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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

       

       

       

       

       

       

       

       다양한 신분과 계층이 모이는 왕립 아카데미는 1학년 입학식 때, 맹약과도 같은 선서를 한다.

       학문을 배움에 있어 신분과 지위를 이용하지 않겠음을 맹세하는 것이다.

       신성한 교육의 아래, 만인이 평등하며 태생적 우월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세계임을 각인하고서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는 것.

       

       그렇게 16살에 입학하고, 19살에 졸업한다.

       그리고 20살이 되는 해에, 아카데미에서 배운 지식과 지혜를 발휘하기 위해 사교회에 정식 데뷔를 하고, 어른들의 세계로 입성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는 그 세계를 선행학습하며 경험을 쌓는 곳이기도 했다.

       계층별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엇비슷한 지역끼리 교류를 약속하며, 사교회 데뷔 때 파트너로 고를 이를 점지하기도 하며, 상류 사회로 발돋움하기 위한 아첨과 상납도 이뤄지기 시작하는 곳이 바로 아카데미인 것이다.

       

       학문의 배움과 인생의 공부가 동시에 이뤄지는 곳.

       

       그런 치열한 배움의 터에 아무런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이가 있었다.

       

       아리엘 엘론드 백작영애.

       상급 귀족인 백작가라 그 아래의 영애들이 상납과 아첨을 하려 함에도 당최 관심을 주지않는 영애였다.

       

       어른들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인생 공부, 훌륭한 인재가 되기 위한 학문의 배움, 아카데미 수석 졸업생이 되길 바라는 부모의 바람까지, 송두리째 시야 바깥으로 날려버린 아리엘은 그저 아카데미 도서관에만 관심을 두며 3년을 보냈었다.

       

       당연히 친하게 지내는 이가 없었고, 속한 커뮤니티도 없었고, 상류인들과 어울리는 방법도 모르는 그녀였다.

       

       존재감이 0에 수렴할 생도.

       학업도 교류도 흥미가 없는 생도.

       그럼에도 연신 싱글벙글 재미나게 지내는 생도.

       제 몸만한 가방엔 교과서 대신 소설을 가득 담고 다니는 생도.

       그러다간 난쟁이 똥자루가 될 거란 시녀의 걱정을 들으면서도, 책가방에 소설을 가득 우겨담을 때가 가장 행복한 생도.

       

       아리엘 엘론드에게 학창 시절의 벗이 없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성적은 치열한 하위권 경쟁에 성취도란 건 꿈도 꿀 수 없는 노릇.

       그나마 3남 3녀 중 막내라 책임질 것이 없어 부모의 엄한 눈초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렇게 3년간 아카데미 도서관의 모든 소설책을 읽었고, 강의가 없는 날이면 주변 영지까지 수소문해 새로운 책을 구해와 읽었었다.

       

       왕립 아카데미는 왕국의 중앙, 수도성에 있다.

       

       이 척박하며 머나먼 혹한의 땅에 일면식이 있는 이가 존재할 리 없었고, 설령 이곳에 [왕립 아카데미 동급생]이 있다고 한들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인간과의 교류에 어려움을 느끼지도, 성격이 모나지도 않아 친분을 쌓고자 하면 언제든 가능한 그녀였지만, 그저 그러한 행위로 독서의 시간을 빼앗길 수 없어 홀로 지냈었던 그녀였다.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몇 몇 탐독자들과 함께 심해를 파고들며 말이다.

       애석하게도 모두 로맨스 소설을 좋아해 감상을 공유할 수는 없었다만.

       

       어쨌든, 그런 그녀에게 이 야심한 밤에 찾아온 손님을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최종 평가전의 규칙상, 후보에게 심야 외출이 불가하단 사실을 알 리 없는 아리엘의 머릿속에 엘든의 이름이 특정된 건 당연한 것이었다.

       

       “손님은 응접실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응. 고마워.”

       

       이 시간에 무슨 일일까?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숙소 위치에 대해 알려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거지?

       

       걸음마다 의문을 쌓으며 응접실로 향하는 아리엘.

       기사 두 명이 출입문을 지키고 있는 그곳에 도착했고, 열리는 문 사이로 들어서며 자연스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엘든…?”

       

       어쩐 일이야? 란 물음까지 내뱉었어야 할 아리엘의 입술이 닫혔다.

       여성이었다.

       후드를 벗은 채,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는 이는.

       북부인을 상징하는 새하얀 머릿결을 가진 여성이었고, 난생 처음 보는 듯한 뒷모습에 아리엘의 걸음도 멈췄다.

       

       왜인지 모르게 드는 위화감.

       아리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세요?”

       

       아카데미 동급생 중에 북부인은 없었다.

       물론 북부인이라 해서 모두 백발이 아니었으며, 오직 북부 태생인에서만 백발이란 모색이 나와 상징처럼 된 것이었다.

       

       잠시 후.

       

       창밖을 바라보던 여성이 몸을 돌렸다.

       눈부신 백발, 청량한 빛깔의 푸른 동공, 오똑한 코와 붉은 입술, 날렵한 턱선과 가녀린 목선이 시야를 사로잡는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다만, 그 얼굴은 분명 적발을 하고 있었다.

       무르익은 장밋빛의 붉은색을.

       

       “호호. 오랜만에 뵙네요? 아리엘 영애님.”

       “어…….”

       

       목소리를 듣자, 기억날듯 말듯 가물거리는 이름.

       글자 하나 하나 조합하며 기억을 되짚는 아리엘의 수고를 여성이 덜어주기로 했다.

       백발의 끝을 쓸어내리며 말이다.

       

       “아, 머리색 때문에 헷갈리시겠구나. 저에요.”

       “어, 잠깐.”

       

       그제야 조합이 완성된 이름.

       붉은빛 적발에 대비되는 푸른빛 청안을 가졌던 생도.

       자신과 달리 학업에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생도의 이름이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또한, 자신과 결이 정반대인 생도였고 사는 곳 또한 멀디멀어 재회의 가능성이 0에 수렴한 생도의 이름이었었다.

       

       “에, 에린시아…였나…?”

       “호호. 기억해 주셔서 기뻐요.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에린시아 벨로크 남작영애에요.”

       

       광학도 르미앙과 독서광 아리엘.

       다른 듯 닮은, 둘의 재회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저질.”

       “…….”

       

       그렇게까지 경멸스레 볼 것까지야.

       나의 압도적인 반사신경 덕분에 가벼운 접촉사고만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탁탁.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고였어.”

       “그래도 제법 자연스러우셨습니다.”

       “애당초 기습 태클을 시전한 건 스승님이지 않나?”

       “반사신경을 확인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아닌데.

       분명 낯뜨거운 팬픽 낭독자에게 시원한 분풀이를 하지 못한 걸 응징하고자 함이 분명했는데.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눈을 째려보자 시선을 돌려버리는 레이첼.

       걸어온 길이 올바른 정도(正道)이다 보니, 확실히 거짓말에는 능하지 못 한 듯했다.

       물론 그것이 고용주를 지키는 호위기사에겐 훌륭한 덕목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확인은 되셨나?”

       “나쁘진 않았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이어서하지.”

       “예.”

       

       그렇게 밤 늦게까지 이어진 훈련으로 녹초가 된 난, 현재 레이첼과 함께 별채로 복귀 중이었다.

       어찌나 빡세게(?) 굴리던지, 팔다리가 흐물거릴 지경이다.

       며칠 이렇게 훈련하다 보면 연체동물로 진화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진화일지 퇴화일지 모르겠다만.

       

       “고생 많았다. 레이첼.”

       “내일도 하십니까?”

       “평가전이 일찍 끝난다면.”

       “예.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리 힘겨이 별채에 도착해 정문으로 들어섰는데, 집사장 렌들러가 잰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뒤로, 중앙보좌관 겔우드가 보였다.

       다가온 겔우드가 가까이 붙어 나직히 고했다.

       

       “공자님.”

       “왜.”

       “보좌관 겔우드 경이 전할 것이 있어 왔다고 합니다.”

       “…전할 거?”

       “예.”

       “자네가 받아두지 그랬나.”

       “그게… 대공녀님의 말씀이라 직접 전해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흠.

       우리 여주인공께서 또 무슨 꿍꿍이로 참전을 독려하려는 것일까.

       분명 기권 선언의 승인이 도착한 것은 아닐 터이기에, 다소 심드렁한 시선으로 겔우드를 바라보았고, 그가 인사를 건네왔다.

       

       “허허. 또 뵙는군요. 엘든 공자님. 땀에 절으신 걸 보니 훈련이 꽤나 고되셨나 봅니다.”

       “쉽지는 않더군요. 그나저나 이 야심한 시각에 어쩐 일이십니까?”

       

       나의 물음에, 겔우드가 공손히 손짓하며 산책을 청했다.

       별채 내부의 정원을 향해 말이다.

       

       “혹여 실례가 안 된다면 소인에게 잠시 시간을 할애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음 같아선 거부를 표하고 싶었지만, 궁금하긴 했다.

        이 야심한 밤을 빌려,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여주인공께서 직접 행차하지 아니하고 제 3자를 통해 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에, 겔우드와 함께 달빛이 내리쬐는 밤의 정원으로 향했다.

       

       

       **

       

       

       저벅저벅.

       

       새들이 잠을 청하고 풀벌레가 삶을 위하는 야심한 밤의 정원엔, 고요와 평온이 가득한 법이다.

       그곳을 거닐며 달빛을 쬐는 건 제법 훌륭한 휴식이었고.

       겔우드가 가져온 것만 아니었다면, 그저 사색에 잠긴 채 하염없이 걸었을 정도로 아늑하며 포근한 느낌의 정원이었다.

       그런 고요와 평온 속으로 겔우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곳의 별채 중 이곳의 정원이 가장 아름답답니다.”

       “오늘에서야 이리 걸어보는데, 분명 훌륭하군요.”

       “허허.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국왕 다음의 권력가.

       그 명성에 걸맞게, 별채의 정원 또한 웅장한 면적을 자랑했다.

       권세 높은 백작가의 정원에 견주어도 손색없을 웅장함과 화려함.

       물론 삶이 뿌리를 내리기 힘든 혹한의 땅이라 그런지 일반적인 것과는 다소 다른 그림의 정원이었다.

       정원수도 상록수나 낙엽수 대신 침엽수로 이뤄져 있으며, 꽃보단 눈송이가 길을 수놓고 있는 그런 정원.

       그것을 즐기며 걷고 있자 재차 겔우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이면 대면식 전의 마지막 평가전이 열리겠군요.”

       “뭐, 그렇겠군요.”

       “대공녀님의 반려로 마음에도 없을 평가전을 치루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힘들진 않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는 것뿐이니까요.”

       “혹여 기권 의지를 철회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심드렁한 대꾸에, 겔우드가 그리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기권 선언 이후 처음 들려온 그 질문은, 어떠한 바람을 담고 있는 듯했다.

       철회를 바라는 마음이.

       

       애석하게도.

       

       “철회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겔우드의 걸음이 멈추었다.

       아쉽다라.

       어떠한 경우든 중립을 고수해야 할 중앙보좌관의 발언치고는 꽤나 편향적인 마음이 서린 듯한데.

       

       “무엇이 아쉽다는 겁니까?”

       

       겔우드가 미소를 지으며 무언갈 건넸다.

       곱게 접힌 쪽지였다.

       그것을 받았다.

       

       “혼약대전을 다섯번이나 치뤘었지만, 주인공께 쪽지를 받는 후보는 처음 보았으니까요. 그럼 소인의 임무는 끝났으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린 겔우드가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기권만 철회한다면 강력한 우승 후보가 되어 대공가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인가.

       근래에 들었던 것들 중 가장 섬뜩한 이야기이지 않을 수 없다.

       철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라는 생각을 하며 쪽지를 펼쳤다.

       

       

       

       [출발지에서 북동쪽 800M 지점에 동굴이 있을 거에요. 저는 부디 당신이 내일 있을 평가전에서 승리하길 바래요. 사실… 엘든 공자에게 첫눈에 반했]

       

       

       

       

       쪽지를 접었다.

       

       주변을 살핀 후, 흙을 파냈다.

       

       쪽지를 넣었다.

       

       그 위에 얇은 잔가지로 십자가를 만든 뒤, 흙으로 덮었다.

       

       예토전생하지 못 하도록 손으로 꾹꾹 눌렀다.

       

       곧장 별채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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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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