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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

       회장한테 보고를 안 했다고? 그러니까 지난 이틀 동안 내가 보인 기행에 대해서 회장은 모른다는 소리인가?

       

       ……왜?

       

       아니, 뭐, 회장한테 보고하지 않으면 나야 좋긴 하다. 나도 이 몸으로 사는 동안 무슨 감옥이라도 갇힌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탈주해가면서 이렇게 싸돌아다닌 거고.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각오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회장과는 한 번은 부딪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원작에서 양혜인이 어떤 캐릭터로 등장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 예사라 루트를 가지 않는 이상은 등장할 이유가 없는 캐릭터였으니, 내가 이쪽으로 와서 처음 본 것도 이상한 것은 없지. 등장했더라도 CG가 존재했을지, 이름이 제대로 나왔을지는 모르는 거고.

       

       “어째서죠?”

       

       내가 재차 물어보자, 잠시 굳어있던 양혜인은 비로소 나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저는…… 저는 그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양혜인의 대답은, 여러모로 굉장히 놀라웠다. 지금까지 내가 봐 온 양혜인은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서브컬쳐에서 종종 나오는 ‘냉철하고 감정 없는’ 메이드였다. 만약 예사라 루트가 새장에 갇힌 아가씨를 구원하는 내용이었다면 이 메이드는 제일 먼저 넘어야 하는 벽이었을 것이다.

       

       아, 그래, 물론 양혜인이 나름대로 예사라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적은 있었다. 내가 헛소리할 때마다 나를 다소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거나…… 내가 처음으로 이 몸에 들어오고 나서는 일부러 죽을 식혀가며 입에 떠먹여 주기까지 했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마치 여러 번 해봤던 것처럼.

       

       하지만, 나는 그게 개인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프로의식에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예사라가 최소한의 건강은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 계약서에 쓰여 있었다거나.

       

       “그러니까, ‘그냥’ 보고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보고하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내가 물어보자, 양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그냥’이라는 이유는 없다. 그냥이라는 건 뭔가 일을 저질러놓고 자신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을 때, 아니면 상대방에게 그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붙이는 말이다. 파고들면 ‘그냥’이라는 단어 아래에 깔린 진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진짜 이유를 상대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그냥’은 그저 ‘그냥’일 뿐이다. 누가 들어도 억지스러운 이유이긴 하지만 그런 어색한 핑계를 대서라도 숨기고 싶은 이유라는 말이다.

       

       지금 여기서 더 물어본다고 해도, 대답을 듣기는 힘들겠지.

       

       예사라는 양혜인을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었을까?

       

       일반적인 빙의물에서 나오는 클리셰대로 나에게 예사라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예사라의 평가는 둘째치고, 지난 몇 년 동안 양혜인이 예사라에게 해왔을 행동들을 전혀 모른다는 것은 너무 큰 문제였다. 그 문제가 지금 당장 터질 일은 없겠지만, 균열은 시간이 갈수록 커질 거다.

       

       나는 예사라가 아니므로, 이전까지 있었던 예사라와 같은 행동과 사고방식을 보일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양혜인은 나에게 먼저 어째서 그런 변화가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을 테고, 윤다호와는 애초에 그런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로 살가운 사이도 아닌데다, 학교에서 그나마 대화하고 다니는 아이들은 입학 후에야 관계가 형성되었으니 내가 따로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회장이다.

       

       예사라를 이런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자.

       

       어떤 이유인지 종잡을 수는 없어도, 그 회장이라는 사람은 예사라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사람이었다.

       

       그만큼 예사라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굴겠지. 그렇게 열심히 관리하던 대상이니 더 그럴 거다.

       

       “하지만, 아가씨.”

       

       내가 생각에 빠져있자, 양혜인이 말했다. 연기인지 아닌지, 그 얼굴에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걱정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제가 보고하지 않았더라도, 회장님께서는 아가씨에게 있었던 일을 알 방법이 매우 많습니다.”

       

       “……그렇겠죠.”

       

       “그리고, 아마 아가씨께서 지난 며칠 동안 보이신 행동을 알게 된다면, 분명히 조치를 취하려고 하실 겁니다.”

       

       “무슨……”

       

       조치요, 까지 물어보려다가 황급하게 입을 닫았다. 아마 이건 예사라도 알고 있었어야 하는 정보일 테니까. 예사라가 중학생 시절 동안 외톨이로 지내야만 했던 이유와 관련된 것일 거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추측하는 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시총 3,600조라는 비상식적일 정도로 큰 회사를 운영하는 회장이다. 심지어 전 회장인 예사라의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에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보면, 그 큰 회사를 무려 가족경영으로 움직이면서도 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시총이라는 것은 그저 회사 자산일 뿐이고, 회장 개인의 자산은 그것보다는 훨씬 적을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예사라가 무려 시총의 5.7퍼센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회장인 최나경도 거의 비슷하거나, 더 많은 재산이 있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

       

       ……수백조라는 자산은, 어떤 사람들을 설득해서 악행을 저지르게 하기에 충분한 돈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사회에서 묻어버리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돈이기도 하다.

       

       “알고 있어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혹시 회장님이 다음에 이곳을 방문하신다면, 언제가 될까요?”

       

       내 질문에, 양혜인은 다소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날카로운 인상의 그녀에게서 보기 쉬운 얼굴은 아니었다. 아마 이것도 ‘원래라면 예사라가 알고 있어야 하는 사실’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하지만 양혜인은 프로페셔널한 메이드답게, 바로 표정을 지우고 공손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대답했다.

       

       “회장님은 저택에 분기별로 방문하시니까요. 다음 방문은 4월 1일입니다.”

       

       *

       

       좋아.

       

       정확한 정보를 얻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 확신이 생기긴 했다.

       

       첫째로, 예사라가 이렇게 고립되게 된 것은 유진 그룹의 회장인 최나경 때문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재산 때문일 가능성이 크고. 예사라를 어떻게든 고립시키기 위해, 아마도 예사라 주변의 인물들에게 몹쓸 짓을 했거나, 회유했거나, 아니면 둘 다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이 최나경이라는 사람은 완전히 미친 인간일 가능성이 크다. 고작 어린아이 하나 괴롭히겠다고 그렇게 큰 비용을 감수해가며 이런 미친 짓거리를 계속해왔다는 말이니까. 예사라가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계속.

       

       둘째로, 회장은 이 저택에 분기별로 한 번씩 방문한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예사라의 인간관계를 박살 내두고 이곳에 온다는 건 무슨 말일까?

       

       ……어쩌면 일부러 예사라를 학대하러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쪽 세상으로 오게 된 것이 1월 1일의 밤이었다. 만약 낮에 회장을 만났다고 치면 예사라의 등에 나 있던 멍자국들도 대충은 설명이 된다. 정신적으로 예사라를 꺾어보기 위해서 세상과 단절시켜버리고, 주기적으로 방문해 육체적인 고통을 가한다. 그렇게 주기적인 폭력으로 누가 위에 있고, 누가 아래에 있는지 각인시킨다. 아마 그런 거겠지.

       

       가정폭력을 이유로 경찰이 병원을 방문했을 때, 의사를 협박하고 경찰 고위층을 움직여 경찰들이 철수하게 만든 이유도 대충 예상이 갔다. 때린 상대가 무려 유진 그룹의 회장이라면 단순한 스캔들을 넘어 경쟁상대가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될 테니까.

       

       시총이 그만한 회사다. 오히려 국내의 다른 기업들은 경쟁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회장 관점에서 경쟁상대라면 호명 그룹보다는 차라리 같은 그룹 내에서 경영권을 두고 싸우는 다른 세력들이 더 위협적이겠지.

       

       ……잠깐.

       

       그런데, 그러면 애초에 병원에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을까?

       

       회장이 그렇게 심하게 예사라를 학대했다면, 그리고 그 학대 정황을 숨기려면 병원에 갈 바에는 그냥 저택에 처박아두는 쪽이 훨씬 나았다. 실제로 그때 나는 멍 자국 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설령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의사 하나 불러서 돈을 두둑이 쥐어주고 자택 진료를 맡기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

       

       음, 이 건은 보류해야겠다. 조금 더 정보를 얻고 나면 판단해봐야지.

       

       아무튼, 회장의 다음 방문이 4월 1일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았으니, 그때까지를 일종의 시간제한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회장이 어떻게든 나의 존재를 눈치채면 그 시간은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보다도 전에, 나는 회장이 다시 내 주변의 관계를 모두 단절시키고 나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하지 못하도록 최소한의 방어진을 쳐야 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양혜인한테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얻은 ‘확신’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부터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몇 가지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희미하다. 이건 차차 생각해가며 보완하도록 하고.

       

       지금 나에게 시급한 것은, 예사라의 기억이다.

       

       양혜인에게 물어볼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양혜인은 나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해도, 정신병에 걸렸다거나 기억상실 같은 상황을 떠올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만약 양혜인이 그렇게 판단하고 결국 회장에게 보고하는 것을 택하면, 나는 뭔가 하기도 전에 다른 곳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파악할 수 있는 한, 그러니까 남에게 물어보지 않고 파악할 수 있는 정도는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를 알고 있던 사람이 나를 ‘성격 바뀐 예사라’정도로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하니까.

       

       “…….”

       

       그래서, 나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예사라의 가장 개인적인 물건 두 개를 다시 꺼냈다.

       

       하나는 예사라의 망상 노트였고, 하나는 아직 뜯지 않은, 예사라가 회장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침대 위에 그 두 개를 늘어놓고도 한참 동안 고민하던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일단 노트부터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죄책감이 들기는 했다. 누구도 자신의 어린 시절의 망상이 담긴 노트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만 봐서는 예사라가 이 몸에 돌아올 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 게다가 내가 먼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예사라의 망상 노트를 펼쳤다.

       

       *

       

       …….

       

       그리고, 나는 내가 그 노트를 읽었던 것을 조금 후회하게 되었다.

       

       아니, 망상의 내용이 나에게 내상을 입혀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처음 망상 노트를 읽고 생각했던 것에 조금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철없던 10대 시절의, 그저 아무렇게나 휘갈긴 낙서. 나는 그 노트를 그저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처음 몇 페이지는 실제로 그렇긴 했다.

       

       하지만, 예사라는 그 망상을 그저 망상으로만 남겨두지는 않았다.

       

       문장을 쓰고, 그 위를 펜으로 그어 지우고, 다시 고쳐 쓴다. 그렇게 몇 번씩 써 내려가며 문장이 어색하지 않게, 너무 유치하게 보이지 않게 다듬는다. 대사 사이에 인물의 행동과 외모에 대한 묘사를 추가한다. 그 묘사들도 몇 번이고 고쳐가며 완성도를 높인다.

       

       그저 짤막한 대사 몇 줄이던 내용은, 뒤 페이지에선 장면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 페이지에선 장면이 줄거리가 되고, 그 뒤 페이지에선 줄거리를 바탕으로 소설의 플롯을 짜고, 캐릭터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

       

       두꺼운 노트를 넘길 때마다, 같은 내용을 새로 쓴 페이지가 계속해서 나왔다. 내용을 새로 쓸 때마다 빈약했던 스토리가 보강되고, 캐릭터의 묘사가 선명해졌다.

       

       결국 노트의 거의 끝부분에 가서는, 하나의 단편소설이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이 노트는, 그저 망상 노트가 아니다. 예사라가 나름대로 공들여서 써낸 소설의 모든 구상이 담겨있는 노트였다. 예사라는 이 소설을 대단히 진지하게 써 내려갔다.

       

       성에 갇힌 공주가,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흡혈귀에게 구원받는 내용.

       

       ……솔직히, 글을 잘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소설을 나름대로 좋아하긴 했지만, 누군가를 평가하기에는 내공이 그리 높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분명 흥미로운 내용이긴 했다. 어이없는 시놉시스와는 다르게, 공주도, 흡혈귀도, 나름대로 사연이 있고 행동에 대한 이유도 있었으니까.

       

       예사라는 이걸 그저 취미로 썼을까? 할 게 없어서,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 소설을 쓰는데 몰두한 걸까?

       

       나는 고개를 들어서 책이 드문드문 꽂힌 책장을 보았다. 책은 대부분 다양한 출판사의 세계문학 전집에서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한 출판사로 통일되어있지는 않았다. 아마 예사라는 기회가 될 때, 내키는 대로 책을 골랐던 모양이다.

       

       저 소설들이 이 소설을 쓰는 데 영향을 주었을까?

       

       이 소설의 공주는 자신을 바탕으로 만든 캐릭터였을까?

       

       노트 안에, 예사라 개인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쓰여있는 부분은 조금도 없었다. 이 노트엔 그저 예사라의 이 제목도 쓰여있지 않은 소설을 완성하기 위한 내용만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공주가 마지막에 흡혈귀와 함께 성을 떠나며, 흡혈귀에게 말하는 이 대사가, 왠지 예사라가 하고 싶었던 말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

       

       나는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머님께’라고 쓰여있는 편지 봉투를 들었다.

       

       이번에도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작게 한숨을 쉬고,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던 편지를 꺼내, 그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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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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