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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46

     

    3년 만에 깨어나니 밀려있는 일이 산더미였다.

     

    병원은 그간 휴고가 대리로 운영하고 있었다. 어찌저찌 현상유지는 됐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이 밀려있어서 대량의 결재를 해야 했다.

     

    “어떻게 자금 순환은 괜찮네?”

     

    “황녀님께서 자문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아셀라가 월광궁을 운영하던 경험을 살려서 직접 장부를 관리해줬다. 덕분에 내 부재 동안 횡령 같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던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라스, 그동안 가짜 약을 만들던 나쁜 놈들을 더 찾았어. 아셀라와 함께 곤죽으로 만들어줬지, 하하하!”

     

    기슈타가 신이 나서는 그간 있었던 모험담을 들려줬다. 둘은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천둥족은 내 귀환을 축하하며 며칠이고 축제를 연다고 했다.

     

    “개발해서 유통에 들어간 신약 리스트는 이렇게 돼요. 검증 실험은 황녀님이 도와주셨어요. 연금술사들을 충원했어도 조금 걱정이 됐는데, 안심했지 뭐에요.”

     

    네리아는 제약공장을 두 배는 키워놨다. 신약이 발매할 때마다 히트를 쳤다.

    아셀라가 그새 연금술도 연구를 했구나. 못 하는 게 없는 황녀님이다.

     

    “후국과 수교 중인 국가와 귀족가 명단입니다. 그 뒤는 그간 있었던 마물, 도적단 등 전투 기록이고요.”

     

    외교와 국방은 타냐가 관리했다.

    그녀는 용사 파티로서의 공을 제국에 남기고서 후국으로 돌아왔고 이전처럼 기사단장을 맡아주고 있었다.

     

    “외교 자리에 대표로 누가 나갔는지는 안 물어봐도 되겠네.”

     

    타냐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급한 일들을 처리하고 간단한 건강검진도 마친 후, 나는 시버스를 시켜 짐을 모두 들고 이동했다.

     

    지금은 후작가 저택의 동관, 본래 손님용으로 지어진 그 건물의 3층을 통째로 쓰고 있다.

     

    시녀에게 알리니 그녀가 곧 문밖으로 나왔다.

     

    “라스? 아직 병원에 있을 시간 아니야?”

     

    아셀라는 내가 찾아올 줄 몰랐나 보다.

    곧 밤을 준비할 예정이었는지 나이트 드레스로 갈아입고 머리를 고풍스럽게 틀어 올린 모습이었다.

     

    “병원은 답답해서요. 입원해있는 것보다 스스로 치료하는 게 빠르기도 하고요.”

     

    “어, 그럼…”

     

    “어차피 방을 옮길 예정이었으니 지금도 상관없죠?”

     

    부지런히 내 짐을 나르는 시종들을 보고 아셀라가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내 시선을 피하고는 귀를 빨갛게 물들인다.

     

    귀엽네.

     

    “…차라도 마실래?”

     

    “제가 내려드릴게요.”

     

    우리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마주했다. 말없이 따뜻한 홍차를 홀짝이고 있으니 시종들이 일을 마쳤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시버스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는 부드럽게 문을 닫았다.

     

    어느새 어둑어둑한 방에는 촛불과 우리 둘만 남아 있었다.

     

    시버스가 나가기 전에 레이스 달린 침대에 장미꽃도 뿌려놨다. 기분 좋은 향수 냄새도 나고, 원래 이 방에 이렇게 꽃이 많이 있었나? 손이 빠르네.

     

     

    내가 아셀라에게 말했다.

     

    “후국 여기저기를 다녀왔어요.”

     

    “응.”

     

    “어딜 가도 황녀님의 흔적이 묻어있더라고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셀라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제가 없는 동안 자리를 맡아줘서.”

     

    “그야… 당연하잖니. 네가 지금껏 이뤄온 소중한 땅이니까. 망가지면 얼마나 슬프겠어.”

     

    아셀라는 당연하다고 했지만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었겠지.

     

    그녀가 여기서 후국을 관리해줬다는 건, 반대로 월광궁은 완전히 관리에서 벗어났다는 의미기도 했다.

     

    나를 위해서 아셀라는 황제의 길을 포기한 것이다.

     

    그렇게나 원했던, 그녀가 평생 바라던 꿈을.

     

    대가를 떠나서, 나도 그만큼 그녀에게 보답해주고 싶었다.

     

    “황녀님을 위해 새 활력 포션을 하나 제조해 왔는데요. 비타민도 섞어서.”

     

    나는 품에서 자그마한 플라스크를 하나 꺼냈다. 손가락 두 마디가 채 안 된다.

     

    안에서는 계속해서 색조가 변화하는, 마치 무지개를 따다 담아놓은 듯한 환상적인 액체가 찰랑거린다.

     

    “마셔보실래요? 시제품이라 어떤 맛인지도 알려주시면 좋겠고요.”

     

    아셀라가 내게서 포션을 건네받았다. 일렁이는 촛불에 슬쩍 비춰보고는 그녀가 눈을 일자로 찢었다.

     

    “라스, 네가 어떤 남자인지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되는구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모처럼 온화해진 내가 꼭 옛날처럼 화를 내야 정신을 차리겠니?”

     

    아셀라의 목소리는 싸늘해져 가시가 박혀있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음, 원래 그녀는 이런 사람이었지.

     

    잠깐 잊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니?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기로 했죠. 예, 엘릭서입니다.”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역시 아셀라다. 내 생각을 꿰뚫는 건 참 누구보다도 빨랐다.

     

    3년 동안 제약 공장의 약품이 세상에 퍼진 덕에 경험치 보너스를 더 받았다. 엘릭서의 제조를 한 시간 만에 마칠 수 있었기에 바로 만들어서 아셀라에게 달려온 참이었다.

     

    모르는 척 먹이는 작전은 실패했다.

     

    “라스, 솔직히 말해 봐. 오늘 검진도 있었고, 네 실력이라면 목숨이 얼마나 남았는지 얼추 파악했을 거 아니야.”

     

    “후우.”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스스로 진단은 끝낸 상태였다.

     

    그것도 꽤 정확하게.

     

    “1년하고도 3개월 정도일까요.”

     

    아셀라의 움직임이 그 자리에 굳었다.

     

    “쉽게 말하자면 체력이 회복될 수 있는 한계치가 있는데, 그 한계치의 숫자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40에서 30, 30에서 20. 0이 되면 죽겠죠. 올리는 속도보다 내려가는 속도가 더 빨라졌어요. 계산했을 때 그 기간입니다.”

     

    내 말을 들은 아셀라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치료법은?”

     

    “엘릭서 뿐이에요.”

     

    원인 불명, 치료 불가능.

     

    엘릭서의 ‘불로장생’ 버프로 디버프가 효과를 발하지 못하게 덮어씌우는 수밖에 없다.

     

    아셀라가 내게 엘릭서 병을 내밀었다.

     

    “역시 네가 마셔. 그리고… 나를 치료할 방법을 찾아.”

     

    “황녀님.”

     

    나는 아셀라의 손을 잡았다.

     

    “어쩌면 저희는 똑같은 수단을 사용하고 있던 걸지도 몰라요. 황녀님의 증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 더더욱 네가 마셔야 해. 네가 살아남는 게 이치에 맞아.”

     

    “황녀님이 보신 미래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라면 이치에 맞지 않아요. 그건 이미 없었던 일입니다. 저희가 여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건 함께 노력했기 때문이에요.”

     

    “정말 너는 내 말을 안 듣는구나.”

     

    “언제는 들었나요.”

     

    “맞아. 항상 안 들었지. 항상 네가 옳았고.”

     

    아셀라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화아악!!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의 손에서 마법진이 그려졌다.

     

    “황녀님!”

     

    “용서해, 라스.”

     

    뫼비우스의 띠 마냥 끝이 없는 기묘한 삼각뿔처럼 구축되는 세 개의 진. 그곳에서 발동한 마법이 순식간에 나를 덮치고, 나는 온몸이 마비되며 바닥에 쓰러졌다.

     

    “페럴라이즈. 대상을 마비시키는 공격마법이야. 위력은 약하게 했어. 부상은 없을 거야.”

     

    마비된 몸이 반응하지 않아 손끝 하나 꼼짝할 수 없다. 나는 바닥에 누운 채로 아셀라가 엘릭서의 뚜껑을 여는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살아줘, 라스. 혹시나 내 목숨이 내일까지더라도.”

     

    또르르, 그녀가 무릎을 꿇고는 내 입에 엘릭서를 조심스레 흘려 넣었다.

     

    모든 액체가 내 입에 들어온 순간.

     

    ―홰액!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방비한 아셀라를 반대로 덮치며 바닥에 넘어뜨렸다.

     

    “뭐…?! 어떻게!”

     

    당황하는 그녀의 양팔을 잡아 누른다.

    아무리 병상에 오래 누워있었다 한들 남자와 여자의 근력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아셀라는 저항하며 빠져나가려 버둥거렸지만 내 밑에 깔려 꼼짝하지 못했다.

     

    “읍―”

     

    나는 그런 아셀라에게 난폭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술을 맞춘다.

     

    그녀는 눈을 꽉 감은 채 입을 벌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혀로 살살 파고드니 결국 틈새로 침입을 허용하고 말았다.

     

    서로 마주친 입을 통해 세상의 신비가 흘러 들어간다.

     

    어차피 내게 엘릭서를 돌려줄 방법도 없고, 뱉어낸다 한들 두 번 다시 만들 수도 없는 신비를 낭비하는 일이라고 잘 알고 있는 아셀라다.

     

    진퇴양난이라고 이해했겠지.

     

    결국 그녀는 꼴깍, 입안에 들어온 액체를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

     

    “하아, 하아―”

     

    그리고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내게 소리를 빽 질렀다.

     

    “야!!”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 안 하면 안 드셨을 거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네가 마시라고 했잖아!”

     

    “방법을 찾아본다니까요. 그렇게 제가 못 미더우세요?”

     

    “그건,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떻게 내 마법을 맞고도 움직인 거야!”

     

    “그렇게 나오실 줄 알고 미리 마비 해독제를 주사하고 왔죠.”

     

    나는 옷깃을 내려 주사 자국이 남은 목덜미를 보여주었다. 아셀라가 한숨을 쉬었다.

     

    “미치겠네… 그럼 어떻게 됐어? 라스, 너는 그대로고 내가 불로장생이 된 거야?”

     

    “아마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디…”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정신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

    · 위대한 업적!

    · [엘릭서]를 사용했습니다!

    · [궁극의 연금술사] 업적을 획득했습니다!

     

    · 알림 : 엘릭서를 절반만 섭취하였습니다.

    · 버프 [불로]의 지속시간이 [영원]에서 [300년]으로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 버프 [장생]의 지속시간이 [1000년]에서 [300년]으로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 알림 : 엘릭서를 동시에 섭취한 대상이 존재합니다. 대상에게 동일 버프의 효과가 발생합니다.

    ―――――――――――

     

     

    “흠.”

     

    아무래도 아셀라와 키스하면서 내 목구멍으로도 넘어온 모양인데.

     

    “왜, 어떻게 됐는데?”

     

    “안 좋은 소식이에요, 황녀님.”

     

    “뭔데, 무슨 일이야.”

     

    아셀라가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그렁그렁했다.

     

    “저희, 앞으로 300년밖에 못 살 것 같아요.”

     

    내 말에 아셀라가 벙찐 얼굴이 됐다.

     

    “…300년?”

     

    “네. 원래 엘릭서를 마시면 천 년을 살 수 있었는데 말이죠. 유감입니다.”

     

    “…둘이 같이?”

     

    “네. 저희 둘 다요.”

     

    “하.”

     

    맥이 탁 풀렸는지 아셀라의 눈에서 또르르,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건 나도 처음 보는 장면이라 깜짝 놀랐다.

     

    그 아셀라가… 운다고?

     

    “황녀님.”

     

    “아니, 나, 정말 네가 죽어버릴 줄 알았어. 깜짝 놀라서, 또 나 때문에 잘못되어버린 줄 알고 그만…”

     

    “죄송해요. 제가 좀 지나쳤네요.”

     

    아셀라가 코를 훌쩍이고는 빨개진 눈으로 나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어디다가 말하면 죽어.”

     

    “에이, 설마요.”

     

    “…놓아주기나 해.”

     

    그제야 나는 아직도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

     

    굳이 그래야 할까?

     

    “우는 얼굴도 이쁘신데요. 조금 더 보고 싶은데.”

     

    “아 진짜아! 괜히 살려줬나 봐!”

     

    “농담이에요, 농담.”

     

    나는 아셀라를 품에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게 코알라처럼 달라붙은 그녀는 꼭 평생 떨어지지 않을 기색이었다.

     

    “침대로 갈래.”

     

    “모셔드려야죠.”

     

    마치 어릴 때처럼 돌아간 것 같은 아셀라를 안고 함께 침대로 쓰러진 후,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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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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