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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

       “후우…….”

        

       그렇게 두 황녀와 헤어진 뒤에야, 클레어는 마음이 놓인다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학생들은 황녀 두 명이 가버린 뒤에 클레어와 레오를 잠깐 바라보고 있다가 다들 갈 길 가 버렸다. 다들 재미있는 것을 봤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클레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야!?”

        

       가슴에 손을 얹은 클레어가 중얼거리자, 그 중얼거림을 들은 레오가 절규했다.

        

       레오의 말에 그 옆을 지나가던 학생들이 두 사람을 슬쩍 보았지만, 레오는 그런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황녀잖아!? 그것도 한 사람은 진짜 황녀잖아!? 다짜고짜 그렇게 말을 걸면 어째!? 찍히면 어쩌려고!?”

        

       연속으로 들어오는 레오의 절규에도 클레어의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괜찮아. 황녀님…… 아니, 앨리스가 그랬잖아. 여기서는 다 같은 학생이라고. 우리도 똑같이 대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교실을 향해 걷기 시작한 클레어의 뒤를 따르며, 레오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그런 건 당연히 겉치레로 한 말이 뻔하잖아? 우리도 연회 나가봤잖아. 그때 공작이나 백작가 사람들이 말 편하게 하라고 한다고 진짜 편하게 했으면 어떻게 됐겠어?”

        

       “무도회랑 학교는 다르지. 무도회는 그날 하루에 끝나잖아.”

        

       “그러니까 더 조심해야지! 아카데미는 4년이라고!”

        

       하지만 클레어는 레오의 그런 절규를 듣고도,

        

       “……머리카락을 자른 걸까? 원래 저런 머리카락이 편한 건가? 그때는 안 자른 게 아니라 못 자른 거고?”

        

       “……저기, 듣고 있으세요?”

        

       중얼중얼 혼잣말하기 시작한 클레어의 얼굴 앞에 손을 흔들어 보이며 레오가 물었다.

        

       “이보세요, 여동생.”

        

       그 말에 클레어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팍 생겼다. 물론 어른들의 미간처럼 깊은 주름이 파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클레어의 기분이 확 상했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게 보였다.

        

       “생일도 안 지난 게 나더러 오빠라고 해? 내가 먼저 태어났으니 내 쪽이 누나지.”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그 사실을 두고 언제나 티격태격했다.

        

       생일을 따지자면 클레어보다 레오가 몇 개월 늦게 태어났다. 하지만 레오의 시선에서 클레어는 ‘나중에 가문에 들어온’ 존재였다. 실제로 어린 시절에는 레오가 클레어를 이것저것 챙겨주곤 했다. 귀족가에서 처음 지내는 클레어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렇게 ‘챙겨주는’ 입장에서 레오는 자기가 클레어의 오빠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클레어는 자기가 기억하는 자기 생일을 바탕으로 자기가 누나라고 주장했다.

        

       그걸 주제로 두고 몇 번이고 결투를 한 결과, 지금까지 3승 3패 2무. 양쪽 모두 전적이 똑같으니 굳이 누가 3이라고 따지며 싸울 필요는 없었다.

        

       사실 클레어의 생일은 클레어가 기억하는 날짜일 뿐이었기에 정확하지 않았다. 어째서 클레어가 그날을 생일이라고 생각하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클레어 자신도 몰랐다. 확실한 것은 클레어가 그레이스 가 영지에 있는 고아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 날짜를 생일로 기억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제야 좀 정신이 돌아오는 모양이네.”

        

       “내 정신은 언제나 맑고 투명해.”

        

       “맑고 투명한 정신이 갑자기 황녀 두 사람한테 달려들어?”

        

       “누가 달려들었다고?”

        

       “당연히 너, 클레어 그레이스지! 남작가 딸내미!”

        

       레오는 손을 들어 콧잔등을 꾹 눌렀다.

        

       “……그래, 황녀님께서—”

        

       “앨리스.”

        

       “뭐?”

        

       “앨리스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네가 말한 그 ‘황녀님’께서.”

        

       “…….”

        

       레오는 눈을 꾹 감은 채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죄 없는 콧잔등을 더 세게 눌렀다.

        

       저거 분명히 자국 남을 텐데.

        

       클레어는 그런 레오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그 앨리스 황녀님께서, 아무리 ‘이 학교의 사람들은 평등하다’고 하셨어도 말이야. 너도 봤잖아. 아니, 너니까 더 제대로 봤을 거 아니야. 황녀님께서 교장 선생님께 고개 숙이지 않으시는 거.”

        

       “…….”

        

       레오가 그렇게 말해버리니 할 말이 없기는 했다.

        

       한 번 군인은 죽어서도 군인. 제국의 군인정신을 함축한 말……이라고 유명한 말이었다. 누가 처음 한 말인지, 언제 어디서 한 말인지는 몰라도.

        

       그걸 두고 격언이라고 부를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제국 군인들에게 통용되는 말이긴 했다. 한 번 군인이어서 한 사람을, 혹은 어떤 단체에 충성을 바치기 시작했다면, 후에 군인이라는 직업을 그만두더라도 군인으로서 품위를 지킴으로서 자기가 충성하던 존재의 체면을 깎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충성하던 상대를 만나면 당연히 철저하게 예의 바르게 구는 것도, 그 군인정신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 학교의 교장선생, 에이브러햄 피츠제럴드 원터필드도 군인이었다. 제국 전쟁에 관해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즉, 이 아카데미를 다닐 정도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반드시 이름을 들어보았을, 살아있는 전설.

        

       기관총 진지, 참호, 이전부터 기관총에 쓰이던 보탄판을 현대의 탄띠로 개량, 포탑 전차 설계, 그리고 현대 보병 전술과 전차 전술의 선구자.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전설이자 영웅이었다. 심지어 현재 제국에서 생산 중인 주력전차에 그의 이름인 에이브러햄이 붙기까지 했을 정도니까.

        

       그러니 그의 존재가 가진 명예는 단순히 아카데미 교장을 뛰어넘어 ‘걸어 다니는 현대 전쟁사’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리고 앨리스 팬그리폰은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퇴역했더라도 결국 제국을 향해 충성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언젠가 제국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뛰쳐나가 당당히 전선에 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직도 황실에 충성하는 군인이었다.

        

       “…….”

        

       “그것 봐, 할 말 없지?”

        

       레오가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생각해 봐. 너는 말을 놓았는데, 다른 귀족 애들이 극존칭을 쓰면…… 아무리 황녀님께서 직접 하신 말이라고 해도 너무 비교되어 보이지 않겠냐?”

        

       “……음.”

        

       아주 잠깐 고민하는 표정에 빠졌던 클레어였으나.

        

       “앨리스는 그런 사람으로는 안 보이던데? 이건 내 생각인데, 아마 자기한테 존댓말 하는 애들한테 더 쌀쌀맞게 대할 거야.”

        

       “…….”

        

       레오는 ‘말이 안 통한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나저나.”

        

       잠깐 말없이 클레어 옆에서 복도를 걷던 레오가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다행이다’라고 했던 건 무슨 뜻이야? 설마…….”

        

       “맞아.”

        

       클레어는 레오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실비아라고 했잖아. 언니 이름.”

        

       “……실비아 ‘블랙’이라고 했었지.”

        

       레오가 정정했다. 지진 나듯 요동치는 레오의 두 눈동자가 복도를 열심히 살폈다. 두 사람에게 오는 시선이 몇 있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진지하게 훔쳐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남녀가 함께 복도를 걷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도 클레어 ‘그레이스’잖아. 내가 직접 그렇게 소개한다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도 않고.”

        

       물론 가문은 레오가 물려받게 될 것이다. 클레어에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러니까 문제야.”

        

       레오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네가 말하는 그 ‘실비아’가 맞다고 하더라도.”

        

       “아니, 맞아.”

        

       “…….”

        

       레오는 입을 꾹 다물고 잠깐 숨을 골랐다. 사실 레오는 두 사람의 이름이 겹친 것이 순전히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 가에 있다 보면 황가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들려온다. 그레이스 남작가는 무려 황가에서 직접 내려준 작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황제의 아이들’에 대한 꽤 구체적인 소문도 들려온다. 남작 부부는 앞으로 그레이스 가를 이어받을 레오에게만큼은 그 소문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레오는 그런 소문을 어디서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다간 목이 달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보여도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으니까.

        

       ‘황제의 아이들’이 황제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라 굳이 소문을 캘 이유는 없었지만, 그 출신이 불분명하다는 것은 확실히 조금 꺼림직했다. ‘일가가 사망한 하위 귀족가의 후손’ 혹은, ‘명예롭게 전사한 군인 부부의 아이’라는 것이 그 아이들에 대한 황가의 공식적인 입장이었지만, 솔직히 그걸 듣고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저 지방 어딘가에서 농사짓고 사는 평민인지 귀족인지 구별도 안 될 지방 남작가 정도뿐이다.

        

       아니면 평민들이라거나. 그것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평민들.

        

       귀족가에 은밀하게 나도는 소문으로는, 사실 황제가 암살단을 키우고 있다던가, 지금 황제의 아이들은 그 암살단 훈련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그런 초인적인 존재들이 당연히 그냥 골목 가에서 길을 잃은 아이일 리가 없다.

        

       클레어의 기억에 있는 실비아라는 아이는 거의 초인에 가까운 모양이었지만, 솔직히 어린아이의 기억을 온전하게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클레어가 기억하는 실비아는 클레어가 남작가로 오는 와중에 길을 잃었거나, 낙오되었거나 해서 영영 실종되었다. 그게 가장 현실적인 사고였다.

        

       게다가, 클레어가 ‘실비아’라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중에는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검은 사람도 있었고, 진짜로 ‘실비아 블랙’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클레어는 처음에는 무척 기대하고, 말을 걸어보고, 기억을 되짚어 보려다가 언제나 번번이 실망했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될수록, 클레어가 새로운 ‘실비아’를 만나는 과정에서 기대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점점 사라져갔다. 최근 2년 정도는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을 정도고.

        

       그런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아 온 사람이 바로 레오였다.

        

       그러니, 클레어가 지금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모습에서 기이함을 느끼는 것이다. 대체 어떤 이유에서?

        

       ……일단 그건 조금 있다가 알아보기로 하고.

        

       레오는 우선 클레어에게 반드시 해야 할 말을 먼저 하기로 했다.

        

       “그래, 그러니까 네 말이 일단 맞다고 치고.”

        

       ‘맞다고 치고’라는 말을 들은 클레어의 볼이 살짝 부풀었지만, 레오는 무시하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황녀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그런 과거를 대놓고 들춰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상대가 좋아할까? 일단 그걸 먼저 생각해야지.”

        

       “아…….”

        

       지금까지 자기 잃어버린 언니를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에 머리가 거기까지 돌아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레오는 다시 한번 보란 듯이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는 기억하더라도 상대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 다짜고짜 찾아가서 말을 걸면 괜히 이상한 이미지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거고.”

        

       “……그건 그렇네.”

        

       잠시 가라앉은 표정을 하고 있던 클레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리고 금세 얼굴에 씁쓸한 표정을 띄웠다.

        

       “……뭐,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레오는 그런 클레어를 그냥 두기는 뭣해서, 일단 위로를 던졌다.

        

       “만약 상대가 네가 말한 그 사람이라면, 너를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당장은 기억하지 못해도 확실하게 떠올릴 수 있겠지. 그 정도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어린 시절의 기억 정도는 아직 가지고 있을 테니까.”

        

       “알았어.”

        

       마치 힘내겠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클레어를 보며, 레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레오는 그 실비아가 황녀가 되어 다시 나타났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시험 보고 돌아가는 중에도 클레어는 그 사람을 한 번 확인했었던 것이다. 그때 크게 반응하지 않고 지나갔던 것은 그저 얼핏 보기만 했기 때문일까.

        

       게다가, 클레어가 어린 시절 언제나 이야기하던 실비아라는 사람은 황녀 실비아보다 훨씬 더 다정다감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아직 첫 만남이 겨우 지나갔을 뿐이지만, 레오는 ‘실비아 팬그리폰’이라는 사람이 앞에 어린아이를 앉혀두고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모습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 그런데, 우리 그 두 분과 같은 반이 되지는—”

        

       “아, 몰랐어?”

        

       레오의 말에 클레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반 배정이랑 자리 배정까지 끝났잖아. 우리 두 사람 다 앨리스, 실비아 언니랑 같은 반이야.”

        

       “엑.”

        

       기껏 정상으로 돌아왔던 레오의 얼굴이 다시 파랗게 질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설정상 원작에서 클레어의 성격은 말하자면 ‘무한부정’이었습니다. 뭘 하건 세상을 염세적으로 보고 실실 쪼개면서 비꼬는게 말버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의 클레어는 밝게 자랐죠.

    그래서 무한부정의 반대인 ‘무한긍정’이 되었습니다.

    =

    Ilham Senjaya 님, 후원 감사합니다!

    요즘 독자 여러분 덕분에 무척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써온 소설 중에서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르네요. 표지를 뽑기 전… 그러니까 플러스 달기 전 까지만 해도 과연 이 소설이 플러스 독점을 달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표지를 뽑고 플러스를 단 직후에 갑자기 수백 명씩 올라가는 선작 수를 보고 안도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약 3일 정도동안 더 가파르게 상승했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태그만 봐도 지나치게 힙스터 픽이 아닌가 했는데,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아 마음이 정말 놓입니다. 언제나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글을 쓰는 것 뿐만이 아니라 정말 살 맛이 납니다. 글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네요. 저의 글을 읽는데 돈과 시간을 쓰신 만큼, 앞으로도 그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글을 쓸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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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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