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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47

       버멜이 세운 계획은 프레이가 생각했던 것과 큰 틀에서 다르지 않았다.

         

       “용서를 빌고 이해를 구한다.”

       “흐음.”

       “다만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이서 진정성을 보여야겠지.”

       “실현 가능성은 있는 거냐?”

       “있으니까 하는 거지.”

       

       확신을 담아 말하는 버멜 호르데의 눈동자에는 용렬(勇烈)한 기운이 느껴졌다.

       

       탁. 

       

       술잔을 비운 아카샤가 언성을 낮추어 말했다.

       

       “틸레트에서 있었던 일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어. 너도 알지?”

       “알아.”

       “에테르는 한 번 마음 먹으면 잘 바꾸지 않아.”

         

       쌍둥이의 마음은 쌍둥이가 가장 잘 안다.

       

       에테르가 아니라 자신이 인간에게 1천 번 뒤통수를 맞았어도 백야를 완성해서 세계를 파멸하는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흐으, 한 잔 더.”

       

       아카샤는 잔을 들며 재촉했다. 곧 쪼르르, 하는 청량한 소리와 함께 잔이 채워졌다.

       

       지금 두 사람은 학교 바깥에 나와있었다.

         

       아카데미 내부에선 술을 마실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술 없이 진솔한 대화를 나누자니 마수와 엘프 사이인지라 여간 껄끄러운 일이었다.

         

       때문에 포장마차 비스름한 곳에서 앞뒤로 둘러앉으며 양주를 깠다. 도수가 40에 근접한 독주였다.

         

       둘 다 술을 잘 마시지는 못했지만, 이거라도 깐 덕분에 말을 주고받는 것이 보다 부드러워졌다.

         

       쪼르르, 탁.

         

       “…해서, 얼마나 많은 연놈이 울 언니에게 빌어야 일이 해결되는데?”

         

       버멜은 잠시 침음을 흘리더니 손가락을 펼쳤다.

         

       “세 명.”

       “뭐?”

         

       겨우 세 명?

         

       “그 정도면 충분해.”

       “흐음.”

         

       아카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수라는 걸 밝히더라도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존재 세 명이라.

         

       그거야 쉽다. 아카샤는 킥킥 웃으며 떠오르는 인물 셋을 입에 담았다.

         

       “나, 로즈마리, 그 요호족 계집이면 충분하겠군.”

          

       프레이야 요르문간드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통과. 자신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로즈마리도 가족처럼 지내는 아이이니 통과다.

         

       “이렇게 세 명이면 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럼 누구?”

       “조건이 있어.”

       

       자신이 마수라는 것을 안 뒤로도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이해해 줄 존재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프레이는 통과였지만, 아카샤나 로즈마리는 적당한 인물이 아니었다. 프레이와는 달리 둘은 처음부터 에테르가 마수인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버멜도 그 세 명에 들어갈 수 없었다.

       

       “왜?”

       “에테르가 그렇게 되기 전부터 이미 마수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카샤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거짓말도 참 다채롭게 하네.”

       “난 진심이야.”

         

       버멜은 에테르가 마왕군 소속이라는 것을 그녀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부터 경계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아카샤는 여전히 고개를 까딱였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혹시 오늘 에테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끼지 않았어?”

         

       버멜이 화제를 전환했다.

         

       “으응, 느꼈지. 영혼이 바뀐 것처럼 행동하던데.”

       “실제로 바뀐 게 맞아.”

       “역시.”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나랑 에테르는 쌍둥이인데 그 정도쯤이야.”

         

       그래, 그렇구나.

       

       여기까지 알고 있었다면 이야기는 쉽게 진행된다.

       

       “내가 에테르와 친분을 다질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대강 알고는 있는데.”

       “좋아.”

       

       이제 대부분의 정황을 털어놓을 수 있다.

       

       버멜이 에테르와 친분을 다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인격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에테르는 내 동향 사람이기도 해.”

       

       이 세상에 떨어지고 난 이후 20년을 혼자 살다가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이었다. 우리의 결의를 외칠 줄 아는 남정네였지만, 그래서 편했다. 더욱 동질감을 느꼈으니까. 열애설이 돌았을 때 필사적으로 부정했으면서도 에테르를 놓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버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면서도 푸념을 이어갔다.

       

       혼곤한 와중에도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마왕을 쓰러뜨리고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이방인인데.

       

       이런 곳에 머물러서 행복할 수 있을까?

       

       차라리 원래 세상에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

         

       이야기를 들은 아카샤는 무언으로 대꾸했다.

         

       한동안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이대로라면 대화가 더는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러니까 난 안 돼. ‘에테르’에게 사과해도 욕만 뒤지게 먹고 끝날 거야.”

       

       두 사람은 본론으로 돌아왔다.

       

       독주를 연달아 들이키느라 혀가 꼬인 아카샤도 정신을 다잡으며 물었다.

       

       “그러면 누구누구?”

       “두 명은 이미 정해졌어.”

       

       아카샤는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한 명은 프레이였고, 다른 한 명은 단짝처럼 붙어다니던 단발머리 인족 소녀겠지. 헤를라인이라는 강력한 후보가 하나 더 있다지만, 당장 여기로 달려오기엔 그녀에게 여유가 없었다.

       

       “어…. 그러면 나머지 하나는?”

       “그게 애매하지.”

         

       아카샤는 어이가 없어 킥킥 웃었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헤프게 지은 미소가 멈출 기미를 안 보였다.

         

       “못 찾으면 망하겠네.”

         

       이래서야 엉성한 계획에 불과하지 않은가.

         

       마음 같아선 들고 있는 술병으로 머리를 후려칠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두었다. 괜히 술판에서 기분 나빠질 필요는 없으니까.

         

       “뭐, 나머지는 임기응변으로 해야겠지.”

         

       아카샤는 남은 잔을 털어내고는 일어났다. 속이 살짝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에테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정신을 놓을 수는 없었다.

         

       슬슬 짐을 싸려던 참에, 버멜이 지나가듯 말했다.

         

       “사실 봐둔 친구가 한 명 있기는 한데…….”

         

       아카샤의 걸음이 뚝, 하고 멈췄다.

         

         

       **

         

         

       “…존경해요.”

         

       말했다.

         

       후회는 없다.

          

       “마수라고 들었지만, 그래서 적이지만…. 존경해요!”

       

       유피엘은 소신을 밝혔다.

       

       “왜 존경하지?”

       “금안족은 마력초 없인 마법을 못 쓴다고 하잖아요. 에테르라는 사람도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런데도 틸레트에 입학한 몇 달 동안 마도학의 경지에 올랐으니까요.”

       

       넌지시 얘기를 한 시점에서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 눈치를 보며 사느니 생각한 바를 확실히 전달하고 싶었다.

         

       “…….”

       

       예상대로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스테야 교수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조금 전에는 절멸급 마수도 벌벌 떨게 할 마법을 만들겠다면서, 지금은 마수를 존경한다고?”

       “네.”

       “말이 앞뒤가 안 맞는구나.”

       “적에게는 경의를 표하면 안 되나요?”

         

       금안족이라는 종족적 한계를 극복하고 최상급 마도를 구축했다는 것 자체는 우러러 볼 일이었다.

       

       마나 고갈증을 앓는 유피엘에게 에테르는 그야말로 영웅이었다.

       

        “마수는 반드시 섬멸해야 할 적이 아니니?”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플레어라는 연구결과 하나 때문에 의문이 생겼다.

       

       “플레어를 만든 게 이상하잖아요. 정말 에테르가 제국을 망치기 위해 잠입했던 거라면, 굳이 사람들 앞에서 플레어를 만들고 무료로 풀어줄 필요가 있었을까요?”

       “…….”

       “아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걸요.”

         

       유피엘의 눈동자가 바다 한가운데에 비친 물비늘처럼 반짝였다.

         

       “…예민한 시기에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구나.”

       “실망하셨나요?”

       “그래.”

       

       철렁,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개인 교습을 받게 된 첫날부터 담임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유피엘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의견을 밝힐 때부터 결의는 다지고 있었지만, 막상 실망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입에서 쓴맛이 났다.

       

       “…오늘은 여기서 끝이다.”

         

       역시, 내쫓기는구나.

         

       마수를 옹호해서, 결국 눈밖에 나 버렸구나.

         

       유피엘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책가방을 쌌다.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늘 가르쳐 주어서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박살이 난 분위기에 무어라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돌덩이처럼 무거운 가방을 둘러메고 나가려던 찰나였다.

         

       “유피엘.”

         

       등 뒤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도 아홉시에 오렴.”

         

       그 말에 고개를 홱 돌렸다.

         

       아주 잠깐, 금빛이 스쳐 지나갔던 것 같은데.

         

       유피엘은 어어, 하며 머뭇거렸다. 그 사이 아스테야 교수가 다가오며 연구실 문을 슬쩍 열어주었다.

         

       “제가 실망스럽다고…….”

       “실망스럽지.”

       “그런데 왜…….”

         

       물어보기가 겁났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물어보았다. 유피엘은 질문하는 것에 익숙했으니까.

         

       “선생이 학생 가르치는 데 이유가 있니.”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울컥, 하고 솟아올랐다.

         

       유피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안으로 말아넣었다.

       

       목이 바싹바싹 마르는데, 또 뜨겁게 차오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 드러내기 싫어서, 최대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

         

         

       타타탁!

         

       내려가는데 단화 소리가 경쾌했다.

       

       발걸음엔 그 사람의 정신상태가 담겨있다더니, 진짜였다. 프레이가 내려갔을 때와 유피엘이 내려갔을 때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후우.”

         

       제자를 기숙사로 돌려보내고 난 후.

         

       에테르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마력초를 물었다.

         

       마력초에는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담배 연기를 쐬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복잡하던 심상이 해무 걷히듯 사라지고, 그 안에는 평온만 남은 듯하였다.

         

       그래, 평온.

         

       평온.

         

       평온은 개뿔이.

         

       “씨발─!!”

         

       쾅!!

         

       에테르는 책상을 내리쳤다. 인정사정없는 압력에 데스크가 결을 따라 갈라졌다.

         

       그런데도 손은 아프거나 하지 않았다. 멍도, 피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곳이 쿡쿡 쑤셔댔다.

         

       “왜 이제와서……!”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

         

       유피엘을 이용해서 세계수에 접근해야 한다.

         

       바람의 로드스톤을 몰래 빼내서, 마왕을 부활시키고, 서로 싸우는 사이에, 흑주를 개발하면…….

         

       그러면…….

         

       [뭐가 남을까?]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남길 필요 없다.

         

       가식적인 친절도, 비수를 숨긴 호의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었던 건 오직 핵겨울 뿐이었는데.

         

       [벌써 투 스트라이크구나, 친구야. 한 번만 더 당하면 삼진이다.]

       “입 닥쳐.”

       [선수 교체할 준비나 해.]

       “……너.”

         

       이미 예견하고 있던 거지?

         

       [아니, 예견하지 못했어.]

         

       그런데 어떻게?

         

       [원래 심성이 그런 친구겠지.]

         

       모든 존재가 저리 착해빠진 건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악랄한 것도 아니지.]

         

       그러니까 그에 맞게 가면을 쓰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진솔하지 않을 수 있겠지. 하지만 사람은 처음엔 서로를 경계하는 법이다.

         

       그러다가 차차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공적인 자리에서 쓰고 있었던 가면을 벗게 된다. 때때로 진심을 전하고, 그 진심이 통하게 되면 아주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고.

         

       인간관계란 그런 법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유감스럽게도 저쪽 세상에선 선인을 거의 만나지 못해 가면을 벗을 일도 없었지만.

         

       에테르는, 나는 충분히 잘해주었다. 못해도 저번보단 훨씬 나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유피엘에게 내일 또 보자고 한 말 말이야. 가면은 그렇게 쓰는 거야. 싫어도 좋은 척, 혹은 좋아도 튕기는 척하는 거지.”

       […….]

         

       나는 흠결이 난 데스크를 어루만졌다.

         

       진짜 징하게도 부숴났구나.

         

       이걸 내일까지 어떻게 수리하나, 아니면 새로 사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에테르, 에테르야.”

         

       화악, 하고 술기운이 들어왔다. 나는 코를 찡그리며 양주 냄새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술에 절여진 아카샤가 휘청거리며 들어왔다.

         

       얘는 또 왜 이래.

         

       “뭐 하다 이제 들어와?”

       “아카샤 술 마셨어.”

       “이상한 소리 말고, 가서 드러누워.”

       “흐응, 흥.”

         

       아주 지랄났구나.

         

       내가 알기로 얘랑 나랑 신체조건이 똑같을 텐데.

         

       이 몸으로 10도짜리 술을 반 병 이상 못 버틴다. 그런데 냄새만 맡아보면 거의 40도짜리 독주였다.

         

       “자, 에테르.”

         

       아카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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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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