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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

       *

         

         

         “학과장실은 보건실이 아니에요.”

         

         

         성녀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이반은 고개를 모로 꺾었다.

         

         보건실이랍시고 있는 곳에선 외상에 여전히 힐링 포션이나 좀 발라주거나, 기껏 해봐야 이제 막 서품 받은 사제가 힐을 걸어주는 정도로 끝날 텐데?

         

         학생들이 기왕 성녀씩이나 있는 곳에서 굳이 그런 끔찍한 경험을 겪어야 한다는 뜻일까?

         

         이반의 표정을 보던 성녀는 가슴을 두드리며 분통을 터트렸다. (격렬한 흔들림에도 이반은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성녀는 종교인이기 때문이다.)

         

         

         “아니! 저도 제 일이라는 게 있어요! 얼마나 바쁜지 알아요? 저도 올해 처음 취임한 거라구요! 업무 인계도 안 되어 있어, 신입생들이고 학부생들이고 교수들이고 뻔질나게 들어와서 쫑알거리고, 뭔 수업 커리큘럼이 하나도 안 잡혀 있어, 대학이 왜 이래!”

         “음.”

         “음.”

         

         

         미개한 전근대 교육과정에 대해 성토하는 성녀를 바라보며, 이반과 엔리케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해줄 말은 없지만 일단 동의는 해야 했다.

         

         이반은 열심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는 불쌍한 종교인을 외면했다. 학과장실은 고적한 멋이 있었다.

         

         성녀가 취임하기 이전 학과장의 취향이었는지, 아니면 성녀의 취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참 식물이 많았다.

         

         난…? 난인가? 식물에 대해선 그다지 조예가 없는 이반은 화분 하나에 흐드러지게 늘어져 있는 멋스러운 식물의 잎을 잡고 쓰다듬으며 시간을 죽였다. (그는 정원사다.)

         

         

        -뚜둑.

         

         

         난초의 잎이 톡, 하고 끊어졌다. 하필이면 제일 굵고 멋진 줄기라서 더 경쾌하게 부서졌다.

         

         이반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성녀는 다행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버럭버럭 화를 내며 엔리케에게 수업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신세계였나. 그 느와르 영화에서 이런 비슷한 장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무표정하게 화분을 돌렸다. 화분은 아무런 소리 없이 방향을 바꿔 부러진 잎을 숨겼다.

         

         

         “아니 그래, 힘든 건 알겠어 패티, 잘 알겠다구. 그러니까 슬슬 빛 좀 꺼주라. 내가 잘못했으니까.”

         “차라리 이 기회에 귀의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전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엔리케 님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건 귀의가 아니라 귀천 같은데….”

         

         

         성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하늘에 가까운 사람이다. 교황을 제외한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즉, 그녀의 감정에 따라 터져 나오는 신성력이 지금 실시간으로 엔리케를 찌그러트리고 있었다. 착각인진 모르겠지만, 이반이 보기엔 엔리케의 몸집이 조금 작아진 것 같기도 했다.

         

         엔리케는 소극적인 자세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으. 음. 아 맞아. 패티 그 있잖아. 놀라지 말고 들어. 이 말 하려고 왔는데 깜빡하고 있었다. 내 정신 좀 봐.”

         “네, 말씀하시기 전에 신입생 중환자 50명보다는 덜 놀라운 사실이라고 해주세요.”

         

         

         엔리케가 호들갑 떠는 일이야 익숙했으므로, 성녀는 나긋나긋한 손길로 찻잔을 들었다. 한창 열변을 토했더니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엔리케는 후후,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 사실 끌려왔어.”

         “네에, 안 그래도 고아원장이 갑자기 정원사를 한다길래 엘리제를 찾아가볼까 했죠. 은퇴한 분한테 뭐 하는 짓이냐고.”

         “아니, 이 바보야. 끌려왔다고. 그 왜. 막스처럼. 다른 세상에서.”

         “푸흑?!”

         

         

         성녀는 찻물을 쿨럭거리며 뱉어내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잠시간 쿨럭쿨럭 잔기침을 하다가,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걸 왜 이제…?”

         “자기 혼자 그런 줄 알았댄다. 얘가 어디 심리 상담 받을 녀석이니.”

         “세상에….”

         

         

         성녀는 이반을 바라보며 잠시 침을 삼켰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그 충격으로 수염을… 키릴츠 형제님….”

         “아니. 그런 이유는 아니다.”

         “괜찮아요. 다 괜찮습니다….”

         

         

         성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반의 손을 따듯하게 감싸 쥐었다. 신성력이 은은히 퍼져 나오며 이반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따끈했다.

         

         엔리케가 경기를 일으키며 소파 멀찍이 물러설 때까지도, 성녀는 따듯하게 웃으며 이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형제님… 당신은 이상한 게 아니에요. 당신과 같은 분들이 많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 주여. 이 불쌍한 어린 양을 인도하소서….”

         “난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고 어색하군.”

         “그럴 만도 하지요. 그럴 만도… 용사님께서도 그러셨었답니다….”

         

         

         은퇴하고 고아원을 운영한다기에 울컥했던 날이 떠올랐다.

         

         이 불쌍한 청년은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참혹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이다지도 굳건하게 자라나 불우한 아이들을 보듬을 줄 아는 선한 심성을 길러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주의 존재하심이 아닐까.

         

         성녀는 기꺼이 이반의 은퇴를 지지하며, 매년 적지 않은 금액을 후원금으로 보냈다. 심지어 고아원 이름도 그녀 자신이 지어줬다!

         

         거기에 더해, 지금 이반의 꼴을 보라.

         

         고아원은 기본적으로 가난하다. 이는 후원금의 문제도 있지만, 고아들로 장사를 하려는 못된 원장들의 잘못이기도 했다.

         

         많은 후원금을 뒷주머니로 받고, 그렇게 길러낸 고아들을 뒷골목에 팔아 치우는 사건이 매년 몇 차례나 신고되는 세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사내는… 더러운 작업복을 걸치고  탄 수건으로 땀을 닦아가며 열심히 근로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명백하게도 아이들을 보다 더 풍요롭게 기르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아아….”

         

         

         심지어 이세계 사람이었다고? 그런데도 이 세상의 고아들을, 자신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계’의 고아들을 거두어 기르는 사람이었다고…?

         

         어쩜.

         

         성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키릴츠 형제님….”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군.”

         “저는 형제님의 세례명이 좋아요.”

         “그걸 정할 때 난 너무 어렸다.”

         

         

         이반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엔리케를 흘기며 손을 뺐다. 성녀는 자연스럽게 성호를 긋고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저는 영락없이 형제님께서 남색가이신 줄 알았습니다.”

         “크흡…!”

         

         

         엔리케는 사레가 들려 가슴을 퍽퍽 쳤다.

         

         

         “그야, 형제님께서 그렇게도 매몰차게 거절하셨던 분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요.”

         “…사정이 있었다.”

         “그럼요. 그럼요.”

         

         

         왕실근위병은 귀족이나 유력자들과 사적으로 친밀 해져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그가 ‘작은’ 이반이라고 명성을 떨치던 때. 즉 결혼시장에서 그의 주가가 수직상승했던 그 시절이 하필이면 왕실근위병이기도 했고,

         

         그의 목표가 지구 귀환이었는데 어떻게 연애 놀음을 하겠는가.

         

         그 마음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제 그는 더 이상 주목 받는 매물이 아니게 되었다는 점 정도일까.

         

         

         “서원 때문이지요? 이토록 신실하신 형제님이시라면, 역시 세례 받을 때 했던 서원 때문이었겠지요….”

         

         

         세례 받을 때 서원했던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 삼덕.

         

         이반의 행색은 그야말로 청빈하고, 어떤 염문도 없는 채로 서른이 넘었으니 그야말로 정결하고, 명예와 직위를 모두 내려놓고 청야로 돌아갔으니 그야말로 순명이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신실함…! 성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는 되지 마세요. 정말 혼인을 할 수 없게 된답니다.”

         “…음.”

         “하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정결하게 지내다 보면 어쩌면… 어쩌면 주께서 후의를 내리실지도 모를 일이지요. 주께선 사랑으로 보듬으시는 분이시고,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란 하늘 아래 가장 큰 축복이니까요.”

         “…음….”

         “오늘 형제님의 고아원에 가보아야겠습니다. 이제 퇴근 시간이 다 되었으니 함께 가시지요.”

         “너 일 다 못 끝냈다며.”

         “이 학교에 저보다 높은 분은 총장님밖에 없고, 이 하늘 아래 저보다 높으신 분은 오직 주 하나님뿐입니다. 엔리케.”

         “와오.”

         

         

         엔리케는 조용히 납득했다.

         

         *

       

       

         

         성녀는 불편하다. 이 당연한 사실을 이반은 다시금 깨달았다.

         

         많은 이유가 있었다.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전장에서 구른 탓인지 과도하게 감정적이었고, 심각할 정도로 신실했고, 정갈한 차림을 하고 있어도 때때로 시선을 관리해야 했다. (물론 이반은 상식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사제의 몸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물론 그 외에 가장 큰 이유라면 그녀가 엘리자베타와 쌍벽을 이루는 고아원 후원자 큰 손이라는 점이다.

         

         본디 돈줄을 쥔 사람과는 평등한 관계가 될 수 없는 법. 이반은 이 논지에 따라 고아원 후원자들과 항상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아… 주여.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십시오….”

         

         

         성녀는 고아원 입구에서부터 흐느끼며 걸었다. 당연하게도 원생들은 꺅꺅거리며 주위에 몰려들어 있었다.

         

         생기 넘치는 표정과 통통한 뺨, 그 어디에도 빈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 고아원에서 가장 빈곤한 행색을 한 이는 이반뿐이었다…!

         

         시설의 설비는 훌륭했고, 모든 문은 깨끗하게 기름칠된 경첩으로 부드럽게 열렸다. 복도 끝이나 가구의 모서리엔 섬세하게도 푹신한 스펀지가 덧대어 있었다.

         

         이런 꼼꼼함까지….!

         

         성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아원 건물 한 귀퉁이에 그려진 큼직한 낙서를 바라봤다.

         

         어떤 장난기 넘치는 원생이 그려 놓은 낙서는, 수염 난 괴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선물을 나눠주고 있는 그림이었다….

         

         아이들의 사랑이 절절이 느껴지는 대목이어서, 성녀는 마침내 눈가를 꾹 누르며 벽에 기대고 말았다.

         

         

         “당신은 이미 좋은 아버지가 되었군요….”

         “아 세상에.”

         “본디 가장 훌륭한 것은 마음으로 낳은 관계인 법입니다…. 키릴츠 형제님… 저는 너무 눈이 부셔요… 아 주여….”

         “날 웃겨 죽이려는 건가 봐. 제자야. 나 이젠 슬슬 부담스러워. 나 먼저 가도 될까?”

         “안 된다.”

         

         

         엔리케는 이마를 감싸 쥐며 고통스러워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용어 해설

    귀의(貴意) : 믿음에 몸을 맡기고 신앙함.
    귀천(歸天) : 죽음.

    이반이 세례명을 부끄러워 하는 이유는… 엘리자베타의 이름에서 유추가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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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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