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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

       얼굴흉터 선배가 동선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동시간 포함해서 5일 정도 걸리는 일정입니다. 근방에 개척 던전이 있다고 들어서요. 숲을 가로질러 던전 입구에서 야영, 던전을 둘러보고 다시 귀환합니다.”

       

       “목표에 변동 사항은 없습니까?”

       

       “네. 환상 마법을 위한 경험이 목적이니, 지나가다가 마주치는 몬스터들은 싹 정리해 주시면 됩니다. 계약서에 작성했던 대로 전투 횟수에 따라서 보수에 인센티브가 붙을 거고⋯⋯.”

       

       눈물점게이는 꼼꼼하게 계약 조건을 확인했다. 궁수와 도적은 저어 뒤에서 빈둥대고 있는 걸 보아하니, 머리 아픈 업무들은 눈물점게이가 도맡아 처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슬슬 협의가 끝났나 싶었더니, 이제는 ‘탐사 진행 중 인격적 모독이 발생했을 경우에 정신적 피해보상금을 얼마나 낼 것이냐?’로 투덕거리고 있었다. 10분 정도로 끝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궁수는 귀가 길쭉하고, 귀에 여러 장식품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을 보아 엘프였다. 도적은 핫팬츠에 난 구멍으로 삐져나온 기다란 꼬리가 허벅지에 둘둘 감겨 있는 걸 보니 수인이었다. 

       

       이종족이라⋯⋯.

       

       감자 농사나 짓던 시골 깡촌에서 태어나, 자색 마탑에서 셀프 통조림으로 시간을 보낸 나다. 이종족이 있다고는 들었고, 백과사전에서 그들의 생태와 습성을 배우기는 했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로 엘프는 귀가 성감대일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가 내 이마에 화살이 돋아나면 안 되니까 참았다.

       

       모델링을 위해서 샅샅이 훑어보고 있으려니 수인 도적과 눈이 마주쳤다. 도적은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나에게 간단한 수신호를 보냈다.

       

       자신을 가리키기.

       => 나는.

       

       눈물점게이를 가리키기.

       => 쟤의.

       

       모자이크가 들어가야 하는 손 모양을 하기.

       => 여자친구다. (많이 순화한 표현이다)

       

       

       임자 있으니까 혹시나 자기한테 치대지 말라는 말이었다. 나는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옆의 엘프 궁수도 혹시 마찬가지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그렇다는 수신호가 돌아왔다. 설마하니 이 파티는 하렘 파티였던 것이다.

       

       나는 새삼 다시 봤다는 눈으로 눈물점게이⋯⋯ 아니, 눈물점 가이(guy)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반반하니 여자 하나는 잘 꼬시겠다 싶었지만, 두 명이나 품 안에 받아들이는 씹상남자일줄은 몰랐다. 치정 싸움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 건가.

       

       서로의 관계가 원만하냐고 수신호로 물었다. 

       

       이 부족의 관계에는 질서가 있으며, 서로를 존중하고 사용 시간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으니 다툼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더욱 흥미로워졌다. 

       

       그렇다면 둘이 아니라 셋이 함께는 안 하는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얼굴흉터 선배한테 뒤통수를 한 대 맞았다. 수인 도적 역시도 눈물점 가이에게 제압당하고 꾸중을 듣고 있었다.

       

       수인 도적은 자신이 가진 수컷이 얼마나 훌륭한지 자랑하고 싶은 눈치였고, 나는 데이터 수집을 위해서 그걸 무척이나 듣고 싶었다. 비록 얼굴흉터 선배에 의해 저지당했지만, 때가 되면 우리는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

       

       모험이라는 건 생각보다 지루하고 힘들었다.

       

       숲을 걷고, 쉰다. 걷고, 쉰다. 걷고, 쉰다⋯⋯.

       

       엘프 궁수가 길잡이가 되어 앞장서서 걸어가는걸, 일행이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가는 것뿐인 여정이었다. 몬스터라도 나와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몬스터도 바보는 아니었다.

       

       사람이 다섯 명쯤 몰려다니면 재미 보기 힘들다는 걸 그들도 아는 것이다.

       

       산골짜기의 풍경을 관람하는 것도 몇 시간이지, 매번 똑같은 나무에 똑같은 돌멩이, 묘하게 내 주변을 자주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고 있으면 금방 지루해졌다. 

       

       그러니 모험의 대부분은 걸으면서⋯⋯ 노가리를 까는 게 컨텐츠의 전부였다. 얼굴흉터 선배가 ‘후배님은 입을 꼭 다물고 있으세요.’라고 했으므로 잡담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눈물점 가이와 얼굴흉터 선배가 뭔가 베테랑다운 대화를 나누는 걸 구경하면서, 수인 도적과 몰래 수신호로 정보를 주고받는 건 꽤 재미있었다.

       

       내가 수인 도적으로부터 눈물점 가이의 팬티 색깔과(알고 싶지 않았다) 엘프 궁수의 팬티 색깔(이건 알고 싶었던 게 맞았다)을 알아냈을 무렵, 우리는 던전 입구에 도착했다.

       

       던전 입구에는 오우거 한 마리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체구 3미터의 우락부락한 근육질, 근처의 통나무를 대충 뽑아다가 만든 몽둥이. 많은 판타지 소설에서 뉴비 입구컷을 담당하는 괴물이다. 여기도 그랬다.

       

       기사가 배치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는 천재지변과 동일한 이름이다. 오우거 한 마리는 마을 하나를 능히 부술 수 있었다. 나도 어린 시절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일을 열심히 안 하면 오우거가 잡아간다! 말을 듣고 자랐다.

       

       하지만 제국 수도에서 고용한 2등급 모험가에게는 쉬운 상대였던 모양이다. 

       

       “가볍게 몸 좀 풀겠군요. 구경하고 계시면 10분 안에 끝내겠습니다.”

       

       “우우우우──아아아!!”

       

       눈물점 가이가 방패와 롱소드를 장비하고 앞으로 나섰다. 오우거가 고함을 지르며 마주 달려들었다. 나는 눈물점 가이에게 모션 트래커 마법을 부여하고 데이터 수집을 시작했다.

       

       

       

       “그러고보니까 말입니다 얼굴흉터 선배.”

       

       “네, 후배님?”

       

       “2등급 모험가는 얼마나 강한 거예요?”

       

       “우화(羽化) 직전이죠. 우화에 성공하면 1등급 타이틀을 받으니까.”

       

       갑작스러운 고유명사가 등장하자, 나는 침착하게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표정을 지었다. 선배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리라 믿으며.

       

       “마탑주님이 아직 설명을 안 해 주셨나⋯⋯? 하긴, 모르는 편이 속 편할지도요.”

       

       “사람을 화나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첫째는⋯⋯.”

       

       “영혼을 가진 생명체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있다고 해요. 우화(羽化)를 거쳐서, 승화(昇華)로. 1황녀님이 우화하셨다고 들었고, 마탑주님은 승화를 끝내셨죠.”

       

       무협지스럽게 이해하기로 했다. 대강 듣기로, 우화가 절정 고수쯤이고 승화가 화경쯤 되는 느낌인 것 같았다. 솔직히 잘 와닿지는 않았다.

       

       마탑주의 모델링 깎는 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알았지만, 대마법사라는 타이틀이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자색 마탑에서의 그⋯⋯ 소년 기사와 격돌했던 것도.

       

       내 눈에는 소년 기사가 엉뚱한 곳에 칼질하는 것으로 보였다. 정황상 마탑주가 무언가를 한 모양인데, 무엇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삼류 무인이 바라보는 화경의 세계인가⋯⋯.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눈물점 가이는 오우거를 거의 다 요리해 가고 있었다. 전문 도축업자처럼 순서를 지켜서, 다리 힘줄을 끊어 기동력을 약화시키고, 출혈을 누적시켜서 힘을 빼내 가며 잡았다.

       

       서포트만 조금 해 주면 단번에 목을 날릴 수 있지 않을까.

       

       오우거에게 환상 마법을 걸어 헛손질을 하게 만들면 괜찮을 것 같아서,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마력을 끌어올리고, 두 번 꼬아서 오우거를 향해 튕겼다.

       

       오우거의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내가 시전한 마법은 『눈가림 환영』. 잡다한 환상을 보이게 해서 시야 자체를 가려버리는 환상 마법이다.

       

       “우, 우아아────악!”

       

       “갑자기 왜 움직임이⋯⋯?!”

       

       오우거는 마구잡이로 바둥거리기 시작했고, 오우거의 움직임을 읽어내며 싸우고 있었던 눈물점 가이는 갑작스럽게 날아오는 랜덤 패턴에 그만.

       

       깡!

       

       몽둥이에 맞고 5미터 정도 붕 떠서 날아갔다.

       

       “로, 로윌레──엔!!”

       

       “⋯⋯⋯⋯!!”

       

       엘프 궁수가 날아간 눈물점 가이를 챙기러 뛰어갔고, 수인 도적은 오우거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얼굴흉터 선배도 허리춤의 석궁을 풀어 쥐고 엄호 사격을 시작했다.

       

       잘 풀려가던 전투가 풍비박산이 났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손을 들었다.

       

       ===============================================================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들어 가며 어쩐지 듣고 있으면 심신이 편안해지는 소리를 냈다. 날름거리는 불꽃이 밤의 어둠을 밀어내며 세상의 일부를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모닥불 위에서 노릇하게 익어가는 토끼 고기도 분위기를 돋우는 데에 한몫했다. 야영에는 낭만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세 시간째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었다. 

       

       팔이⋯⋯ 무겁다.

       

       이게 바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는 아틀라스의 심정인가. 세상의 무게란 이토록 무거운 것이었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어서 좀 추웠다.

       

       눈물점 가이는 오우거의 일격에 당해서 팔이 부러져, 지금은 부목을 대고 있었다. 다행히도 포션을 부어뒀으니 한숨 자고 일어나면 낫는다고 했다.

       

       어떤 못된 환상 마법사의 트롤링에 의해 부상을 입었지만, 눈물점 가이의 표정은 밝았다. 1황녀의 편지에서 뜯어 둔 보석이 몇 개 남아있어서 그걸로 산재 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얼굴흉터 선배가 쓰게 웃었다.

       

       “왜 환상 마법이 비주류인지 아시겠죠, 후배님?”

       

       “네.”

       

       환상 마법 한 번으로 상대방의 정신을 박살 내놓지 않는 이상, 파티 플레이에서 쓰기에는 이런저런 부작용이 많았다. 오우거를 실명을 만들었더니 오히려 눈물점 가이가 부상을 입지 않았던가.

       

       써야 한다면 사용처를 잘 고민해 보고 써야 했다.

       

       가령, 모든 파티원이 원거리 공격 수단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렇다면 오우거를 환상 마법으로 묶어 두고 짤짤이를 날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잘 먹히지는 않아요. 커다랗고 흉포한 놈들은 공격이 날아 온 방향으로 돌진해 오거든요.”

       

       그럼 작고 소중한 녀석들에게 환상 마법을 걸면 일방적으로 팰 수 있지 않을까?

       

       “작고 소중하고 약한 녀석이라면, 그냥 화살 한 번이면 될 테고. 작은데 강한 녀석이라면, 환상 마법이 잘 안 걸리겠죠?”

       

       ⋯⋯고블린 군락지 같은 곳에 광역으로 『미치광이의 분노』 같은 걸 걸어버린다거나?

       

       “고블린 군락지에 납치당한 사람이 없을 때는 쓸만하겠네요.”

       

       

       대체 환상 마법으로 할 수 있는 게 뭐지?

       

       이것저것 응용 방식을 떠올려봐도, ‘그래서 화염 화살보다 잘 먹힘?’이라고 스스로 반문하면 할 말이 궁해졌다. 

       

       이 감각, RPG 게임에서 똥캐를 골랐을 때의 아무것도 못 하는 이 감각⋯⋯. 환상 마법으로 간지나게 적을 쓸어버리려거든 정녕 대마법사 자리까지 올라야 한다는 말이냐?

       

       “오우거의 정신 방벽을 뚫고 환상 마법을 걸어버린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후배님, 환상 마법은 이렇게 쓰는 거예요.”

       

       나로 인해 실추된 자색 마탑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얼굴흉터 선배가 나섰다.

       

       얼굴흉터 선배는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일행이 가지고 있는 딱딱한 육포와 퍼석거리는 건빵, 물이 담긴 수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원하는 메뉴를 말씀하세요.”

       

       “⋯⋯⋯⋯!!”

       

       모험가 파티는, 얼굴흉터 선배의 대사를 한번에 이해해 내지 못 하고 곱씹어보다가, 이내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는 전율했다.

       

       가성비 좋게, 그리고 공간을 낭비하지 않게 식량을 챙기려면, 필연적으로 맛대가리 없는 건량을 골라야 한다. 맛있는 요리를 먹겠답시고 주방 도구 같은 걸 챙기면 그게 그대로 짐이 되니까.

       

       하지만, 환상 마법사가 있다면⋯⋯!!

       

       “육포에서⋯⋯ 스테이크의 맛이 난다고⋯⋯.”

       

       “로윌렌! 이 건빵, 케이크 맛이 나요! 크라운홀의 디저트 가게에서 먹어 본⋯⋯!”

       

       “⋯⋯고향의 맛.”

       

       

       환상 마법사는 모험가 파티의 쾌적함을 현격히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모기에게 물려도 간지럼을 느끼지 않는 마법』, 『자갈밭에서 누워도 침대처럼 편안해지는 마법』까지 시연해 보인 얼굴흉터 선배는 모두의 환호성과 박수갈채를 받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좋은⋯⋯ 아침이에요⋯⋯.
    30초 정도 늦은 작가를 용서해주세요. 어제⋯⋯ 충동을 이겨내지 못 하고 게임을 달리는 바람에⋯⋯.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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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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