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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

     왕국과 제국의 국경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고, 그 중심에는 협곡이 있다.

     자연 발생한 협곡이 아니라 고대 드래곤의 시대에 생겨났든 뭐든, 인류의 시대에는 국경으로 쓰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협곡 내부는 왕국이 차지했다.

     

     관문이 없던 당시에는 협곡 내부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관문이 세워지면서 협곡 사이의 길은 왕국의 차지가 되었다.

     제국은 협곡 너머의 땅을 자신들의 땅으로 선포했다.

     그게 노스트럼 왕국의 시작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니, 무려 약 500년 전의 일이다.

     “누아르. 역사 교육을 잠깐 할까?”

     “뭐, 뭐…?”

     “지브롤터의 사람이라면 알아야 하는 상식이야. 가문의 역사 공부라고. 아, 마실 것 좀.”

     나는 메이드에게 홍차를 주문했다.

     “뭐 해? 안 가져와?”

     “아, 네! 그, 금방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도련님.”

     

     내 지시를 받은 메이드가 얼이 나간 채로 물을 끓이고 찻잎을 준비한다.

     1년 사이에 새로 들어온 메이드일까?

     이런 일을 처음 겪는다는 것처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최근에 들어온 하녀네.’

     아버지가 매국노 선언을 했던 날, 여러 하녀가 죽었다.

     자연히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는 하녀를 새로 고용해야 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시종들을 죽인 백작이 두려웠을 수도 있겠지만-

     ‘죽었던 이들이 그다지 좋은 시종들은 아니었지.’

     마침 식당에서 살해당한 이들은 행실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아버지의 평소 행실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죽은 메이드들이 분명 뭔가 큰 잘못을 했을 것이다. 백작님 앞에서 부인을 욕했다거나.

     실제로 어느정도 그랬긴 했기에,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정상참작이라는 상황.

     ‘당장은 가문 내의 하인들까지 건드리기 귀찮은데.’

     확, 한 번 엎어버릴까.

     원래 큰일을 하려면 집안부터 잘 단속해야 하는 법.

     “여, 여기 있습니다.”

     “음.”

     하인들을 정리하는 건 귀찮은 일이지만, 맛없는 음식이나 떫기만 한 차를 마시면서 고통을 받을 바에는-

     “오.”

     

     생각보다, 차향이 괜찮다.

     “신입이야?”

     “예, 예! 새, 새로 들어온 메릴리라고 합니다!”

     “흠, 그렇군.”

     이름까지는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로 차를 우려낼 줄 안다면 합격.

     ‘하인 청소는 나중으로 미뤄둘까.’

     언젠가는 해야 하지만, 당장은 아버지가 있는 이상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

     “누아르. 너도 마셔. 레타르는…안 마시는 게 좋겠네. 따뜻한 우유 준비해.”

     “우, 유유는….” 

     “안 가져왔어?”

     “아, 아닙니다! 가져오겠습니다!”

     아직 부족한 건 많아 보이지만, 저 부족함 때문에 불편한 건 내가 아니니까 상관은 없으려나.

     “그래…. 그럼 누아르. 내가 잠깐 차 마시는 동안 가만히 침묵하고 있던데.”

     “히, 히익….”

     “역사 공부를 좀 하자고 했지? 간단한 질문이야. 아버지가 죽인 오크 3천 마리, 그들이 죽은 장소는 누구 땅일까?”

     “어, 음, 제, 제국…?”

     “정답.”

     오크들은 제국의 영토에서 죽었다.

     “그러면 저 붉은 황무지는 500년 전에도 제국의 땅이었을까?”

     “어, 으음…. 노스트럼 왕국이 시작된 때를 말하는 거야…? 당시에는….”

     “지금의 제국은 아니었지. 다른 이름이었고.”

     왕국은 5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노스트럼의 핏줄을 이어왔으나, 협곡 너머는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다.

     “지, 지금의 제국 땅이라고 한다면, 제국 땅이야.”

     “맞아. 500년 전에 저 땅의 주인이 협곡 너머-‘대륙 서부’를 통일한 제국이 되었지.”

     다른 곳은 몰라도 협곡을 중심으로 한 국경은 500년째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럼, 그때도 저런 붉은 황무지였을까?”

     “어, 으음….”

     “정답은 ‘아니다’야.”

     당시에는 푸른 초원이었다고 한다.

     

     “5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협곡 너머는 저렇게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황무지가 아니었어. 무엇이 저곳을 저렇게 만든 걸까. 응?”

     “마, 많이…죽어서?”

     “정답!”

     누아르도 지브롤터는 지브롤터인 모양이다.

     “시신이 수도 없이 쌓였는데, 그 땅에 생명이 자랄 틈이 어디에 있겠어. 10년 단위로 수천 명씩 죽었는데.”

     애가 공부 머리는 없어서 그렇지, 지브롤터 가문 특유의 ‘전쟁 분야’에 관한 머리는 아버지를 확실히 물려받은 것 같다.

     “제국이 협곡을 빼앗겼던 초기에는 시신을 수습하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그냥 방치했다더라.”

     “수습하기 힘들 정도로 선조님께서 많이 죽여서…?”

     “그것도 있지만, 시신이 곧 무기가 되는 경우도 있거든.”

     시신은 전술적으로 유용한 자원이다.

     제국이 왕도 공략전을 펼칠 때 성벽 너머로 귀족들의 목을 투석기로 날렸던 것처럼,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에 그만한 무기가 없다.

     수성중인 적의 수원에 시신을 던져 물을 오염시키는 것도 방법이며.

     부패한 시신을 이용해 역병을 일으켜 퍼뜨리는 것 또한 방법이다.

     제국이 그렇게 여러 군소왕국을 지배하며 서대륙을 통일했다.

     “당연히 조상님들도 그에 대응했지. 어떻게 하셨는지 알아?”

     “아, 그건 알아!”

     누아르가 눈을 반짝인다.

     “검기로 협곡의 입구를 깎아서, 바람이 제국 방향으로 불게 만드셨어!”

     “맞아.”

     협곡은 본래, 바람이 자유롭게 부는 곳이었다.

     “아래쪽의 폭은 그대로 두고, 절벽 쪽으로 검기를 날려서 바람이 통하는 길을 만들었지. 일방통행으로.”

     제국의 마도공학자들이 뭐라고 했더라.

     ‘협곡을 검으로 깎아서 기압 차이를 만들어낸 다음, 바람의 흐름을 강제로 일으켜 제국 쪽으로 불게 만들었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자연적인 바람의 흐름은 아니었다.

     지형을 깎아, 모든 것이 제국 쪽으로 흐르게 만들었다.

     “오크 3천의 시체, 이제 어디로 갔는지 알겠지?”

     “…제국 쪽으로 날아갔구나!”

     “시체가 데구루루 구를 정도는 아니지만, 피 냄새 섞인 바람은 계속 제국 쪽으로 흘러가게 되지.”

     하지만 그렇게 자연마저 이용하여 환경을 만들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그리고 제국은 그걸 가만히 놔둘 수 없는 입장이고.”

     썩어가는 시체의 악취는 황무지를 지나, 결국 제국에 닿게 된다.

     “기어이 클레이돌 후작까지 데려와서 저렇게 시위하는 걸 보면, 이번에는 꽤 진지한 모양인가 봐.”

     “그, 그럼 진짜 전투를…!”

     “그건 지켜봐야 아는 거지.”

     살짝 식은 홍차로 가볍게 목을 축이며, 영사석을 통해 보이는 적 병사들을 살핀다.

     가능성은 두 가지.

     “아버지, 괜찮으실까…. 관문에 오르신다고 해도, 저 할아버지는 뭔가 강해 보이는데….”

     “제국이 자랑하는 장군 중 한 명이지. 성격 괄괄하고, 사납고 흉포한 멧돼지 같은 노장.”

     “히익…!”

     하나는 누아르가 걱정하는 것처럼, 전면전을 펼치려는 경우.

     ‘100년마다 서너 번은 진지하게 협곡을 넘으려고 수만 명을 때려 붓기도 했으니.’

     비록 5천 정도라 한들, 마스터를 대동하여 공격하는 건 상식적으로 어긋난 일은 아니다.

     “하.”

     “혀, 형. 형은 걱정…안 돼? 아버지가….”

     “걱정될 리가 있나.”

     진짜 걱정이 되는 건 협곡이 아니라 여기, 백작성인데.

     “누아르. 내가 만일 제국이었다면, 아버지 상대로 마스터 한 명만 보내지는 않았을 거야.”

     “그, 그럼….”

     “단순 무력시위.”

     두 번째 가능성이자, ‘제국적’인 전략.

     “아버지를 협곡으로 끌어낸 다음, 다른 꿍꿍이를 내세우는 거지.”

     “다른 꿍꿍이가 뭔데…?”

     “그야-”

     안 알려주지.

     “네가 한 번 생각해봐.”

     아버지와 협상을 통해 시신을 수습하는 비용을 청구하려고 하는 건지.

     아버지가 직접 나오지 않으면 제 1관문을 점령해서 자기네 거점으로 삼으려고 하는 건지. 

     시체가 굴러들어온 것에 대한 제국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려는, 제국민들의 여론 진정을 위한 움직임인지.

     ‘여기까지가 제국 자체의 포석.’

     미래의 황제, 현 황태자가 여기에 만일 손을 쓴다고 한다면.

     만일 내가 제국의 입장에서 이번 전장에 개입할 수 있다면.

     “로버트 경?”

     “예, 도련님!”

     내 뒤에 서 있던 로버트 경이 바로 대답했다.

     “혹시 저택에 뭐 두고 갔다거나, 갑자기 저택으로 돌아왔거나 하는 귀족 있어? 연회에 참가한 이들 중에.”

     “없습니다.”

     “지금은?”

     “…제가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는 없었습니다. 확인하러 가도 될까요?”

     “음.”

     한 명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냐. 그냥 물어본 소리였어. 혹시나 정신 나간 인간이 아버지의 전투를 보고 싶다고 연회장에 드러눕나 싶어서.”

     나는 다시, 잔을 들었다.

     “그래도 그런 자가 있으면 꼭 이야기를 해줘. 일단은, 그런 사람 접객은 내 몫이니까.”

     제국의 전술이 아닌.

     황태자의 계략이 들어간다면-

     * * *

     그 시각.

     지브롤터 백작령의 끝, 숲의 가운데에 난 도로.

     덜커덩!

     크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옆으로 넘어진다.

     히히힝!

     “크아악!”

     

     말은 놀라 소리치고,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이는 고통의 비명을 지른다.

     “무슨 짓이야!”

     옆으로 전복된 마차 문을 위로 열어젖히며, 안에서 중년의 남자-에르반트 랭귀르 남작이 중절모를 눌러쓰며 안에서 빠져나왔다.

     “안 그래도 전투를 구경 못 해서 화딱지가 나는데, 마르쉘 자네까지 내 속을 썩여야….”

     남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푸슉.

     무언가, 바람 빠지는 소리.

     그와 동시에 마부석에 앉아있어야 했을 하인-마르쉘은 옆으로 픽 쓰러졌다.

     밧줄이 풀린 말은 놀라서 도망가고, 무언가 남작의 앞에 흩날렸다.

     “그러길래 내가 술은 작작…! 으아악! 저게 얼마짜리 말인데-”

     남작은 보았다.

     “어?”

     자신의 앞에 스쳐 지나가는 밧줄의 단면이, 끊어진 게 아니라 예리하게 ‘잘려있다’라는 걸.

     “이, 이거 설마-”

     그리고 쓰러진 마르쉘의 너머, 온통 검은색으로 몸을 가린 정체불명의 이들이 손에 단검을 쥐고 있었다.

     “히, 히이익?!”

     “이 사람 맞아?”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는 목소리.

     “에르반트 랭귀르. 확실해.”

     복면인들의 대화는 평이하고, 무감정했다.

     그들이 손에 움켜쥔 단검의 차가움처럼.

     “누, 누구냐! 나는 대 노스트럼 왕국의 자랑스러운 귀족, 에르반트 랭귀르 남작-”

     푸ㅡ욱.

     남작의 목에 단검이 꽂혔다.

     그는 무언가 더 말할 새도 없이, 목에서 피 분수를 뿜으며 마차의 안으로 픽 쓰러졌다.

     “치우기 귀찮게….”

     “어차피 치우는 건 왕국 놈들이다. 우리는 이것만 치우면 돼.”

     복면인 하나가 죽은 마부의 시신을 번쩍 들었다.

     “남작에게서 돈 되는 건 다 챙겨.”

     “하인이 귀족 털어먹었다는 시나리오, 이제 질릴 때도 안 됐어?”

     “고전이 명작인 이유가 있지. 불만 있으면 이번 시나리오를 짜신 [대군]께 따지든가.”

     “쳇.”

     복면인은 구시렁거리며 마차의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 참. 그거 안 해? ‘놓고 온 물건’ 시나리오.”

     “지브롤터는 그런 수에 놀아날 자들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럼? 성은 그냥 놔두는 거래?”

     “아니.”

     푸ㅡㅡ욱.

     “이거 땅에 묻고, 너와 내가 직접 간다.” 

     “우리가? 위험하지 않아?”

     “이것도 쓰시라고 하셨지.”

     복면인 하나가 품에서 하얀 종이봉투를 꺼냈다.

     “들키면 큰일 나는 거 아냐?”

     “들킬 생각으로 일하는 건 아니잖나?”

     “그렇긴 해. 좀 거들어줘?”

     “말만 하지 말고 와서 삽 들어.”

     잠시 뒤.

     “먼저 가라. 나는 발자국을 남긴 다음, 뒤따라가마.”

     “주인을 찌르고 도망간 추한 중년 남자처럼 도망가야 해. 알지?”

     “누가 할 소릴.”

     실오라기 하나 없이 완전히 벗겨진 마부는 깊은 구덩이에 떨어졌다.

     잠시 뒤.

     까마귀 한 마리가 쓰러진 마차의 깨진 유리창 위에 앉았다.

     “어이쿠. 미안. 내가 먼저 털었네?”

     반짝이는 무언가가 뛰쳐나와 나무 위에 스쳐 지나갔다.

     꾸륵.

     까마귀는 그 무엇 하나 반짝이지 않는 추레한 무언가에서 고개를 돌려, 다시 어두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 * *

     역시.

     “누아르. 레타르. 너희 둘,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 절대 여기를 나가서는 안 돼.”

     연회를 틈타, 사람을 보낸다.

     과정은 어떻든 결과만 성공하면 그만이다.

     ‘적장의 가족을 인질로 잡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또 없지.’

     소드 마스터도 결국, 인간이니까.

     특히 아버지라면 더더욱.

     자식보다 어머니 쪽이 더 인질로서의 가치가 높다는 건 아직은 다들 모르겠지만.

     ‘다행히 여기 들어온 메이드 중에는 없는 건가.’

     홍차에 수면제를 태운다거나, 독약을 먹인다거나.

     ‘새로 고용한 메이드 중에 첩자 끼워 넣는 건 저들의 기본기인데.’

     호로록.

     ‘아직, 그 정도는 아닌가.’

     바닥에 깔린 잔여물까지 전부 마시며 확인했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심하고 마셔도 되는 모양이다.

     끼이익.

     문이 열린다.

     “아!”

     “엄마!”

     “오셨습니까, 어머니.”

     “…그래.”

     조금 피곤한 얼굴로, 기사 여럿의 호위를 받으며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라?”

     그리고 그 뒤.

     “멘테 경?”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여긴 어쩐 일로?”

     “…지브롤터 경의 명령.”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멘테 경이 입술을 삐죽였다.

     “나도 전장에 같이 따라가겠다고 하니까, 여기를 지키라고 하시더라.”

     “…….”

     역시, 아버지다.

     “그렇군요.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여기 앉으시죠. 저희는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가만히 있는 게 아버지를 돕는 일이니까요.”

     어머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고, 나는 빈 잔을 메이드에게 들었다.

     “한 잔 더. 그리고 뭣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스테이크 한 덩이 구워와.”

     “예, 예…?”

     다들 이상하게 바라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먹을 게 넘어가냐고.

     “왜 그래? 밥은 먹어야지. 잘 구워와. 아, 그리고 잘라서 내어오지 말고….”

     나는 나이프를 잡는 듯한 빈손을 들어.

     “질긴 힘줄도 케이크처럼 잘라낼 수 있는 나이프도 가져와.”

     가볍게, 허공을 내리그었다. 

     “직접 잘라서 먹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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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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