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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

       드라고뉴 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에메랄드 실크 호.

       최신식 컴파운드 증기기관을 장착한 이 배는 베르그송 상회의 기함 중 하나였다.

         

       에메랄드 실크라는 이름은 배의 진수식 때, 잔뜩 술에 취한 상회의 주인이 자기 딸의 머리카락 빛깔과 부드러움을 찬양하며 붙였다는 설이 있었다.

       물론 현 회장은 그 설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에메랄드 실크 호의 선원들은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이 배를 ‘아나이스의 머릿결’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뱃사람들은 배에 여성의 이름, 권위 있는 이름, 부드러운 이름을 붙이길 좋아했다. 그것이 사나운 바다 신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나이스의 머릿결은 그 3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이름이었다.

         

       아나이스의 머릿결의 주인이자 아나이스의 머릿결의 주인은 함교 바로 아래층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 틀어박혀 푸석푸석한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이고 있었다.

         

       “하아.”

         

       무려 이틀 밤을 새웠다.

       그녀의 눈 아래에 거멓게 기미가 떠올랐으며, 눈동자는 실핏줄이 터지면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는 늘어난 일을 처리하느라 제대로 자거나 씻지도 못했다.

       전신이 피로에 절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녀는 읽던 서류를 책상에 던져두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상회의 일은 처리해도 처리해도 할 일이 계속 쌓여가고 있었다.

       원래 부회장이 하던 일까지 그녀가 모두 떠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회장의 업무는 자신이 원래 하던 일의 배 이상이었다.

         

       그 사람은 이걸 다 감당하고 있었다고?

         

       아나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었다.

         

       “삼촌…….”

         

       피에르 모파상.

         

       자신의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사람.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

         

       상회에 드리운 그의 존재감은 컸다.

       그가 하던 일을 대신 처리하면서 깨달았다.

         

       그는 왜 상회를 배신했을까?

         

       설마 격무 때문은 아니겠지.

       요 며칠간 부상하고 있는 유력한 가설을 중얼거렸다.

         

       당연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인간적인 믿음에 기반한 확신이 아니었다.

         

       실질적인 이익.

       그가 대상회의 부회장 직위를 버리면서까지 얻으려던 게 뭘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았거든.

         

       그 제안이라는 것은……?

       그리고 그 제안을 건넨 사람은 또 누구고…….

         

       아나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리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회사의 경영에 실질적인 리더 역할 하던 피에르였다.

       그가 없으니 상회의 내부 질서가 엉망이 되고 있었다.

         

       그가 정상적인 절차를 밟고 물러났으면 모를까.

       회장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수배가 내려진 상태였다.

         

       당연히 평소 그의 파벌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반박과 변명을 쏟아냈고, 그들을 아니꼽게 바라보던 파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작은 부정 하나하나를 끄집어내 공격을 퍼부었다.

         

       현재 이사회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원로가 나서서 수습하고 있지만, 쉽지는 않았다.

         

       정말 이런 와중에 이번 여행을 결정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인가?

       그냥 바로 비행선을 타고 베가스로 날아가서 일에만 집중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그때, 불현듯 스치는 그의 목소리.

         

       -계속 함께했으면 좋겠군요.

         

       그 얼굴로, 그 미소로, 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던진 그의 한 마디.

         

       “헤헤……그렇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는 분명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그도 분명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 저택에서는 분명 그도 민망했을 거야.

       치료를 위해 한 행동을 가지고 마음이 있었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을 거 아냐.

       내가 이미 그를 변태라고 매도한 마당에.

         

       힘이 났다.

       그래. 이 여행은 의미 있어.

         

         

       ***

         

         

       카스티야의 동부의 항구 도시, 라만차.

         

       한 명의 남자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부둣가를 빠르게 걷고 있었다.

       아직 4월이지만, 적도에 가까운 라만차의 기후는 1년 내내 온난한 편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모자뿐만 아니라, 두꺼운 외투로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가렸다.

         

       그러나 부둣가를 배회하는 상인들은 물론 병사들까지도 거동이 수상한 그 남자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간혹 이런 말이 오갈 뿐이었다.

         

       -해적섬에 가는 손님인가 보군.

       -저렇게 안 해도 다들 신경 안 쓰는데, 사서 고생이군.

       -요즘 들어 해적섬을 찾는 외지인들이 늘었어.

         

       주민들도, 병사들도 다들 자연스레 해적섬을 입에 담았다.

       마치 그들이 친절한 이웃사촌이라도 되는 것처럼.

         

       해적섬 프리포트.

       그곳은 이름 그대로 해적들이 지배하는 섬으로, 라만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역에 있었다.

       그러나 라만차의 사람들에게 그들은 악명높은 무법자가 아니었다.

       얄미운 공화국의 상선들을 털어먹는 호탕한 의적들이자, 질 좋은 물건을 싸게 파는 훌륭한 거래 대상이었다.

         

       해적들도 약탈한 교역품을 팔아먹을 곳이 필요했기에, 라만차에 해를 끼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라만차의 공작에게 세금을 내고 있었다.

       외부의 시선 때문에 어디까지나 위대한 공작 각하의 해군에게 빼앗기는 식으로 포장되긴 했지만…….

         

       자신을 숨긴 방문객도 그런 라만차의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변장을 풀지는 않았다.

       그는 해적섬에 지저분한 거래를 하러 가는 단순한 방문객이 아니었다.

         

       그는 샤를로티아의 귀족을 죽이려 한 암살미수범으로 수배가 내려진 상태였다.

       비록 먼 남의 나라지만, 조심해야 했다.

         

       특히, 느긋한 현지 병사들보다 상인들을 주의해야 했다.

       베르그송의 문장을 단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때 대상회의 부회장을 맡았던 사람.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

         

       ‘그냥 플로랜드로 갈 걸 그랬나.’

         

       비록 그쪽의 행적은 아나이스 쪽에 전부 드러났지만, 어쨌든 자신을 따르는 심복들과 자신이 쌓아둔 기반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갔다면 이런 귀찮은 짓 할 필요 없이 바로 배를 구해서 이동했을 텐데.

         

       거기다 플로랜드 주가 속한 델로스는 공화국이라는 자부심답게, 귀족 관련 범죄에 대해서 관대한 편이었다.

       신분제가 강한 편인 샤를로티아에서는 이런 우스갯소리도 떠돌았다.

         

       ‘범죄를 저질렀다면, 지나가던 귀족을 한 대 때리고 도망쳐라. 델로스에서 해방운동가로 대접받을 것이다.’

         

       하지만 피에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델로스는 주민의 사적 제재에도 관대한 곳이었다.

       베르그송의 총사나 아나이스가 고용한 용병들에게 자신이 끌려가도 공화국은 내 알 바 아님! 하고 손을 놓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차라리 이곳이 나았다.

         

       “루아젤 씨?”

         

       약속한 장소.

       상인 복장을 한 남자가 그를 불렀다.

       루아젤은 해적들과 거래할 때 쓰는 그의 가명이었다.

         

       남자는 단정하게 차려입었지만, 건들거리는 행동거지나 살벌한 눈빛은 해적의 그것과 같았다.

       항구의 관리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가 정말로 상인이라 생각하고 입항허가서에 도장을 찍어줬을 리 없었다.

       라만차와 해적섬의 비밀스러운 내통관계는 소문대로였다.

         

       “얘기를 들었습니다. 가시죠.”

         

       남자를 따라 배에 올랐다.

       선원들 전부 ‘나 해적이오’라는 글씨를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 같은 험악한 인상이었다.

         

       “하루 정도 걸릴 겁니다.”

         

       남자의 말대로 배는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해적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적섬은 해안 대부분이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섬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암초들이 즐비하게 솟아 있는 만의 입구밖에 없었다.

       배 한 척도 드나들기 까다로울 정도로 좁은 곳이었지만, 그가 탄 배는 능숙하게 파도를 타며 섬 안쪽으로 진입했다.

         

       만의 안은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초승달 형태로 펼쳐진 부두가 그들을 에워쌌다.

       적어도 수십 척은 되어 보이는 해적선들이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다.

         

       프리포트는 그 악명 높은 이름과 달리 매우 깔끔했다.

       이곳은 엄밀히 말해 해적들의 거처가 아니었다.

       이름난 해적들은 다들 카리브 해의 어느 곳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은 물건을 거래하고, 유흥을 즐기러 오는 일종의 번화가였다.

         

       피에르는 섬에 있는 리조트 한 곳으로 안내를 받았다.

       거래를 위해 두어 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해적섬을 관리하는 해적 두목 중 한 명인 ‘집게발’.

       그의 무리가 자주 들르는 곳이었다.

         

       -와하하! 어이, 그거 재밌네! 한 번 더 해봐!

       -여기 술 한 궤짝 더!

       -크하핫! 가관이더라니까! 해군 놈들!

         

       리조트 안에서는 한창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영장 주변으로 세워진 파라솔들과 그 아래에서 술 냄새를 잔뜩 풍긴 채 떠들어대는 해적들.

       그들의 술 시중을 드는 매춘부들.

       수영장에서 진지하게 내기 시합을 하는 어린놈들.

       튜브에 엉덩이를 끼운 채 쿨쿨 졸며 떠다니는 백발의 늙은 놈.

       유쾌한 농담으로 매춘부들을 까르르 웃기다가 피에르를 보고 인사하는 젊은 놈.

         

       “오랜만입니다, 루아젤 씨.”

       “잘 있었나, 문어다리.”

       “하핫! 기억하시는군요.”

       “자네가 아니라 자네 오른발을 기억하는 걸세.”

         

       피에르에게 인사를 한 ‘문어다리’라는 해적은 별명 그대로 오른발에 사람의 것 대신 문어의 다리를 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해적들 모두가 몸 여기저기에 사람의 것이 아닌 부위가 달려 있었다.

         

       어떤 놈은 한쪽에 뱀의 눈이 있었고,

       어떤 놈은 입안에 상어의 이빨을,

       어떤 놈은 팔 대신 털 난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발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파라솔 아래에는 배가 툭 튀어나온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한 손에 집게발을 달고 있었다.

       바로 그가 이 해적단의 두목이었다.

         

       “어서 오시구려, 피에르 씨.”

       “……루아젤이오.”

         

       이 얼간이는 기억력이 어떻게 된 거야?

       만날 때마다…….

       피에르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참, 그랬지. 자, 어서 여기 앉으시오. 이봐! 여기 마실 것 좀 내와! 어, 뭐였더라?”

       “커피.”

       “아, 그래! 커피!”

         

       얼마 안 있어 메이드 복을 입은 소녀가 커피 한 잔을 내왔다.

       소녀의 귀에는 사람의 것 대신 토끼의 귀가 달려 있었다.

         

       이 아이도 해적인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피에르는 향긋한 향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커피군.”

       “어, 그 뭐였더라? 얼마 전에 공화국 상선 하나를 털었지. 거기서 주워 온 거요.”

         

       집게발의 말에 피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의 기억력이 어찌 됐든, 배를 몰고 해적단을 이끄는 솜씨는 인정하는 바였다.

       어설픈 자라면 애초에 해적섬의 관리자가 될 수 없었다.

         

       그는 피에르의 손을 유심히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손가락 하나가 없어졌군.”

       “쥐가 베어 물었소.”

       “이런! 쥐는 무섭지! 난 예전에 불알을 물어뜯길 뻔한 적도 있는데……. 어쨌든 걱정하지 마시오. 사제님에게 부탁하면 새로 하나 달아 줄 거요. 크흣, 뭐가 좋겠소. 호랑이?”

       “그것도 부탁하면 좋겠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얘기가 있소.”

       “손가락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니……. 뭔데 그러시오?”

         

       피에르는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얘기했다.

       이야기를 듣는 집게발의 표정은 느긋했다.

       오히려 이상한 대목에서 껄껄 웃기까지 했다.

         

       젠장, 이 자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군.

       안 되겠어.

         

       “그렇게 웃을 때가 아니오. 자세한 건 모르지만, 당신들 일이 세상에 알려져서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이제 나도 발을 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소. 그러니 이제 그 사제라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시오.”

         

       피에르의 간곡한 요청에도 집게발을 껄껄 웃기만 했다.

       그는 독한 럼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문제 될 거 없는 이야기군.”

       “당신, 이야기는 제대로 들었소?”

       “물론! 그……크흐흐……당신이 쏜 그 사람 말인데…….”

       “잠깐.”

         

       그때, 그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목소리.

       그건 어린 소녀의 것이었다.

         

       옆에서 쟁반을 든 채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 복장의 토끼 귀 소녀.

       그녀가 팔을 들어 집게발을 제지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녀가 피에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딘가 위엄이 느껴지는 말투.

         

       피에르의 오랜 경험이 말했다.

       결코, 일개 하녀가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

       피에르의 머리는 이럴 때 더 빠르게 돌아갔다.

         

       집게발의 말을 자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

       그가 윗사람으로 모시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당신이 사제……?”

       “응. 맞아. 눈치 빠르네.”

         

       그녀는 거침없이 피에르를 하대했다.

         

       피에르는 적잖이 놀랐다.

       그녀가 바로 요즘 카리브해에서 은밀히 퍼져 나가고 있는 부두교의 주인이라고?

         

       토끼 소녀는 그가 생각에 잠길 틈을 주지 않고 연이어 말했다.

         

       “자세한 얘기는 좀 있다 해주지. 그것보다 다시 말해봐. 네가 그 남자를 쐈다고?”

       “아, 그랬소만…….”

       “아니, 다시 말해봐. 넌 그 아나이스라는 여자를 쐈다고 했지. 그리고 그가 끼어들어 대신 맞아줬다고 했어. 정말이야?”

       “정확하오.”

         

       그의 말을 들은 토끼 소녀의 입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닌,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담은 미소였다.

       옆에 앉아 있던 집게발이 표정을 굳히며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거 재미있네.”

         

         

       _____

       1권 끝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권 분량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독자님들의 응원 덕분입니다.

    주말은 쉬고 월요일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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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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