 딱히 없고, 노는데 소모되는 거라곤 오직 내 칼로리와 정신력밖에 없으니까 파일 변조를 막는 실시간 감시 기능도 구현할 겸 자동 포탑이나 카메라도 가득가득 배치한다는 감각으로 거침없이 추가하자.

         

         – 아샤님, 순수 탐지율이 두 배 이상이라면 실성능은……… 아닙니다. 편하신 대로 계속하시지요. 다음은 네트워크 보안 및 시스템 보안 기능과 자동 업데이트 기능의 유무가 남았습니다. –

         

         ‘응? …그래, 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일단 끝까지 해버리는 걸 난 선호하는 편이거늘.

         세부적인 능력을 추가하고 정돈하는 와중에 무슨 충고를 하려던 제로가 혼자서 입을 닫아버렸다.

         

         얘는 나를 상대론 가끔 너무 사양해서 문제다. 내 의견에 토를 다는 게 죄라는 되는 것 마냥.

         ……정작 가만있었으면 좋을 순간엔 소신대로 움직이면서!

         

         칙, 지직…!

         

         네트워크 보안은…. 아, 방화벽이나 VPN(Virtual Private Network; 가상 사설망) 같은 거? 그건 또 내 전문분야구만. 그럼 정말 기가 막힌 녀석으로 장착해줄 수 있지.

         시스템 보안은 파일 접근 기록이나 권한 제어, 프로그램이 연결된 매체 통제? 이것도 완전 내 주특기잖아? 사실 난 해커보다 이쪽이 더 적성에 맞는 게 아닐까?

         

         자동 혹은 수동 업데이트는… 이걸 내가 어떻게 다 챙겨!? 제로야, 네가 대신 관리하자 그냥.

         

         – 알겠습니다. 중추 시스템 접속용 식별 코드, 지금 부여받았습니다. –

         

         그나저나 이 참에 확, 본격적으로 의문의 보안 전문가로 활동할 계정도 만들어버려? 어차피 이 분야 애들은 찔리는 게 많아서인지 다중 분신술이 기본이던데.

         

         철컥.

         

         하여간 가상의 성벽이 점차 높게 쌓아 올려진다.

         보편적인 기능이라는 말에 따라 착실하게, 신뢰감을 줄 수 있도록 디테일에도 신경 쓰며 데이터 정원을 만지작거리고… 가꾸고 있는 게 어딘가 즐거워졌으니.

         

         집중을 흐트러트리면 무한한 코드들이 모래 알갱이처럼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정말 샌드 박스라는 단어가 딱 알맞게 느껴졌다.

         

         내부는 알차게 채웠으니 다음은 외형.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때려 죽여도. 소비자가 프로그램 구조를 함부로 엿볼 수 없도록 코드 밀봉에 전력을 쏟은 만큼 사용에 불편함이 없도록 메뉴와 커스텀 가능한 항목을 무지막지하게 늘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부분은 당장 떠오르는 상상력으로 메꾸기엔 한계가 느껴져서 사이버웨어가 품은 자유도를 그대로 때려 박았다.

         

         이 OS를 개발한 업체가 어딘지는 애매해도 쩨쩨하게 몇 백 년은 써먹었을 메뉴 이름이나 종류 가지고 저작권 소송을 걸진 않겠지 설마.

         

         쿠구구궁….

         

         구성하는 수식과 코드가 비쳐 보이던 반투명한 요새에 파도가 몰아친다.

         

         표면이 일렁거리자 빛 한줄기 통과하지 못할 것 같은 칠흑의 색채로 모든 물건들이 통일감 띠며 연약한 속살을 감추었고.

         

         비장의 한수로 써먹을 다양한 방법이 뇌리에 떠올랐다가 수면 아래로 잔잔하게 가라앉아 표층 심리를 덧씌웠다.

         

         이 정도면 때깔과 완성도는 얼추 챙겼으니, 가장 중요한 마무리 작업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다름이 아니라 아군 오사를 방지하기 위한 전략적 샛길, 만약의 비상 사태를 대비해 나와 제로를 비롯해 진짜 지극히 일부만 이용할 수 있는 뒷문(Backdoor)이 되시겠다.

         

         단, 우리 이외에는 인식하기조차 어렵게 꽁꽁 숨긴 녀석으로. 또 열악한 상황을 대비해 여러 종류로 다양성까지 챙겨서.

         

         올바른 열쇠 없이는 감히 접근하기도 겁날 정도로 깊고 복잡한 미로 같은 구멍을 냅다 파버렸다.

         

         어허…! 거기, 방금 나보고 비열하다고 뒷말 한 사람 당장 여기로 출두하십쇼.

         

         아니, 꼭 나쁜 의미로만 넣는 게 아니라 상품이 고장 나면 수리를 해야 하잖아요? 들락날락하기 번거로우면 AS도 힘드니까. 응, 그냥 그렇다고.

         

         내가 무슨 유명세에 환장한 예술가나 테러리스트도 아니니 작품에 특별한 서명을 남길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안전 장치는 확실하게 걸어 놔야지. 뭣 때문에 여태 이 난리를 피웠는데.

         

         

         “후…… 좋아. 미안, 오래 기다렸어? 여기 백신 소프트웨어야.”

         

         “날 놀리듯이 눈을 감고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걸 지켜보는 것도 아가씨가 말하는 ‘기다림’에 포함된다면 이십 초는 족히 넘었지. 거 장난치지 말고 얼른 좀 줘 보게나!”

         

         연극조로 떠보듯이 건넨 말에 날카로운 대답이 되돌아왔다.

         

         아무래도 슬슬 물리 치료의 효험마저 상쇄할 정도로 짜증이 올라왔는지 가시 돋친 반응을 돌려주는 난쟁이 사장님에게 웃으면서 데이터 칩을 넘겨주고… 또 한 개를 새로이 받았다.

         

         두 종류가 있다고 은근히 물어봤으니 아마 여기엔 치료제를 담아달라는 것이리라.

         

         그나마 치료제는 담을 명령이 간단명료해서 다행이다. 불과 이삼십 초 내로 무결한 가상의 요새를 짓는 건 꽤 고된 중노동이었으니까.

         

         “잘 부탁해~….”

         

         어우씨, 진짜 피곤해 죽겠네. 중간부터 재밌어져서 조금 오버했을지도?

         하지만 나름 궁금한 전문 평가사 헤멧 씨의 평을 듣지도 않은 채 늘어지기엔 아직 이르다.

         

         퍼뜩. 조금만 정신차리고 집중하도록 하자.

         

         어차피 자택 근무가 기본 스탠스인 거, 여기서의 용무가 끝나는 대로 바로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서 빈둥거리며 일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으니까.

         

         ……잔소리할 로봇은 하나 있을 수도 있는데 아무튼.

         

         “헌데, 어느 팀에서 개발했다거나… 이런 걸 꼬치꼬치 캐묻는 게 예의가 없는 행동인 건 잘 아네만. 대체 마지막으로 프로그램에 손댄 게 누구길래 파일 이름을 ‘밖에돌아다니기귀찮은데빨리집에가고싶다0622’로 지어 놨나…? 자네가 팀장인지는 모르겠는데, 너무 부하 직원들을 험하게 굴린 건 아닌감?”

         

         “…크흠!!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혹사당한 건 한 명밖에 없어요.”

         

         “뭐… 가져온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프로그램 명칭은 뭔가? UI 디자인이 굉장히 세련되고 깔끔한 건 좋은데 어떻게 그 흔한 로고나 소개 문구조차 없지 않나.”

         

         사무실 컴퓨터로 칩을 열람한 그가 가한 지적에, 고런 부끄러운 건 묻지 말라는 의미로 노골적인 헛기침을 한 번 해주었다.

         

         필터를 거치지 않은 나른한 무의식이 그만 약간의 실수를.

         단시간 안에 최대의 완성도를 챙기는 것만 생각했지, 정작 이름 지어주는 걸 까먹다니.

         

         코드 네임이니 별명이니 지어 부르는 걸 좋아하는 감성을 제하더라도 팔아먹을 상품을 부를 명칭이 없는 건 이상하다.

         

         당장 떠오르는 건… 역시 방패라 하면 명망 높은 그 녀석이 아닐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지스(Aegis). 누가 들어도 든든한 느낌이 들면서 이목을 사로잡는 단어엔 이런 게 최고….

         

         – 아샤님, 상념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현존하는 안티바이러스 소프트웨어 중에 이미 동일한 고유 명사를 사용하는 제품이 있습니다. –

         

         “…….”

         

         이런 망할. 그럼… 프리드웬(Prydwen; 아서 왕의 순백 방패), 이건 어때? 설마 이것도 이미 있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제로에게 미묘한 감사를 담은 눈짓을 보냈지만.

         갑자기 단번에 작명하기가 단번에 귀찮아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고맙다 정말 이 낭만 넘치는 선구자들아. 늦게 태어나서 활동하는 게 죄지 아주.

         

         그래도 잠시 동안 입을 뻐끔거리며 고민하다가, 대충 떠오른 그럴싸한 말장난을 원래부터 정해져 있던 기정 사실처럼 내뱉는데 나는 가까스로 성공했다.

         

         “…명칭은 그라운드 제로 -제로의 영역-. 현존하는 안티바이러스 소프트웨어보다 아마 못해도 두 배는 강력할 거야. 객관적인 평가 기대하고 있을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네트워크 요새 분양 개시. 입주민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씨익)

    익명을 희망하시는 독자님의 200코인 후원! 너무 감사드립니다!
    동전을 넣으면 다음 편이 나온다는 나폴리탄 괴담의 출처는 대체 어디일까요. 제네바 인권 협약에서 사실 글쟁이는 제외당한 게 아닐까요? 열심히 노력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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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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