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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49

     

    “쯧.”

     

    나는 봇짐을 챙겨 들고 오두막을 나섰다.

    내 뒤에선 도적 친구들이 사이좋게 빨랫감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다, 당신 뭐야….”

     

    말라빠진 도적이 나를 향해 팔을 부들거렸다.

     

    “뭐냐니, 의사라니까.”

     

    “무슨 의사가 사람을 이렇게 패…”

     

    “그럼 도적떼를 내버려 두냐? 심지어 내 약품을 털려고 했는데. 그 약들이 갈 곳 못 가면 그만큼 다른 환자들이 위험할 거 아냐.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으…”

     

    “운 좋은 줄 알아. 나니까 이쯤에서 끝냈지, 다른 분에게 걸렸으면 너희 이미 이승 하직했어.”

     

    “라스.”

     

    “그래, 이 분.”

     

    어느새 아셀라가 내 앞에 나타나 있었다. 기슈타가 이끄는 수호대도 함께였다.

     

    “다친 덴 없어?”

     

    만나자마자 뺨을 만지며 내 상태를 확인한다.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돌려주었다.

     

    “예, 문제없습니다. 예복도 멀쩡하고요.”

     

    “걱정했어.”

     

    아셀라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급하게 뛰어나왔는지 머릿결도 흐트러져 있었다.

     

    “쟤들이니?”

     

    아셀라의 시선이 재릿, 도적들을 향했다. 최소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지렸다고 확신했다.

     

    “…잠깐. 저 분은.”

    “제, 제국의 황녀님 아니야?”

    “그럼 설마 우리가 납치한 사람이 그냥 의사가 아니라…”

    “맙소사.”

     

    그제야 도적들이 내가 누군지 깨닫고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귀인을 몰라뵀습니다!”

    “쇤네들이 무식해서 그만…!”

    “요, 용서해주십시오!”

     

    벌벌 떨며 싹싹 비는 도적들이었지만 아셀라의 반응은 냉정했다. 순식간에 마법진을 그려 얼음창을 꺼내려 하길래 부드럽게 저지했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감히 네게 손을 댔잖아. 용서 못 해.”

     

    “오두막 안에 제가 방금 치료한 환자가 있습니다. 저들이 죽으면 환자도 돌볼 사람이 없어 뒤따라 죽겠죠. 그건 좀 걸리네요. 그리고.”

     

    깍지를 끼고 몸을 가까이 붙인다. 아셀라가 수줍어하며 마법진을 거두었다.

     

    “예비 신부께서 피를 보셔야 되겠습니까. 오늘 일은 잊어버리시는 게 피부에도 좋지 않겠어요.”

     

    “네 말도 일리는 있는데… 그렇다고 내버려 둬?”

     

    “한 번쯤은 자비를 베푸는 날도 있는 법 아니겠어요.”

     

    내가 슬쩍 눈짓하니 도적들이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인사를 해왔다.

     

    “가, 감사합니다…! 동생은 책임지고 돌보면서 앞으로는 나쁜 짓 안 하고 살겠습니다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죄송했습니다!”

     

    아셀라도 알아줬는지 화를 거두었다. 사람 성격이 이렇게 변하기도 하네, 신기하긴 하다.

     

    “알았어. 라스 너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식 올릴 때까지 어디로 사라지지 말고.”

     

    “에이, 제가 사라지긴 어디로 사라져요. 설마 또 도망이라도 칠까 봐서요?”

     

    나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며 입술을 비죽 내미는 아셀라.

     

    “안 가요, 그런 걱정 마세요.”

     

    “몰라.”

     

    아셀라가 나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기슈타와 눈을 마주치며 뒤를 부탁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기세 좋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화답해왔다.

     

     

     

    ***

     

     

     

    해프닝이 있었지만 이후로 식 준비는 탈 없이 진행됐다.

     

    마침내 결혼식 당일,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긴장이 됐다.

     

    “후우.”

     

    “오늘 오라버니는 빛 그 자체네요. 눈부셔서 제대로 볼 수가 없어요.”

     

    네리아가 기뻐하며 내 정장 어깨를 툭툭 털어주었다.

     

    “이날이 올 줄이야. 솔직히 10년 전에는 상상도 못 한 모습이구나. 이제는 대륙에서 누구보다 많이 생명을 살리는 손이자 마왕까지 토벌한 영웅이라니. 축하한다는 말 말고는 해줄 게 없구나, 네가 자랑스럽다. 아들아.”

     

    아버지와는 조금은 어색한 포옹을 나누었다. 이제 예순이 다 되어가는 아버지의 머리에는 조금 새치가 늘어 있었다.

     

     

    아침 일찍 별장으로 이동해 몰려들기 시작한 하객과 인사를 나누었다. 며칠 전부터 후작가에 머물던 귀빈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이들도 있어 퍽 반가웠다.

     

    “축하하오, 고트베르크 원장.”

     

    “변함없이 건장하시군요.”

     

    팔켄하인은 손자들을 잔뜩 데리고 찾아왔다. 악수를 하니 여전히 손힘이 좋은 게 나보다 오래 살지도 모르겠다.

     

    “고트베르크군! 축복을 받으시게나!”

    “서, 선생니임!”

    “원장님, 축하드립니다.”

     

    내의원에서 몰려든 의사와 치유사들. 성녀에서 은퇴한 앰브로시아는 여전히 뿅뿅거렸고, 황제의 2주치의가 된 클로에는 좀 더 듬직해졌다.

     

    “고트베르크, 오랜만이다? 오래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더 훤칠해졌네. 걱정해서 손해 봤어.”

    “하하하! 후국인의 건강 걱정만큼 쓸데없는 일도 없지. 그런데, 어떤가 원장. 내게 좋은 사업거리가 있다네.”

     

    라우가와 게오르크는 각자 배우자를 데리고 왔다. 둘 다 여전히 황실에서 궁을 운영 중이라 한다.

    게오르크는 내가 쓰러진 동안 즉위한 황제의 특사로 사면되었단다. 하여간 운은 억세게 좋은 남자다.

     

    “고트베르크.”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폐하.”

     

    예절을 갖추어 그녀를 접대한다.

    헤이케 폰 뷔르템펠트. 제국의 13대 황제다.

     

    “다음부터 결혼식 날짜는 최소 6개월 전에 알려주게나. 짐도 일정이란 게 있으니 말일세. 미처 혼수를 준비하지 못했다만, 영지가 필요하면 제공하도록 하겠네.”

     

    “하하, 다음 결혼식 같은 건 없을 예정입니다. 황녀님께서 길길이 날뛰실걸요.”

     

    “그도 그렇겠군. 그 짐의 여동생은 본 식이 되어야 모습을 볼 수 있는 모양이지.”

     

    “예. 예로부터 극비로 다루어져야 할 기밀이 두 가지 있다면, 군부대의 병참 창고 위치와 식전 신부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일세. 기대가 되는군. 축하하네.”

     

    헤이케가 친위대와 함께 자리로 향했다. 그녀의 옆에 자리한 옛 월광궁 기사단장이 나와 눈이 맞자 인사를 보냈다.

     

    “어머, 원장 선생님!”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함께 내 앞에 나타난 영애 무리. 프레다 공녀와 페르시야 왕녀를 포함한 귀족가의 아가씨들이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아이참, 언제 가시나 했는데 결국 이날이 오네요. 저는 하도 오래 걸리길래 기회가 있는 줄 알았지 뭐에요. 진즉 편지에 답장 좀 주시지.”

     

    “편지요?”

     

    “네. 선생님께서 아프시다고 들어서 매달 보냈는데 못 받으셨어요? 왕녀님도 보내셨죠?”

     

    “아, 그게…”

     

    “저희도 다 혼기 찬 처녀들인데 좋은 남자 소개 좀 해주세요. 아니면 첩으로 맞아주시든가요. 어차피 나중에 후작 각하 되실 몸인데 열 명 정도는 들이셔도 되잖아요. 그쵸, 왕녀님?”

     

    “그게, 저는…”

     

    그때 상태창에 반응이 있었다.

     

     

    [No. 077 질투의 화신 1% → 12%]

     

     

    흠….

     

    “하하. 여기 모이신 영애님들 어느 분 하나 빼어난 미모와 총명함을 지니신, 역사에 획을 그을 인재이시지요. 겨우 한 가문의 첩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꺄르르, 영애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말도 얄밉게 해. 황녀님은 좋겠네, 매일 선생님이 저렇게 사랑을 속삭여줄 거 아니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No. 077 질투의 화신 12% → 1%]

     

     

    대체 어디서 지켜보고 있는 걸까.

     

    역시 아셀라야.

     

     

    속속들이 하객들이 도착한다. 발렌을 포함한 엘프 경비대, 비서장 누님을 선두로 현 월광궁, 은퇴한 알베리치, 제국의 귀족들과 왕국의 장군, 그리고 우리 후국의 수호대, 연금술사, 의사들.

     

    제일 앞에는 네리아와 아버지, 기슈타가 앉는다.

     

     

    시간이 되어 준비한다. 사회를 맡은 휴고가 주의를 끄니 하객들이 조용해진다.

     

    “신랑 입장.”

     

    ―쾅 콰광!

     

    수호대가 힘찬 음악을 연주한다. 나는 당당하게 붉은 카펫을 밟으며 걸어나갔다.

     

    쏟아지는 박수갈채.

     

    날씨는 좋다. 어느 때보다도 화창한 햇빛이 세로토닌을 합성해 기분이 다운될 틈이 없다.

     

    나는 주례 앞에 섰다.

     

    웃기게 생긴 까마귀 가면, 내 은사인 닥터 파우스트다.

    물론 재밌으라고 해놓은 장치일 뿐이다. 안에는 브루노가 들어있다.

     

    “신부 입장.”

     

    곡조가 유려하면서도 아름답게 변하고.

     

    마침내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풍성한 순백의 드레스다.

     

    한 번도 그녀가 흰 드레스를 입은 건 본 적이 없었기에 상당히 신선했다.

     

    아마 오늘이 아니면 평생 볼 일이 없겠지.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 앞으로 평생 내 아내가 될, 제국의 황녀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희대의 마법사이자 악녀가.

     

    사뿐사뿐. 도도하며, 우아하게.

     

    한쪽 손은 타냐에게 건넨 채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수하게 폭력적인 아름다움에 눈을 빼앗겼다고 착각하기도 잠시, 어느새 내 앞에 도착해있다.

     

    주례의 언사는 없다. 오직 우리 둘이서만 진행하는 의식이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반지를 교환한 후, 미사어구 없이 가장 필요한 한 마디만을 전했다.

     

    “사랑해, 라스 고트베르크.”

     

    “사랑합니다,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

     

    그 이상의 말은 우리에게는 필요 없기에.

     

    필요 없단 걸 알기에.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는다.

     

    약속의 키스를 나눈다.

     

    “오우―”

    “황녀님 좀 봐!”

     

    아니, 혀를 넣자고는 안 했는데.

    안 했지, 분명?

     

    객석에서 꺅꺅대는 영애들의 비명이나 박수는 들리지도 않는지 자신만의 세상에 들어가 버린 아셀라.

     

    에라 모르겠다, 나도 그녀의 허리를 잡아 꺾어 응대했다.

     

    “와우!”

    “그래, 저게 남자지!”

     

    얼굴을 떨어트리니 아셀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훑었다.

     

    내 뺨을 쓰다듬으며 유혹하는 눈빛을 보내온다.

     

    탁, 파우스트가 성서를 접는다.

     

    “두 사람이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휴고의 선언과 함께 나는 허리를 일으켰다. 어느 때보다도 우레같은 함성과 박수가 터졌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퇴장했다.

     

     

     

    ***

     

     

     

    “그 키스는 깜짝 놀랐다니까요. 입술만 맞추기로 약속했었잖아요. 계획대로 안 되면 혼내신다면서요.”

     

    그날 밤, 피로연을 마치고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간 둘 다 바쁘게 고생했으니 오늘은 푹 쉬자는 계획이었다.

     

    “네 순발력을 보고 싶었지. 후후, 당황한 게 혀놀림에서 보이더라.”

     

    탈의용 커튼 뒤에서 화장을 정리하며 아셀라가 대답했다.

     

    “뭐, 재미있었어요. 평생 기억에 남겠네요.”

     

    “그럼.”

     

    나는 침대 옆 나이트 테이블에 잔을 두 개 준비했다. 어울리지 않게 와인을 따라본다. 특별한 날이니 어떨까 싶었다.

     

    “황녀님, 와인 좋아하시죠?”

     

    “아니? 마셔본 적 없어.”

     

    “어라, 진짜요?”

     

    황제는 와인을 늘 입에 달고 살았었는데.

     

    “분명 좋아하실걸요. 이리 오셔서 같이 마셔 봐요.”

     

    “정말? 그래, 네가 그리 말한다면.”

     

    드르륵.

    아셀라가 커튼을 치고 나타났다.

     

    “…오우.”

     

    나는 잠깐 할 말을 잊었다.

     

    얇은 네글리제 밑으로 아셀라의 피부가 슬그머니 비친다.

     

    살랑, 살랑. 달리지도 않은 꼬리를 흔들듯 골반을 튕기며 나를 향해 걸어온다.

     

    소복하게 침대에 앉아서 나를 향해 슬그머니 눈꼬리를 찢어 유혹하면서, 손깍지를 껴온다.

     

    무엇보다.

     

    “…뭔가요, 그건.”

     

    목에 차고 있는, 조금은 흉악한 디자인의 목걸이.

     

    내가 산 기억은 없으니 스스로 구해와서 방금 찬 거겠지.

     

    “마음에 들어?”

     

    “어느 쪽이냐면 뭐… 나쁘진 않네요.”

     

    “라스, 그거 알아?”

     

    아셀라가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아직 혼인 서류 안 넣었어.”

     

    “그렇… 죠?”

     

    “서류가 접수되면 나는 아셀라 고트베르크가 되겠지.”

     

    짤그랑, 그녀가 내 손에 들린 사슬을 쥐어주며 말했다.

     

    “제국의 황녀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 기회는 오늘밖에 없을지도 모른단다?”

     

    …흠.

     

    굉장히 일리 있는 말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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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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